90화 제2국면(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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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제2국면(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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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제2국면(6)
2023.01.01.
솔직히 말해서, 질풍의 공격은 미적지근했다.
최근에 마주친 그 어떤 마물보다도 강하기는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마물에 비교해서 그랬다. 마족이든 케이든 각성자들이든, 자이안이 알고 있는 그 어떤 ‘강자’들과 비교해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언제까지 이런 짓을 계속할 셈이죠?”
“…….”
“이대로는 저 역시 당신을 죽일 수밖에 없어요. 당신이 바라는 게 그런 건가요?”
질풍은 고집을 부리는 어린애 같았다. 자이안은 문득 피곤해졌다. 그는 만약을 대비해 장검으로 변형시킨 스펙트럼을 다시 펜던트로 되돌렸다. 질풍의 공세가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이내 더 거세졌다.
‘내력에 모든 MP를 집중. 신체 구석구석, 손가락 끝마디에 이르기까지 균일하게 강화.’
내력은 근접계통 각성자가 공통적으로 이용하는 기초 기술이지만, 자이안은 오랜 시간 바로 그 기초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프레이도 아르스도 그쪽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었다.
그나마 프레이가 기초 이론은 알고 있었으나 정말로 기초에 불과했다.
크룩스가 합류한 뒤에야 자이안은 내력이 비록 기초 기술이지만 사람에 따라 무궁무진한 응용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배우고 심도 깊게 단련했다.
‘특정 부위의 흐름을 일시적으로, 동시에 균일한 속도로 빠르게.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일정한 박자로.’
크룩스는 온갖 기상천외한 능력을 지닌 각성자들 사이에서도 매우 이질적인 존재였다. 근접계통에 치우친 특성을 가진 각성자라도, 보통은 내부 MP를 외부에 방출하거나 기초적인 마법을 사용하는 등의 기술은 어렵지 않게 배운다.
그러나 크룩스는 그 모든 기술을 조금도 익히지 못했다. 대신 그는 체내 MP 조작에 대해서는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엄청난 재능을 드러냈다. 유례없이 극단적으로 한쪽에 치우친 각성자였다.
크룩스는 자신의 특수한 재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더 이상 응용할 여지가 없다고 알려진 내력을 끊임없이 파헤치며 다양한 파생 기술을 만들어내고, 내력을 이용한 신체 강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운동 그 자체가 취미가 되었고, 내력도 근육도 정직하게 단련한 만큼 강해진다는 공통점을 깨달은 뒤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백보신권이라는 가공의 무술이 있거든요. 말 그대로 백 걸음 밖에 떨어진 적을 주먹으로 타격한다는 건데, 물리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사실 각성자라면 못할 것도 없단 말이죠. 근접계통 각성자들도 만약을 대비해서 원거리 공격수단을 한둘 정도 마련하고는 하니까. 근데 전 특성이 특성이라 그게 현실적으로 어려웠어요.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죠. 거기서 포기하면 전술의 폭을 자기 손으로 제한할 뿐이니까.”」
언젠가 크룩스에게 들은 가르침을 되새기며, 내부의 MP에 온 의식을 집중했다. 검 같은 냉병기를 통한 공격은 아무리 조심해도 상대에게 큰 상처를 입힐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크룩스가 가르쳐준 맨손 무술이 유효할 것이다.
「“백보신권은 단순한 근접 타격기인 정권을 단련해 그 결과 먼 거리의 적을 타격하게 된다는, 냉정히 생각해보면 뭔 말도 안 되는 무술이에요. 그런데 솔직히 재밌잖아요? 특성 때문에 원거리 공격수단이 없는 제가 비슷한 원리로 원거리의 적을 때릴 수 있게 되면. 그래서 수련을 시작했죠. 하하, 사실 원거리 공격수단이 필요해서 수련을 시작한 게 아니라, 재밌어 보여서 시작한 게 맞아요. 원거리 공격은 부수적인 목표였죠. 근데 이게 되더라고요.”」
‘일정 박자로 가속하는 MP의 흐름을, 그 속도를 유지한 채 몸 전체에 천천히 순환시킨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순환 속도를 더 빠르게.’
