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인류 역사상 가장 사악한 외교수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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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인류 역사상 가장 사악한 외교수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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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인류 역사상 가장 사악한 외교수단(1)
2022.12.25.
“마법이 온다! 신성기사단, 대열을 유지하고 방패를 들어라! 태양신의 가호가 함께하리라!”
『태양신의 가호가 함께 하리라!』
굳건한 신념에 찬 외침이 전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폭발하는 화염구, 빙하의 창, 호흡마저 얼려버리는 눈보라, 낙뢰, 암석 탄환 등 엄청난 수의 파괴적인 마법이 그 위로 가차 없이 쏟아졌다.
신성력의 방패가 그들을 지켰다.
“가, 가호가 약해진…… 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곳곳에서 메아리쳤다. 신성기사단은 전원이 강력한 신성술과 담대한 신앙심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의 공격을 막지 못해 목숨을 잃었다면, 이는 분명 신앙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집중포화를 당해 죽은 당사자를 제외한 모든 기사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후방에서 온갖 가호로 보호받고 있는 주교 집단만이 전황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적들이 아무래도 머리를 좀 쓰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어차피 저들에게 승산은 없는데…… 참으로 어리석군요.”
“후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저들에게 현실을 보여주고 바른길로 이끌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불의 정화라는 길 말이지요.”
그들은 자만하며 대화를 나눴으나 실제로 전황 자체는 법왕국 측의 근소한 약세였다.
마구잡이로 강한 마법을 쏟아부은 나머지 저들끼리 부딪치고 상쇄되기까지 했던 이전과는 달리, 지금 마법사들은 상승효과가 있는 마법들을 한 곳에 집중적으로 사용하거나 약하지만 그만큼 쉴 새 없이 쏟아부을 수 있는 마법을 병용하는 등 전술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가호가 약한 취약지점을 정확히 찾아 화력을 집중하는 등, 뛰어난 전술안을 가진 지휘자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주교들도 물론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자만하는 이유는 당장의 전력 차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의 비장의 무기가, 한 번 무산될 뻔했지만 어떻게든 자원을 끌어모아 급조하는 데 성공한 ‘양산형 성녀’들이 마침내 그 힘을 선보일 날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짧고 강한 지진을 일으킬 거예요. 마법사들에게 모두 대비하라고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까마득한 하늘 위. 자이안은 천룡으로 변한 케이의 머리 위에 올라탄 채 통신용 아티팩트를 통해 지상의 졸트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구름 위 높은 곳에서 프레이의 마법으로 시력을 강화한 자이안이 전체적인 전황을 졸트에게 전하고, 졸트가 이를 실시간으로 전술에 반영한다. 마법사들이 근소하게나마 법왕국 측을 웃돌 수 있게 된 이유였다.
동시에 자이안은 되도록 양측 병력의 피해를 최대한 억제해줄 것을 요청했고, 졸트 역시 가능한 이를 지키려 애쓰고 있었다.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집요하게 거리를 벌리며 백병전을 허락하지 않는 마법사 측은 좀 나았지만, 반대로 법왕국 측은 잠깐 시선을 뗄 때마다 수십 명이 죽어 나갔다.
사망자의 수가 늘어날수록 자이안의 안색도 점점 안 좋아졌다.
-지금이에요!
자이안이 통신으로 소리친 순간 케이의 두 뿔이 하얗게 번쩍였다. 잠시 뒤, 양측 병력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갑자기 땅이 요동치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처음에는 전쟁터의 광기에 휩싸인 나머지 착각을 하는 줄 알았으나, 곧 정말로 지면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추, 추기경 예하! 땅이, 땅이 흔들립니다!”
지반이 안정된 대륙 서부 사람들에게 지진은 쉬이 겪기 힘든 희귀한 현상이었다. 건국 이래 단 한 번도 지진을 겪지 못한 나라도 많았고, 아예 지진이라는 개념 자체를 모르는 이들도 있었다.
‘축복받은 땅’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풍요로운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는 법왕국이 특히 대표적이었다.
