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제2국면(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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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제2국면(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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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제2국면(5)
2022.12.31.
질풍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자이안이 용서의 말을 꺼낼 때까지 허리를 숙이고 있을 셈이었다. 그러나 자이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드세요.”
“미안해. 내가 대신 사과할게. 제발 제자들은…….”
“고개 드세요.”
질풍은 흠칫 몸을 떨며 침묵했다. 결국,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제자들이 저지른 잘못을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제지하지도, 가르치지도 않고 그저 방치했을 뿐이라면, 당신들 역시 공범이에요.”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요? 그건 이상하네요. 정말 알고 있으면, 저를 찾아오면 안 되죠.”
질풍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겉모습과 안 어울리게 참 인간적인 표정이라고 어딘가 방관자처럼 생각하며, 자이안은 냉정하게 충고했다.
“용서를 구하고 싶으면 피해자분들께 갔어야죠.”
“읏…… 그건, 하지만…….”
“제가 당신들 제자나 그 밑에 마법사들을 살려둔 채 탑에 놔둔 건, 그들을 심판하는 건 제가 아니라 그들에게 고통받은 분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저는…… 그래요. 당신도 며칠 동안 저를 지켜봤으니까 알지 않나요? 이 무의미한 전쟁을,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걸 막고 싶을 뿐이에요.”
“하지만, 그 사람들이…… 우리를 용서해줄까?”
그건 자신이 대답해도 되는 물음이 아니었다. 자이안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여기서 어떻게 대답한들 피해자분들의 생각이 바뀌지는 않아요. 그래도, 무의미해도 좋으니 제 예상을 듣고 싶은 거라면…… 아마 어렵겠죠.”
“…….”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납치해서는 길게는 10년 넘게, 몸을 멋대로 잘라내고, 마물의 몸을 이어붙이고, 바라지도 않았는데 흉측한 모습으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내구성을 시험한다면서 불로 태우거나 날붙이로 마구잡이로 찌른다거나, 그런 실험을 했다고도 들었어요. 게다가 이성을 잃고 본능만 남은 짐승에 불과했던 그때를 모두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이 같은 입장이라면 용서할 수 있겠어요?”
그들의 분노는 마법사들을 모두 자기 손으로 죽이기 전까지는 가라앉지 않으리라. 그런 결말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자이안은 안타까웠으나, 그 증오에는 강하게 공감했다.
당사자가 아닌 자이안이, 그들을 구해줬다는 사실을 명분 삼아 억지로 용서를 강요하는 건 주제넘은 짓이었다.
“……내 동료들이, 지금 네 일행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어.”
“뭐라고요?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죠?”
“미안, 정말 미안해. 그래도 나는, 우리는, 못난 제자라도 그 애들이 죽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자이안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제야 그녀의 말뜻을 알 것 같았다. 남은 장로 셋이 유리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법왕국과 보석탑에서 구한 피해자 150여 명은 물론, 마을에 살고 있는 죄 없는 주민들도 있었다.
“당신들은 어디까지고 이기적이군요.”
“제자들의 목에 채운 유물을 풀어줘. 우리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야.”
“원로 교수들을 풀어주고 아무 심판 없이 그들을 용서한다 해도, 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될 겁니다.”
“내가 바람에 신호를 태워 보내면, 내 동료들이 지금 당장에라도 네가 구한 사람들을 공격할 거야.”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 같은 건 발끝에도 미치지 않는 분들께서 그들을 지키고 계시니까요.”
크룩스를 저쪽에 보내자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절묘한 판단이었다. 물론 유민과 아르스, 거기에 유리아와 소아레스까지 모두가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들이다. 저쪽을 걱정할 필요는 조금도 없으리라.
‘삼촌도 오지 않고 있는 걸 보면, 질풍의 상대 역시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는 뜻이겠지.’
본심을 말하면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질풍이 이기심 때문에 그릇된 행동을 하려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녀 본인이 싸워서라도 목적을 이루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제자의 죄는, 스승의 죄.”
질풍은 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득, 자이안은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도 이런 짓을 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 잘못됐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제자를 위해 제 발로 오명을 뒤집어쓰려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제자의 죄의 책임을 스승이 대신 갚는 것도…… 이상할 건 없겠지!”