「“이론은 어렵지 않아요. 저라고 진짜 한 줌의 MP도 밖으로 방출하지 못하는 건 아니거든요. 말 그대로 한 줌에 불과해서 문제지만. 그러면 그 한 줌의 MP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최소 출력으로 최대 타격을 입힐 수 있게 방출하면 되는 거잖아요? 거기서 발경…… 그러니까 진각을 기점으로 하반신부터 상반신까지 몸 전체를 차례대로 회전, 가속해 타격 부위에 이르러서 최대한의 위력을 얻게 되는 무술 이론을 접목했어요. 체내 MP를 계속해서 순환, 가속시키며 힘을 모았다가, 내지르는 찰나의 순간 그 모든 힘을 한 방향으로 송곳처럼 날카롭게 쏘아내는 거죠.”」
눈을 번쩍 뜬 자이안이 몸을 비틀며 정권을 질렀다. 문자 그대로 송곳 같은 일격이었다. 쏘아져 나간 송곳이 모든 바람의 흐름을 제어하는 힘의 중심을 정확히 꿰뚫었다.
“아앗……?!”
질풍의 새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온몸이 따끔따끔한 통증을 호소했다. 피부 곳곳에 날카롭게 갈라진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크룩스 형이었다면 생채기 하나 없었을 텐데.’
스스로의 훈련 부족으로 인한 상처이니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전신에 자연치유능력을 높이는 백마법을 걸고, 자이안은 제대로 된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진 질풍에게 다가갔다.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마세요.”
질풍이 고개를 번쩍 들고 자이안을 노려보았으나, 이내 힘없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체념의 표시였다.
아니, 애초부터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이안을 처음 본 순간부터, 온 힘을 다해도 이기는 건 어려운 상대일 거라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바보처럼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자이안에게 하는 말인지, 그도 아니면 지키지 못한 제자들에게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이안은 작은 한숨을 뱉고는 다시 그녀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더 이상 난동을 부릴 것 같지는 않았다. 마음의 정리를 할 때까지 기다릴 뿐,
“저기, 주제넘은 건 알고 있는데, 그래도…… 부탁 하나만 들어줘.”
질풍이 천천히 일어났다. 자이안은 잠시 경계했으나 더 이상 그녀에게 싸울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자이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들어줄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말씀해보세요.”
“졸트를 만나고 싶어.”
생각지 못한 부탁이었다. 그리고 별로 어렵지 않은 부탁이기도 했다.
“그 정도야 뭐. 마지막으로 들어주는 거예요.”
자이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자이안에게는 미안한 소리였지만, 케이와 프레이가 작정하고 합심하기 시작하자 사상자의 수는 그 전보다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내일쯤 되면 저 녀석도 멀쩡해지겠군. 아이고, 삭신이야. 은퇴한 사람을 강제로 현장에 밀어 넣고 굴리다니. 자이안 저거도 하여간 잘 보면 은근 나쁜 놈이야.”
-있잖아. 전부터 궁금했는데, 왜 프레이는 가끔 진심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말을 해?
“…….”
케이의 순진무구한 질문에 프레이의 말문이 턱 막혔다. 이렇게 정면에서 순진하게 지적받으니 나이가 마흔을 한참 넘은 그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프레이는 몇 번 변명을 꺼내려 입을 벙긋거리다가, 결국 케이를 상대로는 뭔 소리를 해도 안 먹히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대답 대신 한숨만 뱉었다.
-아! 이제 알겠다. 부끄러워하는 거구나?
“야 이, 너는 진짜…… 사람이 기껏 화제를 흐렸는데 억지로 후벼 파면 기분이 좋냐?!”
-에에엥? 왜 화를 내?
“아오, 젠장. 됐다. 내가 덩치만 큰 어린애를 상대로 뭔 짓을 하는 건지.”