“대지가! 대지가 노하고 있는 건가?!”
“태양신의 분노다……! 태양신께서 저 악마들을 쓰러뜨리지 못하는 우리를 보고 분노하고 계신다!”
열렬한 신앙으로 무장한 그들도 땅이 흔들린다는 초유의 사태에 평정심을 잃고 혼란에 빠졌다. 지진이 올 것을 미리 대비하고 있던 마법사들은 그 틈을 타 안전하게 퇴각하고 있었다.
자이안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케이. 이제 그만해도 돼.”
-난 아직 괜찮아! 마법사들이 완전히 퇴각하기 전까지는 계속하는 게 좋지 않을까?
천룡의 힘을 쓸 때마다 피곤해하는 케이를 걱정해 한 말이었지만, 반대로 설득당하고 말았다. 어중간하게 지진을 멈추면 기세를 되찾은 법왕국이 다시 막무가내로 진격할지도 몰랐다.
“너한테는 계속 신세만 지네. 정말 고마워, 케이.”
케이의 비늘을 쓰다듬으며 자이안은 미안함 반, 고마움 반을 담아 말했다. 온갖 자연현상을 지배하는 케이의 힘은 제3세력으로 끼어들어 전쟁을 막기 위한 계획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지진을 일으키거나 지형을 일부 변형시키거나 폭우를 쏟아붓는 등,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했다.
각성자 중에서는 프레이가 비슷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그의 마법은 지나치게 강력한 나머지 인간 군대를 상대로는 적지 않은 피해를 낼 가능성이 높았다. 프레이 본인이 솔직하게 인정한 사실이었다.
각성한 뒤로 반평생을 마물과의 격렬한 싸움 속에서 보낸 그는, 적을 살려주기 위해 힘을 조절한다는 행동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할 수 있으나 적잖은 스트레스가 쌓이고 만다.
“솔직히 내가 보기엔 저놈들이나 이놈들이나 다 똑같은 죽일 놈들이거든. 아마 내가 나섰다간 홧김에 사고를 치고 말 거다. 특히 법왕국 저거는 100%다.”
때문에 프레이는 이번에는 철저하게 자이안의 보조에 집중하기로 했다.
“인마, 이제 겨우 첫날인데 안색이 그래서야 되겠냐?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힘든 일이 될 거라고.”
“전 아직 괜찮아요. 사람이 죽는 걸 보는 게 처음인 것도 아닌걸요.”
자이안은 의연하게 대답했으나 프레이는 그 너머에 숨겨진 불안하게 흔들리는 감정을 정확히 간파할 수 있었다.
자기 손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 모두 사람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히는 사건이지만 전쟁은 그런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전쟁은 광기의 소용돌이 그 자체다. 참전자들은 물론 관련된 모든 이들을 미쳐버리게 만든다. 미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번 미쳐버린 마음은 설령 전쟁이 끝나도 결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남은 인생 동안 고통 속에서 몸부림쳐야 한다.
전쟁을 외교의 일환이라고 비유하는 식자들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자국민의 몸과 마음을 제물로 잡아먹는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외교 방식이리라.
-어? 자이안. 법왕국 쪽이 좀 이상해.
케이의 말에 자이안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처음에는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프레이가 혹시 모르는 마음에 마안을 열었다. 법왕국 측 후방, 주교들이 모인 막사에서 일어나는 이상 현상을 포착했다.
“잠깐, 이거…… 이런 젠장!”
프레이가 급히 손을 휘둘렀다. 막사 위에 아지랑이가 일렁이더니 청백색 불꽃의 소용돌이가 싹을 틔웠다. 고열과 폭풍을 동반한 마법이 그대로 막사를 후려쳤다.
그러나 그보다 한발 앞서, 새하얀 빛 덩어리가 빠른 속도로 막사에서 튀어나왔다.
그것은 힘 자체가 눈에 보일 정도로 강대한, 압축된 신성력의 덩어리였다. 그리고 시력이 강화된 자이안의 눈은 덩어리의 중심에 완전히 자아를 잃은 듯 멍한 표정으로 침을 흘리고 있는 여성의 모습을 발견하고 말았다.
