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제2국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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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제2국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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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제2국면(3)
2022.12.29.
“흐음. 왜 그렇게 생각해요?”
크룩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유리아를 비웃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느 의미로는 그녀의 심정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건…… 그야, 저도 자이안하고 같이 여행하면서 그 애를 도와주려고, 옆에서 같이 지탱해주려고 많이 노력했는데, 그게 제대로 결실을 맺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부담을 덜어주려고 나서도, 결국 마지막에는 반대로 자이안에게 도움을 받게 되고.”
가장 최근, 보석탑에서 홀로 행동하며 인체 실험의 피해자들을 구할 때가 특히 그랬다. 어찌어찌 절반 정도의 사람들을 구출했으나 마지막에 가서 졸트에게 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신이 내린 것 같은 타이밍에 자이안이 나타났기에 망정이지, 만약 자이안의 등장이 하루 이틀만 늦었더라면 어찌 됐을지.
“자이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실제로도 유리아가 나서서 피해자들을 구출해준 덕분에 자이안은 마음 놓고 미궁을 공략할 수 있었어요. 유리아는 졸트 교수에게 덜미를 잡혔다고 했지만, 반대로 유리아가 졸트 교수를 상대로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피해를 억제할 수 있었다고 할 수도 있죠.”
크룩스의 말에도 유리아는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애초에 남이 옆에서 말해준다고 어떻게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었다.
그 ‘남’이 자이안이면 또 모를까.
“그래도 자이안은 유리아를 엄청 아끼는 것 같던데요? 아마 우리 중에서 제일 아끼지 않을까 싶은데.”
“……자이안은 착하니까, 제가 좌절하지 않도록 배려해주는 게 아닐까요? 사실은 제게 실망하고 있다거나…….”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자이안이 사실은 유리아를 별 도움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당신을 배려하느라 그걸 감추고 있다고? 자이안이 그렇게 요령 좋게 선의의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요?”
도저히 반박 불가능한 설득력에 유리아는 황망히 입을 다물었다. 문득 크룩스는 이런 상황 자체가 조금 우스워졌다. 이런 건 그냥 당사자 둘이서 조금만 얘기를 나누면 금방 해결될 문제다.
자이안이고 유리아고 서로를 아끼며 솔직하게 대하는 건 똑같으니까.
“자이안이 절 제일 아낀다고요?”
“적어도 제가 보기엔 그래요.”
“그건, 그…… 동료로서, 라는 의미일까요? 그게 아니면…… 뭐냐, 그게…… 남자 대 여자로서, 라든가?”
“……?”
갑자기 뜬금없는 각도로 튀어버린 화제에 크룩스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이상하다. 지금 연애 상담 중이었나? 방금 전까지 자신감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 같은데?
“유리아, 혹시 자이안 좋아해요? 동료로서가 아니라, 이성으로서.”
“네?! ……어, 글쎄요?”
질문을 들은 유리아는 깜짝 놀랐지만, 정작 그 직후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럼 방금 그 질문은 왜 꺼낸 거예요?”
“그거야 그냥, 가장 아낀다는 소릴 들으니까 갑자기 생각이 나서요. 헤헤.”
헤실헤실 웃는 표정을 보니 자기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얼버무리는 게 아니라 진짜로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성……? 이성은 아닌 것 같고. 아, 물론 좋아하긴 해요. 근데 음…… 남동생? 가족? 그런 느낌? 사실 잘 모르겠어요.”
횡설수설하며 대답하던 유리아가 결국 포기하는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제가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아요.”
결국 화제가 어영부영 마무리되었다. 유리아는 정말로 별생각 없는 모양이었지만, 오히려 크룩스는 점점 둘의 관계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원래 남의 연애사가 가장 재미있는 법이다.
‘어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크룩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잡념을 털었다. 지금처럼 바쁜 시기에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나중에 보석탑과 법왕국에 관련된 소동이 모두 마무리된 다음에 다시 천천히 생각해 봐도 될 것 같았다.
“아직도 마음이 심란하면…… 몸을 좀 움직여볼래요?”
“……네헤?”
도저히 맥락을 찾을 수 없는 뜬금없는 소리에 유리아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단련은 정신을 집중하고 잡념을 지울 수 있는 효율적인 수단이죠. 단순히 몸을 강하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도 도움이 돼요. 유리아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나요? 자이안과 만난 뒤로 꽤 오래 단련을 했잖아요?”
“어어…… 그…… 그럼…… 그럴까요?”
엉겁결에 설득에 넘어간 유리아가 주섬주섬 단검을 꺼냈다. 실전용이 아니라 훈련용으로 쓰는, 날이 없는 단검이었다. 그녀가 자세를 잡자 크룩스도 자연스럽게 자세를 잡았다.
유리아와 비슷한, 그러나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완성도 높은 자세였다. 느슨하게 벌린 두 손은 아무것도 쥐지 않았음에도 유리아는 그가 날카로운 단검을 쥐고 있다는 착각을 느꼈다.