프레이는 진절머리를 치며 다시 전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은 따로 할 일이 없었다. 신기하게도 오늘은 시작부터 법왕국 측 병력이 묘하게 얌전했다.
날도 흐릿한 김에 폭우나 시원하게 내려줄까 했는데, 약한 지진만 한두 번 선물해줘도 맥없이 기세가 꺾여 후퇴했다.
“분명 뭔가 있을 것 같았는데, 정오가 되도록 아무 일도 없군. 내가 잘못 짚었…… 응?”
말이 씨가 된다는 격언을 증명이라도 하듯, 먼 곳에서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법왕국 진영에서 멀리 떨어진 후방으로부터 피로 얼룩진 전장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마차가 여러 대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주교들인가? 아니지. 그놈들이 타는 마차는 그래도 저거보다는 검소했는데. 잠깐만, 주교 위에 있는 게 뭐지? 추기경인가?”
-추기경은 주교의 상위 서품이 아니라 주교가 맡게 되는 역할 중 하나야. 그러니까 한 사람이 주교이면서 동시에 추기경일 수도 있어. 공식적으로는 주교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건 법왕뿐이고, 비공식적으로는 성녀까지 포함해 두 명이야!
“법왕에 성녀라고? 근데 넌 그걸 어디서 배운 거냐?
-옛날에 마법사들이 얘기하는 걸 들었어!
케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워낙 전황이 지지부진하다 보니 법왕이 직접 행차한 건가? 어쩌면 마침내 이 무의미한 전쟁을 멈추고자 결의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은 비관적으로 추측하고 보는 버릇이 뿌리 깊게 박힌 프레이는 도저히 그런 희망적인 상황일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프레이는 시력 강화 마법의 정밀도를 높여 법왕국 진영 후미에 도착한 마차들의 동태를 철저히 살폈다. 먼저 마차 하나가 열리고 4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 나왔다.
백색 기조에 금색 자수로 문양을 새긴 복장을 하고 있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법왕일 가능성이 높았다.
법왕으로 추측되는 그 남자가 두 번째 마차로 다가갔다. 문이 열리고 안에서 멍한 얼굴을 한 여자가 기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나왔다.
가슴에는 직경이 사람 상반신만 한 금속 고리 같은 물건을 안고 있었다.
“……이런 젠장. 저게 뭐야?”
금속 고리에 시선을 향한 프레이는 그게 얼마나 이상한 물건인지 곧장 눈치 챘다. 마안을 열 필요도 없었다. 완전히 균형이 깨진 신성력이 아무렇게나 흘러나오며 사방에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으니까.
“……!”
법왕이 뭐라 외치며 여자에게서 금속 고리를 받아들어,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 순간 프레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저 또라이 새끼들이! 완전히 미친 거 아냐!”
프레이가 두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가 거칠게 내리찍었다. 안 그래도 우중충하던 하늘이 삽시간에 흐려지더니 그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번개가 쉴 새 없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보다 한발 앞서 법왕 주변의 사제들이 온 힘을 모아 가호를 펼쳤다. 번개가 가호와 부딪치고, 아주 잠깐 버티는가 싶더니 산산이 부서졌다.
가호를 펼친 사제들이 어마어마한 반동에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불과한 유예. 그러나 법왕에게는 그 짧은 틈이면 충분했다.
성유물이 찬란한 빛을 뿜었다. 엄청난 열량을 가진 빛이 걷잡을 수 없이 팽창했다. 놀랍게도, 쏟아지는 번개를 막아내더니 천천히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아무리 급하게 쐈기로서니 내 마법을 밀어내?!”
프레이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더 강한 마법을 쏟아내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그 일이 일어났다.
한계까지 팽창한 빛이 폭발해, 수십 갈래로 나뉘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러다가 공중에서 궤도를 틀어 마법사들의 진영으로 향했다. 빛의 궤적 하나하나가 과거 양산형 성녀 한 명이 일으킨 폭발과 동일한 열량을 품고 있었다.
무차별적인 파괴와 살의의 덩어리가 마법사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