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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제2국면(1) (85/210)


85화 제2국면(1)
2022.12.27.


보석탑 최상부. 원로회실보다도 더욱 높은 곳, 원로교수들조차 출입할 수 없는 완전한 금지구역.

바깥에서 보면 거대한 빛의 구체를 떠받치는 원반처럼 보이는 그 공간 안에, 네 명의 마법사가 잠들어 있다.

사실 그들의 모습을 단순히 ‘잠들었다’라고 표현하는 건 어폐가 있다. 그들은 반투명한 유리로 둘러싸인 거대한 캡슐 형태의, 마치 지구의 생명 유지 장치 같은 기묘한 기구 안에 한 명씩 들어가 있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미궁이…….”

네 마법사 중 한 명, 한때 ‘질풍의 마도사’라고 불렸던 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캡슐 안에서 한 번 주변을 둘러본 뒤, 내부 기판을 조작해 뚜껑을 열고 자연스럽게 걸어 나오더니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궁만 그런 게 아니네. 탑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바람을 통해 온갖 정보가 그녀의 귀에 들어왔다. 미궁의 주인이 죽고, 미궁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탑 역시 큰 공격이라도 받은 듯 크게 파손되어 있었다.

그녀의 직계 제자들은…… 살아는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그들은 더 이상 마법사가 아니었다.

“언제까지 퍼져 잘 거야! 당장 일어나지 못해, 이 게으름뱅이들!”

날카로운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바람이 날뛰며 그 소리를 증폭시키고 급기야 남은 세 명이 들어가 있는 캡슐의 표면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남은 세 마법사도 주섬주섬 눈을 떴다.

“이런 젠장. 벌써 때가 왔나? 조금만 더 쉬면 안 돼?”

금이 간 캡슐을 발로 걷어차 부수며 ‘업화의 마도사’가 걸어 나왔다. 뒤이어 캡슐에서 나온 ‘맹목의 마도사’와 ‘중압의 마도사’ 역시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질풍’은 쏟아지려는 한숨을 삼키며 그들을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탑에 문제가 일어난 것 같다. 공들여 세운 탑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정신 차려, 이 멍청이들!”

“……탑의 관리에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기로 했던 것 아니었나?”

‘중압’이 바위를 연상케 하는 둔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비아냥거림이 아니라 순수한 의문에서 비롯된 물음이었다.

수십 년 전.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너무 오랜 시간을 살아온 그들은 정신을 좀먹는 끔찍한 권태에 시달리고 있었다. 탑의 관리도, 미궁의 주인과의 교류도 모두 진절머리가 났다. 때문에 그들은 도피를 택했다.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미궁의 주인은 그들에게 ‘마지막 거래’를 제안했다. 이는 바꿔 말하면 미궁의 주인에게 더 이상 네 마법사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뜻이지만, 그들은 오히려 그 상황을 바랐다.

용의 심장을 적출해 지상으로 가져가 달라는 거래를 받아들이고, 그들은 그 전에 용과 싸워볼 것을 바랐다. 미궁의 주인은 잠시 고민했으나 그들의 바람을 들어주었다.

기적과도 같은 승리였다. 다시 하라고 해도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싸운 그 용이라는 게 천룡이 아니라 성룡에 불과했고, 용에게는 터무니없이 좁은 미궁 내부였기에 많이 유리하기도 했다.

그래도 성룡 역시 생물로서 정점에 오른 강대한 존재다. 그들은 오랜만에 만족하며 지상으로 올라왔고, 제자들에게 용의 심장을 맡긴 뒤 만족감을 안고 잠들었다.

“상황이 변했어. 미궁의 주인이 죽은 것 같다.”

“응? 뭐? 그게 가능한가?”

“글쎄. 자살이라도 한 거 아냐?”

‘맹목’의 말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양 심드렁했다. 그러나 동시에 놀라울 만큼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그런 존재가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할 리는 없지. 타당한 추론이군.”

