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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제2국면(4) (88/210)


88화 제2국면(4)
2022.12.30.


하늘이 우중충하게 흐린 날 아침이었다. 잠시 보석탑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자리를 뜬 프레이가 수 분 뒤 날아 돌아왔다. 어딘가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누가 원로 교수들이 구속을 풀고 먹을 걸 준비해놨더라. 정교수들이 몰래 준비한 건가? 어차피 목줄은 그대로니까 큰 의미는 없을 텐데.”

헤이젤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다른 원로 교수 역시 심장에 쌓은 마력의 영향으로 인간의 수명을 초월한 세월을 살아온 이들이었다.

나이가 많은 이는 120살이 넘을 정도였다. 목줄이 마력의 흐름을 완전히 막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이가 많은 이들부터 억제된 노화의 반동으로 천천히 죽어갈 것이다.

프레이로서는 별로 따라 하고 싶지 않지만, 마력을 심장에 집중적으로 쌓아 노화를 연장한다는 건 참신한 발상이었다. 당연하지만 MP를 가지고 그런 짓을 하면 어지간히 강한 각성자가 아니고서야 급성 MP 중독으로 죽는다.

MP에 비하면 독성이 거의 없다시피 한 마력이니까 가능한 방식이었다.

“그거 말고 다른 건 없고요?”

“없긴 한데…… 굳이 꼽자면 마법사들이 너무 기분 나쁘게 얌전하다는 거? 이런 상황이면 권력 욕심이 강한 정교수들이 뭉쳐서 쿠데타를 일으키거나 해도 이상할 거 없는데 말이지.”

불길한 소리를 하면서도 정작 프레이는 즐거운 표정이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면 자이안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인간쓰레기들을 청소할 수 있으니, 그에게는 마냥 나쁜 상황이 아닌 것이다.

“전장은 어떠냐?”

“어제하고 비슷해요.”

“그리고 어제는 그제랑 비슷했고, 그제는 엊그제랑 비슷했지. 변한 게 없다는 소리구만. 종교쟁이들은 지겨움이라는 감정을 모르나?”

프레이도 법왕국에게 전쟁을 멈출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래도 며칠째 우직하게 똑같은 수단만 반복하는 모습을 보면 불평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반면 자이안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몇 번이고 각오했지만, 그래도 전장의 참혹한 현실은 자이안의 정신을 조금씩 좀먹고 있었다. 지금은 그런 사소한 불평에 반응을 보일 여유가 없었다.

“……자이안. 오늘 하루 쉬는 건 어떠냐?”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삼촌?”

자이안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프레이는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피식 웃었다.

자이안은 어지간한 조언에는 군말 없이 따르는 착한 아이였다. 반면 나이아는 달랐다. 뭐만 하면 사사건건 불만을 드러내고, 그거 말고 이런 건 어떠냐면서 꿋꿋하게 제 주장을 세웠다.

지금 자이안의 모습과 과거 나이아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그리움을 불러왔다.

“며칠 전에 한 말을 똑같이 해줘야겠구만. 자이안, 내 앞에서 강한 척하지 마라.”

“……하지만, 저는. 제가 아니면…….”

더듬더듬 말하던 자이안이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깔았다. 거체에 어울리지 않게 조용히 다가온 케이가 그의 옆에 슬쩍 머리를 내밀었다.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케이의 비늘에 힘없이 몸을 기댔다.

“한동안은 나와 케이가 같이 나갈 테니, 너는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 알겠냐? 아무것도, 다. 이상한 생각, 특히 전쟁에 대한 생각도 하지 말란 소리다.”

자이안은 오래 망설였다. 그리고 결국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로 꺾이고,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 마음이 적잖이 몰려 있는 상태라는 것도 자각하고 있었다.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마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기 전에 휴식을 취하는 건 사람으로서 당연한 거다. 쉬지도 않고 일해도 괜찮은 건 기계거나, 아니면 마음이 없는 다른 무언가뿐이지. 네가 바라는 이상적인 자신이 그 기계 같은 무언가라면 말리진 않겠다만.”