그 생각에 결론을 내릴 틈은 없었다.
질풍이 두 팔을 거칠게 휘둘렀다. 그녀의 팔이 삽시간에 형체를 잃고, 대신 격렬한 폭풍이 굉음을 동반하며 자이안을 덮쳤다.
* * *
“……저쪽은 시작한 모양이군.”
무방비하게 자리에 주저앉은 중압이 느릿느릿 말했다. 그, 정확히는 그를 포함해 갑자기 나타난 세 장로를 감시하며 유리아는 기묘한 기분이었다.
그들이 자신들을 보석탑의 장로이며 원로 교수들의 스승이라고 소개했을 때, 유리아는 격렬한 전투를 예상했다. 다행히 이쪽의 전력은 충분했다.
피해자 150명, 마을 사람까지 합해 거의 500명을 지키며 싸워야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백마법의 달인 유민이 함께 하고 있는 이상 걱정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긴장하지 마라.”
“우린 너희와 싸우려는 게 아니야.”
“그냥 너희들 얘기 좀 듣고, 너희가 구했다는 피해자들도 보고, 아마 귓등으로도 안 듣겠지만 그래도 안 할 수는 없으니 그들에게 사죄하고, 또……. 흠, 그 정도네.”
그러나 유리아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크룩스나 다른 각성자들도 유리아와 같은 심정인 모양인지, 다들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질풍은 아무래도 아끼는 제자들을 포기할 수 없는 모양이지만, 보다시피 우리는 어쭙잖게 필멸의 굴레를 벗어던진 탓에 사람이라기에도 뭐한 어중간한 존재가 되고 말았거든. 이거 보라고. 얘는 무거운 철 덩어리고, 나는 걸어 다니는 불꽃, 맹목 쟤는 그냥 시커먼 곰팡이 덩어리처럼 생겼잖아.”
“곰팡이가 아니라 공허!”
“하하하. 쟨 다른 거엔 다 심드렁하면서 저 말만 들으면 무조건 화내더라.”
동료를 놀리며 짤막하게 웃은 업화가 탈선한 화제를 다시 되돌렸다.
“요점은, 우리는 이기심이나 동정심 같은 인간적인 감정으로는 잘 움직이지 않게 됐다는 거야. 아, 질풍 빼고. 그래도 머리로는 알고 있거든. 제자들이 저 사람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걸. 잘못을 했으면 사과해야지. 용서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고는 별개로.”
“당신들이 대신 사과한들, 피해자분들께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텐데요?”
“어…… 그것도 그러네.”
크룩스의 반문에 업화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거기까지 생각해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사과라는 게, 자신이 죄를 뉘우치고 있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죄책감을 덜어내는 이기적인 행동이 될 수도 있어.”
“맹목의 말이 맞다. 업화, 우린 좀 더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다.”
“뭐어어? 여기서 나한테 책임을 씌우는 거야? 다들 질풍이 지시하는 대로 군말 없이 여기까지 와 놓고는!”
친한 친구처럼 티격태격하며, 그들은 자기들의 사정을 설명했다.
탑과 미궁의 이상을 감지하고 잠에서 깨어났다. 붙잡힌 원로 교수들에게 앞뒤 사정을 듣고, 질풍이 적어도 목숨만이라도 구하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중압이 대지의 기억을 읽어내 자이안, 그리고 유리아 일행이 향한 위치를 파악한 다음 그들 역시 두 편으로 갈라졌다. 질풍은 자이안을 설득하는 역할을 맡았고, 남은 셋은 일이 틀어질 때를 대비해 인질을 확보하기로 했다.
“제가 한마디만 해도 될까요?”
유리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행들이 눈짓으로 허락하자, 그녀는 장로들을 똑바로 쏘아보며 말했다.
“어떻게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할 수 있어요?”
“아하하하하하! 그러게.”
업화는 자지러지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그만큼 엄청 인간적이지 않아? 제자들을 구하고 싶어서, 추하게 발버둥 치는 것도 개의치 않고 자진해서 더 큰 죄를 짓게 될 거라고 알면서도 제 발로 늪에 뛰어드는 거.”
