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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인류 역사상 가장 사악한 외교수단(2) (84/210)


84화 인류 역사상 가장 사악한 외교수단(2)
2022.12.26.


자이안은 인상을 쓰며 졸트를 바라보았다. 기분이 상한 것이 아니라, 그 질문의 의도를 읽지 못해 그러는 것이다.

“자이안 님이 무고하고 힘없는 이들이 억울하게 희생되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세간에선 그런 천성을 ‘선하다’라고 일컫겠지요. 하지만 자이안 님, 생물은 살아가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희생해야 합니다. 그런 어쩔 수 없는 희생마저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그저 스스로에 대한 고문이 아닙니까?”

“졸트 교수. 희생을 받아들이는 것과, 희생을 당연시하는 건 달라요.”

자이안의 대답은 흔들림이 없었다. 졸트를 똑바로 마주 보는 두 눈동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맹목이나 광신과는 달랐다. 자신만이 옳다고 믿는 아집에 빠진 사람은 결코 저런 눈을 하지 않는다.

“졸트 교수, 혹시 가족 있어요?”

“아뇨. 없습니다.”

졸트는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자이안도 그럴 거라고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질문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있었겠죠? 부모든, 형제든, 자식이든, 그도 아니면 연인이든, 사랑하는 사람이 정말로 한 명도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어요? 당신의 과거에 그런 인연이 한 번도 없었나요?”

“과거…… 말씀이십니까.”

띄엄띄엄 말하며, 졸트는 낡은 기억들을 들춰보았다.

“만약 당신에게 그런 인연이 정말로 없었다면, 이 문답에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저와 당신은 서로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

졸트의 과거. 그가 아직 아이였으며, 가족의 비호 아래에 있던 시기. 그 시절의 그는 유복했다. 적어도 물질적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어땠을까? 계기가 주어지자, 까맣게 잊어버린 줄 알았던 옛날의 기억이 속속들이 되살아났다.

그는 낙후된 작은 나라 지방 영주의 자식이었다. 어머니는 본처가 아니라 첩이었다. 아비는 첩만 5명을 둔 호색한이었다.

자식은 스무 명에 달했고, 두각을 드러내는 소수는 총애를 받았지만 나머지는 방치되었다.

갖은 부패를 통해 축적한 부는 많았던지라 생활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다른 형제자매는 애정을 받지 못해 삐뚤어지기 마련이었으나, 졸트는 그나마 운이 좋았다.

그의 수발을 맡은 시녀가 그를 가족처럼 아꼈고, 졸트도 그녀를 어머니 대신 따랐다.

‘타기온. 그래. 그 여인의 이름이었지.’

그 시녀는 졸트가 10대 중반이었던 어느 가을에 죽었다. 가문의 물건을 훔쳐 내다 팔았다는 죄목으로 영주에게 맞아 죽은 것이다.

말도 안 되는 폭거이지만, 정치 체제도 국민의 의식도 모든 것이 낙후된 그 나라에서는 귀족의 하인들이 노예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기도 했다.

문제는 이 사건이 그녀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다른 시녀들이 덮어씌운 누명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죽음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 졸트가 독자적으로 진실을 파헤쳤고, 마침내 그의 감정이 임계점에 도달한 순간 그에게 마법의 재능이 싹을 틔웠다.

졸트는 가장 먼저 그녀에게 누명을 씌운 시녀들을 태워 죽였다. 그 과정에서 시녀들이 졸트의 형제 중 한 명을 구슬려 누명의 씌우도록 조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형제는 대낮에 복도 한가운데에서 익사시켰다.

마지막으로 친부는 팔다리를 썩게 만들어 죽였다.

친부를 죽일 즈음 졸트는 분노보다도 다른 감정이 앞서고 있었다. 인간에 대한, 그중에서도 어리석은 인간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자신이 죽인 이들을 변덕으로 곱게 묻어준 졸트는 방랑을 시작했고, 얼마 뒤 보석탑의 눈에 띄어 연수생으로 입문했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감고 옛날을 되새기던 졸트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래도 한 명 있었군요. 예. 당신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알겠습니다. 타기온이 전쟁에 휘말려 희생되었더라면, 혹은 탑에 납치되어 실험의 제물이 되었더라면…….”

졸트는 말을 흐렸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명확히 그려지지 않았다. 지금까지처럼 그 희생을 필요한 것,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묵묵히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감정에 몸을 맡기고 미쳐 날뛸지도 모른다.