“전에 제가 마법사들의 마법을 맞아도 상처 하나 안 나는 걸 봤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한 번 공격해 봐요. 유리아가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공격을.”
유리아는 잠시 망설였으나, 프레이의 초월적인 힘을 되새기고는 마음을 굳혔다. 크룩스 또한 프레이와 동격으로 여겨지는 강력한 영웅이다. 자신이 온 힘을 다해 공격한다 해도 생채기도 내지 못하리라.
“그, 그럼…… 갈게요!”
일순간, 유리아의 두 눈이 보랏빛으로 불타올랐다. 크룩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신속한 움직임으로 단검을 역수로 고쳐 쥔 유리아가 가차 없이 팔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강렬한 진동에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보이지 않는 충격파가 크룩스에게 쇄도했다.
“호오.”
그 순간 크룩스가 움직였다. 유리아와 똑같은 자세에, 똑같은 움직임. 궤도, 위력, 범위 모든 게 똑같은 진동의 충격파가 유리아의 것과 부딪쳤다. 쌍방의 충격파가 그대로 무산되어 흩어졌다.
“……우와.”
멍하니 입을 벌린 유리아가 탄성을 터뜨렸다. 마안이 열린 지금 보니, 크룩스는 빈손이 아니라 MP로 만들어진 무형의 단검을 쥐고 있었다. 그 단검으로 유리아와 완전히 똑같은 기술을 구사해 1:1로 정확하게 상쇄시킨 것이다.
“이거 누구한테 배운 거예요?”
“그, 그게…… 저 혼자 만든 기술이에요. 호, 혹시 뭔가 잘못됐나요?”
“……네?”
이번에는 크룩스가 멍한 표정을 할 차례였다.
“혼자 만들었다고요? 이거 엄청 복잡한 기술인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크룩스는 그녀의 눈을 마주 보고는 그제야 납득했다.
온갖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그녀의 마안은, 비록 지금은 성장 과정에 있지만 본인의 노력에 따라서는 프레이의 힘의 마안과도 견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졌다.
그 힘을 이용했다면 혼자서 이런 복잡한 기술을 만드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다.
“맙소사…… 이걸 왜 지금까지 안 보여줬어요?”
물론 어디까지나 불가능하지 않다는 소리지, 쉽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여, 역시 이상한가요?”
“이상하죠! 이런 재능을 썩히고 있었다니! 프레이 형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히엑.”
그답지 않게 언성을 높이는 크룩스의 모습에 유리아는 깜짝 놀라 비명을 삼켰다. 2미터에 달하는 근육질 거구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모습은 솔직히 공포 그 자체였다.
“어휴.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네요. 유리아는 그러고 보니 강해지는 게 목표였죠? 방랑기사가 모험하는 소설을 동경해서?”
“옛날에는 그랬죠.”
“음? 그럼 지금은 다른가요?”
“지금은…… 자이안 옆에 서서 자이안이 힘들어할 때 지탱해주고 싶어요. 그러려면 옆에 나란히 설 수 있을 정도로는 강해야 되잖아요?”
크룩스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감싸 쥘 뻔했다. 자이안이고 유리아고, 왜 이렇게 이 아이들은 마음이 예쁜 걸까.
“하하. 덕분에 의욕이 솟았어요. 좋아요! 유리아, 오늘부터 제가 유리아를 가르쳐줄게요.”
뜻밖의 말에 유리아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곧 불안해하며 표정을 흐렸다.
“크룩스 오빠는 자이안도 가르쳐줘야 하잖아요.”
“자이안은 이제 가르칠 거 없어요.”
심드렁한 대답에 유리아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재능이 넘치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더라고요. 물론 자이안이 지금의 경지에 도달하는 데 재능이 그렇게까지 큰 영향을 미쳤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겠지만…… 자이안은 좀, 으음, 가르치는 맛이 없진 않아요.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는 하나하나 알려줄 때마다 빠르게 흡수해 나가는 게 굉장히 보람이 있거든요. 근데 일단 기초가 완성되고 나면, 거기서부터 자이안의 진짜 능력이 빛을 발해요.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하면서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서, 자기 힘으로 다음 계단을 찾아가는 거죠. 그래서 점점 가르칠 게 없어지더라고요.”
엄청난 찬사였으나 정작 크룩스의 표정은 불만스러웠다.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제자가 너무 순식간에 졸업해버려서 맥 빠지는 심정인 것이다.
특히 그게 정점에 달한 건 미궁에서였다. 그때를 기점으로, 자이안은 적어도 기술적으로는 남이 더 가르쳐줄 여지가 없는 영역에 발을 디뎠다. 남은 것은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뿐.