“우린 질풍의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공감할 수는 없다.”
“그게 우리가 너희를 찾아와 이런 실없는 소리나 하고 있는 이유야.”
크룩스는 팔짱을 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세 장로가 굳이 여기로 찾아온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차피 질풍을 포함한 모든 장로들의 힘은 서로 비등한 모양이니, 그냥 셋이서 합심해서 잠적하면 그만이지 않을까?
“그건 좀 힘들어. 질풍은, 이름을 듣고 예상했을지도 모르지만 바람 그 자체거든.”
“바람은 어디에나 존재하지. 작정하고 이 별을 뛰쳐나가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그리고…… 사실 굳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따로 있어.”
의외로 선선히 의도를 밝히려는 모양이었다. 크룩스는 얌전히 업화의 뒷말을 기다렸다. 업화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 목숨으로 제자들의 죄를 갚는 거.”
“그건…… 무의미하다고 했잖아요?”
크룩스는 인상을 쓰며 아까 했던 말을 다시 했다.
“피해자들이 복수하고자 하는 대상은 원로 교수나 정교수, 준교수 등 직접적으로 실험에 관련했던 이들이에요. 그야 엄밀히 말하면 당신들 역시 간접적으로나마 관련된 입장이기는 하겠죠.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자고 있던 당신들이 사실은 최종 책임자라는 소리를 대뜸 들어도, 피해자들에게는 별로 와닿지 않을 겁니다.”
특히 페시스의 민심 장악 덕분에 피해자들이 이성을 되찾은 지금은 더욱 그랬다. 장로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억지로 그들을 처형해버리면 기껏 가라앉은 피해자들의 감정에 쓸데없이 불을 댕기는 결과가 될지도 몰랐다.
“잠깐만요, 크룩스 오빠. 장로들은 결국 제자들이 사람들을 잡아다 강제로 실험하는 걸 알면서도 놔둔 거잖아요? 그럼 공범이라고 볼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렇죠.”
유리아의 의견에 크룩스는 순순히 동의했다. 그러면서 장로들의 죽음을 계기로 감정이 폭발한 피해자들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같이 설명했다.
설득당한 유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려운 표정이었다.
“그보다, 자이안 님은 괜찮을까요?”
우려 섞인 질문을 꺼낸 것은 소아레스였다. 사실 그쪽 상황은 완전히 머릿속에서 빠져 있던 크룩스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대신 백패의 기능 개선에 몰두하고 있는 아르스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그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프레이가 붙어있는데도 아무 연락이 없다는 건 문제없다는 뜻이니까아.”
프레이의 이름은 그 자체로 강력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소아레스는 금세 납득하고는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애초에, 목숨으로 죄를 갚을 거라고 했는데 여러분들 죽을 수는 있는 건가요? 불멸자가 됐다고 했잖아요?”
“글쎄. 불멸자라고는 해도 되다 만 반쪽짜리니까 방법이 있지 않을까?”
“우리는 몰라. 하지만 너희들은 어떻게든 할 수 있는 거 아냐?”
맹목의 말은 질문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거의 확정적이었다. 날카로운 통찰력에 크룩스는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실제로 당장에라도 그들을 죽일 수 있는 수단을 최소 세 가지 이상 떠올릴 수 있었다.
상위 마물 중에는 마치 유령이나 안개처럼 실체가 없는 것들도 간혹 있었으니까. 실체가 없는 존재에 간섭해 물리적으로 후려치는 것은 크룩스의 특기 중 하나였다.
‘문제는 장로들을 죽일 수 있는 수단이 아니라……,’
예를 들어보자. 아주 큰 죄를 지은 죄인이, 이를 처벌할 방법이 사형밖에 없을 때, 그를 죽이는 건 거리낄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만약 그 죄인이 진심으로 자신의 죽음을 바라고 있다면? 사형이라는 형벌이 죄를 심판하기 위해 올바르게 작동한다고 봐야 할까?
“좋아요. 알겠습니다.”
결론을 내린 크룩스가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우린 당신들을 죽이지 않을 겁니다. 자살하고 싶으면 딴 데 가서 알아서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