“저는 그런 일을 막고 싶어요. 그것뿐이에요.”

자이안이 빈 접시를 내밀었다. 졸트는 마법으로 접시들을 세척하고 공중에 띄운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모든 희생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자이안 님, 당신이 가려는 길은 가시밭길입니다.”

“졸트 교수. 그런 말은 몇 번이고 들었어요.”

그저 담담한 그 말에 졸트는 압도되었다. 집중력이 흐트러진 나머지 공중에 떠 있던 접시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깨진 파편이 졸트의 발치까지 닿았다.

이를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졸트는 한숨을 내쉬고는 깨진 파편을 마법으로 정리했다.

“전 여기서 쉴게요. 당신도 가서 쉬세요. 내일부턴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할 거예요.”

졸트는 가볍게 인사한 뒤 얌전히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은 자이안이 나무 등치에 기대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의외구만.”

케이와 함께 떨어진 곳에서 쉬고 있어야 할 프레이가 풀숲을 헤치고 나왔다. 자이안은 한쪽 눈만 뜨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보고 계셨어요?”

“난 너랑 다르게 마음이 모나서 한 번 눈 밖에 났던 놈은 끝까지 의심하거든.”

졸트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 말하는 것치고 프레이의 표정은 평탄했다.

“하긴, 그 어떤 쓰레기 같은 놈도 날 때부터 쓰레기로 태어나는 건 아니긴 하지.”

피식 웃더니, 프레이는 자이안의 곁에 다가와 바로 옆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마치 자리가 좁다는 듯 자이안의 옆구리를 툭툭 찌른다. 자이안이 슬쩍 비켜주자, 프레이는 똑같이 등치에 몸을 기대고는 한 팔로 자이안의 어깨동무를 했다.

“삼촌. 저 괜찮다니까요.”

“내 앞에서까지 강한 척할 필요 없다. 나이아도 내 앞에선 가끔 울었어. 뭐…… 내가 울린 적도 없진 않은데.”

“어머니를 울렸다고요? 삼촌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아니, 그냥…… 어렸을 때 얘기다, 어렸을 때. 벌써 30년 가까이 옛날이군. 뭐 때문에 그랬더라? 아마 TV 채널 때문에 그랬던 거 같은데. 별거 아니었어. 그냥 서로 예민한 시기라 그랬던 거지.”

사실 성인이 된 뒤에도 한 번 있었다. 나이아가 전쟁 구호 지원을 끝내고 돌아와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극심한 불안 증세에 빠진 나이아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프레이는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그녀를 지키며 간호했다.

어렸을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고, 이대로 나이아가 회복하지 못하면 어쩌지 하고 매일 밤 나이아 몰래 두려움에 떨었다.

“그런 기분은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다.”

“무슨 말씀이세요?”

“내 앞에서 강한 척하지 말라는 거다. 어차피 난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도는 훤히 알고 있으니까.”

“그럼 제가 지금 무슨 생각 하는지도 맞춰볼 수 있어요?”

“이 삼촌은 혼자 있고 싶은데 왜 괜히 옆에 달라붙어서 귀찮게 굴까?”

“……헐.”

그렇게까지 심한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혼자서 보낼 시간을 좀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건 사실이었다. 자이안은 깜짝 놀라 탄성을 터뜨렸다가, 이내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강해지고 아무리 많은 경험을 겪어도, 그에게만은 평생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근데 저 진짜 괜찮아요. 삼촌이 보기엔 안 그래 보일지도 모르지만, 약한 소리를 쏟아내야 할 정도는 아니에요.”

“내가 보기엔 안 그런데. 자기 마음도 제대로 깨닫지 못할 만큼 강한 척하고 있는 거 아니냐?”

“삼촌. 저라고 성장하지 않고 맨날 제 자리만 있는 건 아니에요. 힘든 일이 있던 건 사실이고 아직도 가슴이 아프지만, 이 정도는 극복할 수 있어요.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삼촌은 너무 잔걱정이 많아요.”

“내가? 내가 걱정이 많다고? 인마,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 없어서 어쩔 셈이냐? 하여간 넌 나 없으면 어떻게 될지…….”

-있잖아. 둘이서만 놀지 말고 나도 끼워줘!

“우와! 깜짝이야!”

갑자기 커다란 머리가 나무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프레이는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자이안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삼촌…… 크흐흐흡, 우와, 깜짝, 푸흡, 흐히히히, 깜짝이야, 라뇨.”

