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제2국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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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제2국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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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제2국면(2)
2022.12.28.
당연하지만, 성녀들을 쓸 수 없게 되었다고 전쟁이 멈추는 것은 아니었다. 열세를 거듭하면서도 법왕국은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마법사 진영 측에서 탈영병이 발생했다.
“애초에 저희들은 병사가 아니라 마법사이고, 연구자일 뿐이지요. 그저 마법이라는 압도적인 힘이 있었기 때문에 외적을 쉽게 막아낼 수 있었을 뿐입니다.”
자이안으로서는 차라리 다행스러웠다. 탈영한 이들은 확실히 목숨을 구할 수 있을 테고, 소수의 탈영 정도로 전력 차이가 뒤집히는 것은 아니니까.
일반적인 군대였다면 사기 저하를 우려해 엄중하게 처벌했겠지만, 마법사들은 사기 따위와는 연관이 없는 집단이었다.
“바꿔 생각하면, 그렇게나 사기가 개판인데도 탈영병이 이 정도뿐인 게 신기하구만.”
“저들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전장에서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싸운다면, 보석탑에서 떠나 자유롭게 살게 해주겠다고.”
연수생까지는 자의로 보석탑을 떠나는 것이 가능하지만, 조교 이상의 직위를 받고 정식으로 탑의 일원이 되면 마음대로 탑을 떠날 수도 없다.
보석탑만이 독점하고 있는 마법의 비의가 외부에 유출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원로 교수들은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도 실제로는 자기 파벌의 마법사들의 명단을 철저하게 관리한다.
누군가 탑을 탈주하는 사건이 일어나면 즉시 추적하여 다시 회유하거나, 그게 불가능하다면 은밀하게 죽인다.
“물론 제 발로 탑을 떠나고 싶어 하는 마법사들은 많지 않지만…… 저들은 그 소수의 예외인 셈입니다. 탑의 방침이나 수단이 마음에 들지 않아 겉돌다가 결국 외곽으로 좌천된 이들이니.”
사실 졸트가 내건 조건은 엄밀히는 기만이었다. 어차피 보석탑은 원로회가 완전히 제압된 지금 체제 자체가 완전히 붕괴한 상태다. 설령 마법사들이 도중에 탈영해도 아무도 그들을 쫓지 않을 것이다.
“하여간 나쁜 잔머리 하난 수준급이구만. 하긴, 뭐…… 병력이 필요하긴 하니, 그렇게라도 잡아둘 수밖에 없지만.”
졸트의 설명을 들은 프레이는 코웃음을 치면서도 그 필요성은 인정했다. 그러나 자이안은 아무래도 아쉬웠다. 이대로 마법사들을 완전히 후퇴시키고 자신만 남아서 법왕국 측 병력을 상대하는 게 낫지 않을까?
“글쎄요…… 제가 법왕국 측 지휘관이라면 어떻게든 자이안 님을 한 자리에 묶어두고 우회해서 보석탑으로 진군할 것 같습니다만.”
“……어렵네요.”
“그거야 당연하지. 괜히 전략, 전술에 대한 병법서가 수천 년간 누적되며 꾸준히 연구, 개선되는 게 아니다.”
다행히 성녀의 힘을 무력화시킨 날 이래로 사상자의 수는 꾸준히 줄어들고 있었다.
전황이 격해지는 기미를 보일 때마다 때로는 케이의 권능으로, 때로는 프레이의 마법으로, 그리고 때로는 자이안이 변장한 채 직접 전장에 뛰어들어 개입한 덕분이었다.
특히 지진과 폭우, 지형 변이 등 온갖 방해에 시달린 법왕국 측은 명백하게 사기가 축 처져 있었다. 신앙 탓인지 엄격한 규율 탓인지 탈영병은 없지만, 평범한 군대라면 오래전에 지휘체계 자체가 와해되었을 것이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서 양측을 피폐하게 만들면 조만간 자연스럽게 정전 협상 자리가 만들어질지도 몰랐다.
“다소 낙관적인 관측이 아닐까요, 자이안 님?”
그러나 졸트는 자이안의 생각에 부정적이었다. 프레이 역시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비슷한 의견인 것이 표정에 드러났다.