자이안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요, 삼촌. 그러면 조금만…… 말씀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쉴게요. 저 대신 부탁드려요.”

그리고 프레이의 충고대로 얌전히 쉬기로 했다.

* * *

그로부터 정확히 3일.

‘삼촌은 잘하고 계실까? 홧김에 너무 강한 마법을 쓰거나 하지는 않겠지? 유리아 쪽은 어떨까. 한 번 연락을 해볼까. 아, 하지만 그제도 한 번 연락했는데. 너무 자주 연락을 하면 오히려 걱정하겠지?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다고 했으니까, 믿고 기다리는 게 최선일 거야. 하지만 만약 내가 모르는 동안 안 좋은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자이안의 머릿속은 오만가지 잡생각으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이상한 생각도 하지 말고 쉬라는 말 자체가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원래 사람은 몸이 편해지면 쓸데없이 머리가 일하기 시작하는 동물이다.

물론 프레이라고 정말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라는 뜻에서 한 말은 아니었으리라. 오히려 그 반대, 몸을 푹 쉬면서 천천히 생각을 정리해 보라는 의도였을 것이다.

‘……삼촌 말씀이 맞는 것 같아. 내가 너무 강박적으로 내 힘으로만 모든 걸 해결하려고 했어. 이전에도 여러 번 비슷한 말씀을 하셨지.’

지금까지 각성자나 유리아, 그 외 여러 사람들과 힘을 합쳐 무언가를 이룬 적은 많았지만, 아예 남에게 모든 걸 맡기고 혼자 쉬어 본 적은 없었다.

엄밀히 따지면 아예 없지는 않아도 기억에도 남지 않을 만큼 사소한 일들뿐이었을 터. 자이안에게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동시에, 프레이가 강제로라도 자신을 쉬게 만든 의도를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반대로, 너무 자주 남에게 의지하기만 하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태한 사람으로 타락하기 쉽다. 중요한 건 균형을 지키는 것이다.

자이안은 그동안 스스로가 타락하는 게 두려워 강박적으로 자신을 강하게 채찍질했다. 알레프 가에 살았을 적,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다. 기억은 많이 흐려졌지만 그때 새겨진 상처는 아직도 깊은 곳에 흉터로 숨어 있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됐다. 공화국에서는 유리아의 발 빠른 대처 덕분에 눈앞에서 사람을 죽는 광경을 거의 보지 못했고, 제국에서는 MP 과포화의 영향으로 다른 사람이 된 것 마냥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마족이라는 ‘알기 쉬운 악’이 아닌, 사람이 만들어내는 순수한 광기와 악의가 휘몰아치는 전쟁을 바로 가까이서 지켜보며 결국 한계에 달했다.

‘삼촌이나 유리아, 다른 분들은 내가 강한 마음을 가졌다고 했지만…… 사실 난 약해. 그건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알아.’

쉽게 상처받는 약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신념을 굳건히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분명 타인의 도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일도 중요할 것이다. 자이안은 가슴에 손을 얹으며 다짐을 하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자이안 본인에게는 자각이 없었다. 바로 그렇게 다짐하는 그 마음이, 주위에서 그를 평가하는 것처럼 눈부시게 강하다는 사실을.

“이런 곳에서 느긋하게 쉬고 있다니. 팔자 한 번 좋네.”

갑자기 어느 방향에서랄 것도 없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핏 들어서는 어디서 들리는 것인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소리. 그러나 자이안은 헤매지 않고 허공의 어느 한 점을 똑바로 응시했다.

바람의 흐름이 부자연스럽게 한 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드디어 말을 걸어주셨군요.”

“그 말은, 꼭 내가 널 지켜보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걸.”

“알고 있어요. 일주일 정도 전부터 가끔씩 나타나 먼 곳에서 저를 지켜보셨다는 걸. 저는 다른 건 몰라도 코는 좋은 편이거든요.”

자이안이 장난스럽게 코를 두드리자, 잠깐 동안 침묵이 찾아왔다. 조금 뒤, 갑자기 그의 주위에 거센 돌풍이 휘몰아쳤다.

자이안은 시선을 정면에 향하며 그, 혹은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렸다.