중압이 팔짱을 끼며 동의했다. 업화는 반대로 그게 뭐 어쨌냐는 표정이었다.

“근데 그게 그렇게 큰 문제야? 기능 중추만 멀쩡하면 상관없잖아?”

“기능 중추도 파괴됐고, 아예 미궁 자체가 붕괴했어. 자연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냐. 누군가가 일부러 미궁을 파괴한 거야!”

질풍은 목소리를 높이며 탑의 사정을 모두에게 전했다. 질풍만큼의 열의는 없었으나, 다른 세 명도 결국 눈을 뜰 때가 되었다는 사실에는 동의했다.

“넌 언제 봐도 뜨겁네. 이거 이름 잘못 정했다니까? 쟤가 업화고 내가 질풍이어야 했어.”

“그런 불평은 우리한테 멋대로 이상한 이름을 붙인 옛날 사람들한테나 가서 해!”

질풍이 등을 돌려 앞장섰다. 그들의 앞에 탑의 아래층과 통하는 전이 마법진이 나타났다. 중압과 맹목, 업화는 저마다 한 번씩 서로를 마주 보고는 쓰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질풍은 언제나 그랬다. 필멸의 굴레를 가장 늦게 벗어던진 탓인지, 넷 중 누구보다도 감정적이고 의욕적이었다. 항상 앞에 나섰고,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든 관심 없어 하는 다른 셋을 고무하며 이끌었다.

“자, 다들 나가자!”

질풍이 먼저 마법진 위에 발을 디뎠다. 남은 셋도 느지막이 위에 올라섰다. 빛이 그들을 뒤덮고, 마침내 이제는 쓸모없어진 기기들이 늘어선 텅 빈 공간만 남았다.

* * *

법왕국 성도. 태양궁 알마르솔은 전장에서 전해진 보고에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이래서는 안 돼. 이래서는 법왕국은, 이 나라는…….”

성녀 양산 계획은 그들 입장에서도 제 살을 깎아내는 심정으로 무리하게 진행한 것이었다. 추기경을 비롯한 다른 고위 사제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법왕 펠하네스 2세는 그랬다.

‘썩어빠진 이 나라가 구시대적인 체제를 벗어던지고 일신할 유일한 기회였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됐지? 신민의 희생을 강요한 것? 신성기사단을 사이한 일에 쓴 것? 무리하게 전쟁을 일으킨 것? 고위 사제들의 부패를 당장 손 쓸 수 없는 일이라며 외면한 것? 성녀님의, 성유물의 이상을 빨리 알아차리지 못한 것? ……전부 다?’

머리를 쥐어뜯던 법왕이 벌떡 책상에서 일어나 이를 악물었다.

‘나는 사제이지만, 동시에 왕이다. 뿌리부터 썩어 문드러진 이 나라가 처음부터 몰락할 운명인 것이라면, 나 역시 함께 무너지리라.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주먹을 틀어쥐며 결의를 내린 그가 문을 박차고 나섰다. 그의 처소를 지키던 기사가 급히 따라나서려 했으나, 말없이 손을 내밀어 제지했다.

그는 그대로 홀로 태양궁의 예배당, 그리고 그보다 더 안쪽 성녀의 처소로 향했다.

“성하! 혼자 오셨습니까?”

“성녀님의 용태는 어떻습니까? 제가 잠시 만나 뵈어도 괜찮을까요?”

“성녀님은…… 더 심해지지는 않고 계십니다. 들어가시지요, 성하.”

성녀의 처소는 법왕의보다도 더욱 엄중한 경비로 지켜지고 있었다. 이는 외부의 위협을 격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안쪽의 위험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함이기도 했다.

성유물이 폭주하고 성녀가 처음 발작을 일으켰을 때, 법왕이 직접 이러한 지시를 내렸다.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군.’