“망설임 없이 자국민을 납치해 세뇌하고, 일회용 폭탄으로 소모하는 나라입니다. 그게 옳은지 그른지는 둘째치고서라도, 그렇게까지 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 몰린 것은 확실합니다. 저들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겁니다. 저들이 떠받는 태양신이 직접 강림해 전쟁을 멈추라고 명령이라도 내리지 않는 한은.”
그 말에 자이안은 문득 지금은 따로 행동하고 있는 일행을 떠올렸다.
지금 각성자들은 네 명 모두 소환되어 있는 상태였다. 프레이는 자이안과 함께 전쟁의 확산을 막고 있고, 남은 셋은 퀴나스에게 붙어있었다. 그녀를 하루라도 빨리 ‘진정한 성녀’로 완성시키고자 준비를 돕는 것이다.
‘지금은 퀴나스를 기다릴 수밖에 없구나.’
전쟁을 멈추기 위해 모두가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신도 묵묵히 역할을 다할 뿐이었다.
* * *
“백마법을 쓸 때 가장 중요한 건 환자에 대한 이해, 그리고 교감이야. 천천히, 아주 조금씩 MP를 불어넣고 환자에게 알맞은 MP의 패턴을 파악하는 거야. 패턴을 파악했으면 한 번 MP를 거둔 다음, 이번에는 그 패턴에 맞춰서 다시 MP를 불어넣어 봐. 그러면 환자가 어디가 아픈 건지, 어디를 어떤 식으로 치유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거야.”
퀴나스는 땀을 뻘뻘 흘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유민은 쉽게 말하고 있었지만 정작 따라 해 보니 상상 이상으로 어려웠다.
비유하자면 어느 날 갑자기 돋아난, 제대로 움직이는 법조차 모르는 제3의 팔을 가지고 온갖 복잡한 문양을 정확히 그려내라는 것이었다.
“읏…… 되, 된 것…… 같아요……!”
그녀가 힘을 쏟고 있는 상대는 두 다리가 묶인 산토끼였다. 목덜미에 아주 작은 생채기를 입었을 뿐. 5분을 넘게 끙끙댄 끝에 마침내 그녀가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힘겹게 말했다.
미약한 흰 빛이 토끼의 몸을 감쌌다. 잠시 뒤 작은 생채기가 흔적도 없이 아물었다.
“잘했어! 와, 한 번에 성공하다니! 진짜 엄청난 거야!”
유민이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그러나 정작 땀을 닦고 있는 퀴나스는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정말 자기에게 재능이 있는 걸까? 이런 작은 동물 하나 치유하는 데에도 이렇게 오래 걸리는데?
“당연하지! 원래 사람보다는 다른 동물을 치료하는 게 훨씬 더 힘들어. 신체 구조가 완전히 다르니까! 특히 몸집이 크게 차이가 나면 더 그래. 처음 해 보는 건데 5분 만에 해낸 거면 대단한 게 맞아.”
“네? 아니 그럼…… 저, 절 속인 거예요?”
“속이다니? 그냥 말을 안 한 것뿐인데?”
원망스럽게 유민을 노려보다가, 퀴나스는 어깨에 힘을 빼고는 허탈하게 웃었다. 골탕을 먹은 기분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덕분에 자신감이 좀 붙었다.
총 150명에 달하는 인원을 이끌고 평원을 가로지르기를 일주일. 마침내 페시스의 마을에 도착한 일행은 마을 옆에 야영지를 만들고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페시스는 그들 모두를 마을에 들이고 싶어 했지만, 아무래도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크룩스와 얘기를 나눈 그는 대신 야영에 필요한 물품을 모두 자신의 재산에서 지원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보잘것없는 상인의 자식이라더니…… 이것 참, 엄청난 겸손이었네요.”
카펜트리 가문은 보석탑의 영토 곳곳에 분점을 내고 물류를 관리하는 명망 높은 상인 집안이었다.
외부인에게는 생소하지만 적어도 영토 내에서는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이며, 수년 전 가주의 셋째 아들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사람들이 크게 술렁이기도 했다.
바로 그 실종된 셋째 아들이 페시스 카펜트리인 것이다.
“보석탑의 마법사들은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저런 사람을 납치했다가는 분명 여파가 상당했을 텐데요.”
“그냥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닐까? 탑에 틀어박혀서 바깥세상과는 담쌓고 살았던 거지이.”