새하얀 빛이 이미 퇴각을 마친 마법사들의 진영으로 날아들었다. 불길함을 느낀 졸트가 결계를 펼쳤으나 수 초도 막아내지 못했다. 결계가 찢어지고 빛 덩어리가 진영 한가운데에 착지했다.
다음 순간, 반경 수백 미터를 집어삼키며 새하얀 빛이 폭발했다.
“…….”
상공 수 킬로미터, 자이안이 있는 곳까지 진동이 느껴질 만큼 강렬한 폭발이 마침내 잦아들었다. 자이안은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멍청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까맣게 불타버린 땅 위에 연기를 피워 올리는 수백 구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불탄 시체, 짓눌려 으깨진 시체, 산산조각으로 찢어진 시체, 시체, 시체, 시체, 그리고 운 좋게 ― 혹은 운 나쁘게 살아남아, 불타버린 반신을 붙든 채 착란에 빠져 오열하는 이들.
“우욱…….”
자이안은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참지 못했다.
그대로 눈물을 흘리며 토했다.
***
“자이안 님, 안색이…… 괜찮으십니까?”
전장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 케이와 함께 숨어있을 자이안을 찾아간 졸트는 참지 못하고 그런 질문을 꺼내고 말았다. 정작 그런 말을 하는 졸트도 고작 한나절 만에 10년은 더 늙은 것처럼 보였다.
“전 괜찮아요.”
그러나 자이안의 대답은 어디까지나 의연했다. 시체처럼 창백한 안색에, 미처 닦아내지 못한 듯 희미한 눈물 자국이 남아있는데도 그랬다. 졸트는 말문이 막혔다. 신기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처음 자이안의 존재를 알았을 때 졸트는 환희했다.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쉽지 않은 상대라고 깨달은 뒤로는 짜증을 느꼈다.
미궁을 파괴하고 지상으로 나온 그의 진정한 힘을 마주한 뒤에는 걷잡을 수 없이 두려웠다. 그런 힘을 가지고서도 억울한 사람들을 구하겠다는 허술한 이상에 사로잡힌 모습에, 결국은 어수룩한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지금은…… 지금은?
‘이건…… 그래. 용을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감정인가.’
용이 그에게 안겨준 감정은 좌절이었다. 인간의 진화, 고등한 존재로의 발돋움이 숙원이었던 그는 용을 직접 보고 인간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함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말았다.
지금 그가 자이안에게 느끼는 감정 역시 맥락은 같았다. 그가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 쳐도 손에 넣을 수 없는 고결한 마음가짐. 그것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분명 눈부셨다.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드실 수 있겠습니까?”
졸트는 마법으로 허공에 띄워놓은 접시들을 자이안에게 내밀었다. 내용물을 한 번 확인하고, 자이안은 힘없이 말했다.
“고기는 빼고 주세요. 못 먹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 광경을 지켜보고도 태연히 고기를 먹을 수 있다면 어지간한 강심장, 아니 미치광이일 것이다. 실제로 폭심지에서 가까이에 있던 마법사들 중에서는 식사 자체를 거부하는 이들이 많았다.
“법왕국이 사용한 특수한 폭탄의 피해로…….”
“성녀예요. 죄 없는 자국민의 목숨을 1회용 폭탄으로 사용한 거예요.”
“……역시 그렇군요.”
자이안은 분노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였으나, 졸트는 솔직하게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전력 교환비가 압도적이었다. 단 한 명 민간인 여성을 희생해 170명에 달하는 마법사를 죽일 수 있는 전략 병기. 위정자들이 알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이다.
“자이안 님은…….”
문득, 졸트는 전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꺼내기에 적절한 타이밍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식사를 멈춘 자이안이 의아해하며 그를 바라보는 가운데, 졸트는 솔직하게 물었다.
“자이안 님은 왜 그렇게까지 고통을 자초하시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