법왕의 직책에 앉았을 때부터 확신 따위는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는 이상을 좇았지만, 현실은 이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성녀님, 두 달 만에 뵙습니다.”

성녀의 처소는 마치 문 바깥과 다른 세상인 것처럼 고요했다. 은은한 빛이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중앙에 안치된 성유물이 뿜어내는 빛이다.

성유물이 서서히 힘을 잃으며 불안정해지는 탓에 내부에 담겨야 하는 힘이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성녀는 방 중앙, 성유물 바로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법왕이 들어오며 인사를 건넸음에도 아무 반응이 없다.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빛을 뿜는 성유물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약을 더 강하게 할 필요는 없겠군. 이대로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한다면, 약효를 줄여도 될 것 같다.’

성유물의 힘이 불안정해지고 성녀가 처음 발작을 일으킨 건, 하필이면 그녀가 성도 광장에서 정기적으로 교리를 설파하던 날이었다.

혼란에 빠진 민심을 간신히 잠재우고, 기사들에게 붙잡힌 채 태양궁에 돌아온 성녀를 보며 법왕은 다양한 수단을 강구했다.

최종적으로는 동대륙에서만 자생하는, 마약의 일종이지만 극소량만 복용하면 정신을 안정시킨다는 약초를 사용했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그러나 성유물이 불안정해질수록 기존의 약으로는 성녀의 발작을 가라앉힐 수 없게 되었다. 약이 점점 강해졌고, 독성이 그녀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이제 와서는 마치 인형처럼 아무 반응조차 하지 않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돌이킬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 성녀에게 약을 복용시키며 해독제의 연구도 병행했고, 심한 중독 증세를 보여도 신성술과 해독제를 함께 사용하면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10년 가까이 약에 중독되어 스스로 용변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성녀의 모습을 볼 때마다, 법왕은 과연 이게 옳은 판단인지 알 수가 없어졌다.

“성녀님, 제발 제게…… 단 한 마디면 괜찮습니다. 제가 옳다면 옳다고, 틀리면 틀리다고, 그저 한 마디만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성녀는 움직이지 않는다. 눈동자도 돌리지 않고, 입술도 열리지 않는다.

법왕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낡은 과거가 섬광처럼 되살아나며 뇌리를 스쳐 지났다.

그가 젊은 나이에 주교가 되어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방황하던 당시, 그녀는 막 성녀가 되어 성녀로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한 여러 교육을 받고 있었다.

사소한 몸가짐과 말씨 하나까지 철저하게 교정 당하는, 어린 소녀로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을 터.

당시 법왕은 그녀를 이 부패한 나라의 피해자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다. 성녀라는 지위 자체가 고위 사제들이 자기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만들어낸 꼭두각시가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직접 그녀를 마주하고, 그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인정했다. 그녀는 매우 총명하고 사려가 깊었다. 태양궁에 들어온 지 고작 2주 만에 고위 사제들의 실체를 알아차릴 정도로. 그러나 그러면서도 조금도 좌절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태양께서 보듬어 살펴야 하는 형제자매임은 마찬가지이며, 자신이 성녀가 된 것은 바로 그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리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법왕은 충격에 온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 순수하고 고결한 마음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법왕이 되리라 마음먹은 것도 그때였다.

방황을 끝내고, 자신이 법왕이 되어 이 나라의 부패를 뿌리 뽑으리라 결심했다.

그러나 그 순수하고 고결한 마음을 가진 성녀는 이 자리에 없다. 자신의 손으로 없애버렸다.

‘……이 전쟁은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법왕은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성유물의 힘을 복원하고 성녀님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미궁에 잠든 비밀이 반드시 필요해.’

갈구하는 눈으로 성녀를 바라보던 법왕이 간신히 시선을 떼었다.

‘성녀들의 힘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무력화됐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성유물을 직접 전장으로 옮긴다.’

그의 눈동자가 무의미하게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성유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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