“아니, 이건…… 야! 넌 덩치도 커다란 게 기척 좀 내고 다녀라! 너 그 커다란 머리가 갑자기 옆에서 툭 튀어나오면 깜짝 놀란다고!”

-하지만 아까는 안 들키게 조용히 숨어있으라고 했잖아? 이제 안 그래도 돼?

케이의 순진한 물음에 프레이는 완전히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자이안은 그 모습을 보며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픈 기억을 웃음으로 덮으며, 전쟁터의 첫날이 지난다.

***

“아르곤 추기경, 위베른 추기경, 레헤트리히 추기경. 아까운 분들께서 목숨을 잃었군요.”

“마법사란 참으로 방심할 수 없는 족속이군요. 설마 그 찰나의 틈을 노려 추기경이 머문 막사를 기습 공격할 줄이야.”

시범으로 전장에 투입한 양산형 성녀 1명이 성공적으로 효과를 발휘했음을 확인하고, 마침내 정식으로 성녀 부대가 전선에 투입되었다.

우선적으로 투입된 성녀는 3명. 급하게 세뇌를 진행한 나머지 정신이 완전히 파괴된 성녀들을 관리하기 위한 추기경과 수도 사제들도 함께 전장에 파견되었다.

사제의 지시가 없으면 밥조차 먹지 않는 성녀들을 보며 전선의 지휘를 맡은 기사단장은 석연치 않은 기색이었으나, 신앙을 더욱 깊이 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내면에 몰두했다는 변명으로 얼버무렸다.

자폭 특공은 성전을 승리로 이끌고자 하는 강한 의사를 존중한 거룩한 희생으로 포장했다.

“제8기사단장 헬리아디오 경. 지금 경이 생각해야 할 것은 그런 사소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성녀님들께서 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때까지는 기사와 병사들이 힘을 모아 저 사악한 마법사들의 공세를 버텨야 해요. 자신의 역할을 잊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예하. 태양께서 우리를 굽어살피시기를.”

“태양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자, 가서 성무를 다하세요.”

지난 며칠간 적들의 전략 전술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처럼 정확하고 날카로워졌다. 성녀라는 특수한 전력을 제외하면, 법왕국 측은 적잖이 열세에 몰려 있었다.

적들의 공세가 거세지 않아 사상자는 생각보다 적었으나, 그렇다고 아예 없지는 않았다. 추기경의 그 말은, 목숨으로 시간을 벌라는 뜻이었다.

마법사를 상대로 어쭙잖은 기습이나 우회 전술은 통용되지 않는다. 탐지 마법으로 인간의 오감보다 훨씬 넓은 범위의 정보를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전술도 없이 오합지졸이던 이전이라면 시험 삼아 시도해볼 만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그저 부족한 병력을 분단할 뿐인 자충수에 불과하리라.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일진일퇴의 공방이 이어졌다. 법왕국 측은 어떻게든 병력을 밀어붙이려 했으나 전력이 모자랐고, 마법사 측은 반대로 충분한 전력을 가지고서도 그저 전선의 유지에 집중할 뿐이었다.

조금의 변화도 없는 전선의 상황에, 기사들은 흡사 마법사들이 자신들을 말려 죽이는 것 같다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잠깐만 더 버티면 된다. 성녀님들께서 어떻게든 활로를 열어주실 거다.’

그리고 마침내 그때가 찾아왔다.

막사 안, 사제들은 성녀들에게 자폭 지시를 내린 뒤 구석에 몸을 피해 강력한 가호를 전개했다. 혹시 성녀 중 일부가 조금 일찍 자폭하는 불행한 사고가 일어나도 자신들만은 몸을 지킬 수 있도록.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군요. 이번 성녀들도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신성력의 밀도가 높아지며 막사 안이 점점 열기로 가득 찼다. 이내 세 명의 성녀의 몸에서 눈 부신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마치 촛불이 꺼지는 것처럼 픽 사라졌다.

“……?”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사제들의 표정이 혼란과 경악으로 뒤틀렸다.

“성공…… 했다.”

까마득한 하늘 위.

며칠 동안 한시도 쉬지 못해 지저분한 몰골로, 자이안은 가슴 깊이 안도했다. 그의 등 뒤로 헤일로가 마치 날개를 연상케 하는 모습으로 뿜어져 나오고, 머리 위에는 새하얀 빛의 고리가 떠올라 있었다.

지난 며칠간 모든 힘을 쏟아 간신히 완성한 아티팩트를 쥔 두 손은, 백마법 특유의 밝은 빛으로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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