그것은 바람 그 자체였다. 색을 입히고 겉모습을 가지게 된 바람이었다. 본래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의 흐름이 흙이나 자갈, 나뭇잎 따위를 휘감아 올리며 사람과 거의 흡사한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성별은…… 아마도 여성인 것 같았다. 확신하기는 어려웠지만, 바람이 만들어내는 겉모습에 여성스러운 굴곡이 얼핏 보였다.

“그게 당신의 본래 모습인가요?”

“……네 코는 그런 것까지 알 수 있는 거야?”

“삼촌이나 유리아처럼 눈으로 보는 것만큼 완벽하지는 않아도, 냄새를 통해 상대의 본질 같은 걸 어렴풋하게 파악할 수는 있어요. 당신처럼 MP…… 으음, 마나라고 말하는 게 이해하기 편할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당신처럼 마나를 가진 존재라면 냄새를 구분하기는 훨씬 쉽고요.”

“하하. 대단하네. 정말 대단해. 나는 이 힘에 익숙해지기 위해 필멸자로 살았을 적 평생을 바쳐야 했는데, 너는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간파하는구나.”

자조적으로 비꼬는 말투였으나, 신기하게도 적의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냄새도 그랬고 자이안 자기 경험을 토대로 판단한 결과도 그랬다. 그러나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당신이, 보석탑의 마법사들이 말했던 네 장로 중 한 명인가요?”

그녀의 정체를 생각하면, 그녀가 자이안을 적대하는 것이 당연한데 말이다.

“맞아. 다른 사람들한테는 보통 질풍의 마도사라고 불렸어. 이름은…… 그냥 질풍이라고 불러.”

“이름을 잊어버린 건가요?”

“버렸어. 필멸의 굴레를 벗어던진 날에. 이름에 자신의 존재를 속박하는 게 불필요하게 느껴졌거든. 지금의 나는, 뭐, 보면 알다시피 자연현상 그 자체니까.”

그녀의 모습은 흡사 오랜 전설로 전해지는 자연의 화신, 정령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어쩌면 그녀가 지금의 모습을 하게 된 것이 바로 그 정령 전설을 참고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왜 이제야 말을 거신 건가요? 말을 걸 거면 더 일찍 걸어도 상관없었는데요.”

“어? 아니 그건…… 그야…… 뭐.”

그녀는 대답을 얼버무리며 곤혹스러운 듯 뺨을 긁었다. 실체가 없는 상태임에도 그 동작은 진짜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스스로를 필멸의 굴레를 벗어던졌다고 표현하면서도, 그녀는 사소한 몸짓이나 말투 하나하나에 인간적인 부분이 엿보였다.

“이거 아무래도 인선을 실수했다. 내가 아니라 맹목이나 중압이 여기에 있었어야 했는데.”

“대답하기 곤란하면 안 해도 돼요. 어차피 당신이 저하고 친구가 되고 싶어서 찾아온 건 아니잖아요?”

“……아니, 그냥 대답할게. 솔직히 지금 나도 좀 망설이고 있고. 별 이유 아냐. 그냥 그동안 네가 너무 바쁘고 힘들어 보여서, 괜히 내가 나타나면 더 심란해질까 봐 그런 거야.”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자이안은 황망히 질풍을 바라보았다. 싸울 생각이 없어 보이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설마 이렇게 대놓고 걱정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바꿔 생각하면 얼마 전까지의 자신이 적대하고 있는 상대까지 걱정하게 만들 만큼 심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금은 많이 괜찮아진 것 같아서, 제대로 된 대화가 통할 것 같아서 말을 걸었어.”

“……솔직히 지금 좀 당황스럽네요. 저, 대체 뭐 때문에 절 찾아오신 거예요?”

“이것저것 있지만, 우선은 사과 먼저 하러.”

질풍이 깊게 허리를 숙였다.

“제자들을 대신해 사과할게. 그 아이들이 죄 없는 사람들에게 몹쓸 짓을 저지르고 말았어. 미안해.”

“…….”

그 순간 자이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당신들…… 처음부터 알고 있었군요.”

자이안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추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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