그럴듯한 의견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석탑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미궁 자원을 독점해왔기 때문. 전제가 무너진 지금 보석탑은 주위 마을에 아무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영토 전역의 마을에 마법사들이 그동안 저지른 모든 죄를 낱낱이 알릴 겁니다.”
그리고 페시스는 카펜트리 가문의 유통망을 이용해 마법사들에게 철저하게 복수할 생각이었다.
“자이안 님께서 어느 정도 벌을 주셨지만…… 그분께는 정말 죄송합니다만, 저는 그 정도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저와 같은 처지의 피해자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유통을 틀어막고 그들을 완전히 고립시켜, 피폐해진 끝에 탑 밖으로 나앉게 만든 다음 반드시 제 손으로 죽일 겁니다.”
“당신 뜻대로 하세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잠시 속내를 가늠해 본 끝에, 크룩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이안이 마법사들을 제압한 건 처벌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들이 더 이상 허튼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거였어요. 죄의 심판은 피해자들이 해야 한다는 게 자이안의 입장이에요. 그러니 당신이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요.”
만약 그가 증오에 사로잡힌 채 복수에 미쳐버린 상태였다면 크룩스는 그가 마음을 돌릴 수 있도록 설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페시스는, 비록 불같은 분노를 품고 있음에도 한편으로는 더없이 냉정한 이성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것을 내던지고 복수에 매달리는 게 아니다. 복수라는 수단으로 과거를 청산하려는 것이다.
“다른 피해자분들은 당신이 설득해주세요. 복수를 하는 건 좋지만 광적으로 복수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고. 그건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에 불과하다고.”
“물론이지요. 이미 피해자분들과는 여러 번 얘기를 나눴습니다. 대부분은 제 결정에 따르겠다고 말씀해주셨고, 남은 분들도 불만은 다소 있을지언정 거세게 반대하지는 않고 계십니다.”
크룩스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속으로 감탄했다. 영토 전역의 물류를 관리하는 상인의 자식이라더니, 머리 회전만 빠른 게 아니라 민심을 장악하는 솜씨도 훌륭했다.
탑의 피해자들을 모두 구출한 뒤로 알게 모르게 그에게는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페시스가 이 자리에 없었더라면 피해자들을 제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으리라.
“이런 건 여러분께 받은 은혜에 비하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소한 일입니다. 그럼 저는 다시 피해자분들과 얘기를 나누러 가보겠습니다.”
그가 자리를 뜨자 크룩스는 다시 할 일이 없어졌다. 그의 역할은 말하자면 경호원이었다.
아르스와 유민은, 물론 그 둘도 각성자이니만큼 어느 정도 싸울 수는 있지만 애초에 전투가 전문이 아니었다. 반면 크룩스는 상황이 받쳐준다면 프레이와도 대등하게 겨룰 수 있을 정도로 전투에 특화된 각성자였다.
아주 낮은 가능성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프레이가 그를 이쪽에 배치한 것이다.
‘퀴나스 양은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고…… 확실히 대단한 재능인걸.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닌 유민 씨가 자기랑 버금간다고 했을 정도니. 이대로 딱 붙어서 몇 년 꾸준히 가르치면 제2의 성자가 탄생할지도 몰라.’
한가롭게 일행들을 관찰하는 크룩스와 대조적으로 아르스와 유민은 적잖이 바쁜 편이었다.
유민은 퀴나스에게 최대한 많은 백마법을 가르쳐주기 위해, 아르스는 법왕국에 전해지는 ‘성녀’의 설화를 토대로 설화와 똑같은 상황을 연출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구상하고 완성하기 위해.
“오빠도 심심한가 보네요.”
그때 크룩스와 별 다를 바 없는 처지인 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다가왔다. 크룩스가 미소로 맞이하자, 유리아는 슬금슬금 그의 곁에 다가와 섰다. 잠시 유리아의 안색을 살핀 크룩스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막에서 쉬지, 왜 나왔어요?”
“그게…… 그치만…… 모두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저만 쉬는 건 좀 그렇잖아요. 불편해서 못 견디겠더라고요.”
“하하. 누구나 적재적소라는 게 있는 거죠. 할 일이 없을 땐 쉬어도 돼요.”
“하지만…… 그건…….”
몇 번 입술을 열었다 닫으며 망설이던 유리아가 갑자기 힘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크룩스는 미소를 유지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는 왠지 자이안한테 큰 도움을 못 주는 것 같아요.”
유리아가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