“그런 의미에서 지금 유리아의 자질을 발견한 건 어떻게 보면 천운이라 할 수 있겠네요. 걱정 마세요, 유리아.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걸 유리아에게 맞는 방식으로 빠짐없이 가르쳐줄게요.”
“사, 살살 부탁드려요.”
“하하.”
크룩스가 가볍게 웃었다.
“유리아. 근육은 살살 단련해서는 성장하지 않아요.”
“…….”
유리아는 문득 자이안의 가혹한 훈련에 밤낮없이 혹사당하던 옛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 * *
네 마법사는 최상층에서 내려와 가장 먼저 원로 교수들에게 향했다. 온몸이 결박된 채 대체 얼마나 오래 방치된 것인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급히 결박을 풀어줬으나, 목에 묶인 기묘한 생김새의 목줄만은 도저히 풀지 못했다.
“이건…… 신화시대의 유물이야.”
그들이 말하는 ‘신화시대’라는 건 선주 인류 시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처음 미궁을 발견하고, 미궁의 주인과 은밀한 교류를 시작하면서 그들은 단편적으로나마 선주 인류 시대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미궁의 주인은 몹시 감정적이고 변덕이 심해, 어떤 때에는 아무리 물어도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더니 어떤 때에는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먼저 말을 꺼내고는 했다.
살아 있는 용이 하늘을 누비고, 차원의 문을 열어 우주의 힘을 마음대로 끌어다 쓰는 선주 인류가 세계를 지배했던 시대.
신화시대에 대한 네 마법사의 공통된 인상이었다. 아르스의 아티팩트는 그들 기준에서 우주의 힘, 즉 MP를 사용하는 것이니 그들의 생각이 완전 근거 없는 착각은 아니었다.
“미궁의 주인이 이런 짓을 한 건가?”
중압이 의문을 표했다. 질풍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키며 애써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미궁의 주인이 지상으로 올라온 흔적도 없고, 애초에 그가 지상에 모습을 드러냈다면 그 시점에 내가 깨어났을 거야.”
“그럼 미궁의 주인의 동족이 왔다는 소린가?”
업화의 말은 일견 타당하게 들렸다. 그러나 맹목은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들의 종족은 멸망했잖아.”
“그럼 이건 뭐야?”
“그들의 동족은 아니지만, 우리가 알지는 못하는 다른 존재?”
맹목도 이번에는 정확히 간파하지 못했다. 미궁의 주인, 즉 시기에게 들은 정보는 너무 단편적이고 뒤죽박죽인 데다 서로 모순되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이를 기반으로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잠깐만. 졸트가 없어.”
“헤이젤도 없군.”
졸트는 질풍의, 헤이젤은 중압의 제자였다. 중압이 자세를 낮추더니 바닥에 몸을 바짝 가져다 댔다. 땅의 기억을 읽은 그가 다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헤이젤은…… 죽었다.”
“주, 죽었다고? 그럼 졸트는? 설마 졸트도……?”
“아니. 졸트의 죽음은 대지가 기억하고 있지 않아. 이방인과 함께 제 발로 탑을 나갔다.”
질풍은 적잖이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으나, 곧 그의 말에 흘려들을 수 없는 단어가 섞여 있음을 깨달았다. 그 순간 구속에서 풀려난 원로 교수 중 일부가 신음 소리를 내며 힘겹게 눈을 뜨기 시작했다. 질풍이 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이봐, 괜찮아? 정신 좀 차려봐!”
“으……으윽. 자, 장로님……?”
몽롱한 눈으로 질풍을 바라보며 원로 교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질풍은 그의 몸을 부드러운 바람으로 감싸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상반신을 벽에 기댄 그가 힘없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곧 그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이런…… 이런 맙소사. 장로님들께서 돌아오셨군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니, 일단 이 물 좀 마셔. 그리고 대충이라도 좋으니까 설명 좀 해줘. 우리가 잠든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미궁이 무너지고 탑도 엉망이 된 건지.”
공기 중의 수분을 모아 만든 물방울을 조심스럽게 마신 뒤 원로 교수는 띄엄띄엄 설명을 시작했다. 아직 제정신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탓인지, 그 설명은 자기 변론이나 교묘한 합리화가 섞이지 않은 지극히 객관적인 것이었다.
“……일어나야 할 일이 결국 일어났군.”
중압이 무겁게 말했다. 다른 셋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제자들이 오래전부터 비인도적인 행위에 손대기 시작했음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방치한 것이다.
사실은 막아야 했지만, 그래도 아끼는 제자들이니까. 거기다 필멸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불멸자의 영역에 어설프게 발을 들이고 만 그들은 그런 ‘인간적인’ 감정에 휩쓸리기 어려운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게 인간적인 기준으로는 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결국 끝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구나, 하고 얌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지.”
잠깐 깨어났던 원로 교수가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질풍은 천천히 일어서며 복잡한 감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이안이라는 아이를 만나러 가자. 사과할 건 사과하고, 받을 건 받아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