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성녀의 자질(2)
(82/210)
82화 성녀의 자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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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성녀의 자질(2)
2022.12.24.
「우리가 너무 서둘렀나?」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그러나 프레이의 그 말이 뭘 가리키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저희가 퀴나스 양의 사정을 배려하지 못했죠. 퀴나스 양은 지금 인생 중 가장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있을 거예요. 계획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니만큼, 더 신중하게 접근했어야 했어요.」
「지금이라도 진솔하게 얘기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글쎄요. 이미 적잖이 저희를 경계하고 있을 것 같은데. 더 이상 자극하지 말고 경계심이 풀릴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 수도 있어요.」
저녁 무렵. 가장 마지막에 식사를 마친 자이안은 침대에 누워 각성자들의 얘기를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이안 넌 아까 왜 한 마디도 없었냐?」
화두가 자이안에게 향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자이안은 어질러진 머릿속을 정리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가 뭐라 대답하려 한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자이안? 있나요?”
퀴나스의 목소리였다. 뜻밖의 방문자에 자이안은 급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무슨 일이세요?”
퀴나스는 소아레스도 없이 혼자였다. 열린 문 너머로 방안을 살피고 자이안 혼자 있는 것을 확인한 다음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하려고요. 안 될 거 같으면 내일 다시 올게요.”
“그 정도야 괜찮은데…….”
의도를 짐작하지 못한 채 자이안은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4인용 테이블 한쪽에 퀴나스가 앉고, 자이안은 우왕좌왕하다가 맞은편에 앉았다. 어색한 분위기가 어깨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듯했다.
“아까 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네?”
맥락을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자이안이 되묻자, 퀴나스는 인상을 쓰며 잠시 말을 고르는 듯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다른 사람들이 다 저보고 전쟁터에 나가라고 설득할 때, 당신만 가만히 있었죠. 왜 그런 거예요?”
“아.”
신기하게도 조금 전 각성자들이 했던 것과 비슷한 질문이었다. 문제는 자이안이 그 이유를 명확히 말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정리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잠시 머뭇거리자, 퀴나스는 혼자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소아레스랑 같이 성도를 탈출해 여기까지 오면서, 당신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들었어요. 당신이 제국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큰일을 했는지, 보석탑에 도착한 뒤 무슨 일을 했는지, 또 앞으로 하려고 하는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대로 상상할 수 있을 만큼.”
퀴나스의 눈이 자이안을 똑바로 향했다.
“솔직히 말만 들어서는 믿기 힘들었어요. 당연하죠. 저보다도 어린 애라고요? 그리고 당신을 직접 보고 난 뒤에는, 더 믿을 수 없게 됐어요.”
대책 없이 착한 소년이라는 건 처음 눈을 마주한 순간 알았다. 보는 이의 마음을 그대로 비추는 것만 같은, 거울처럼 맑은 눈동자였다.
어지간히 축복받은 환경이 아니라면 그런 눈을 가진 채 16살까지 자라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더 놀라웠다. 소아레스에게 모든 것을 듣지는 못했지만, 자이안이 어려운 유년기를 거쳤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전쟁을 멈추려는 거 아니었어요? 최소한의 희생으로? 당신들의 계획은, 제가 전쟁터로 나가야 한다는 게 문제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장 확실하게 전쟁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어떻게든 저를 설득해야죠.”
퀴나스의 언성이 조금씩 높아졌다. 사실 그녀 역시 혼란스러웠다.
그들 말대로 따르면 분명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전쟁터에 내몰리기 싫어서 도망쳤는데 제 발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는 이기심.
차라리 누가 억지로라도 떠밀었으면 싶었다. 그게 어느 쪽이든 간에. 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로 혼자서 고민하지 않아도 되도록.
“퀴나스 님이 아까 그러셨죠. 자기 역시 죄 없고 억울한 사람이라고. 하물며 퀴나스 님은 법왕국의 피해자이기도 해요. 그런 분을 억지로 떠밀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자이안의 대답은 퀴나스의 바람과는 정반대였다.
“물론 퀴나스 님이 협력해 주신다면 고마워요. 하지만 퀴나스 님의 의사를 무시하면서까지 억지로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아요. 어찌 보면 그것도 다른 방식의 희생이에요.”
“하지만 그러면…… 당신들은…… 제가 도와주지 않으면, 대체 어쩌려고요?”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죠. 전쟁을 막을 방법이 그것뿐만은 아닐 겁니다. 모든 희생을 막을 수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올곧은 눈동자에 퀴나스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동시에, 가슴 속에서 참을 수 없는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보석탑으로 오는 도중의 일이었다. 딱 한 번, 정찰을 나가는 소아레스에게 붙어 전장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소아레스에게 모든 걸 맡긴다는 게 불안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수백 미터는 떨어진 곳에 숨어서 잠시 지켜볼 뿐이었으나, 소아레스는 전장에서 흘러넘치는 압도적인 감정의 분류에 흔적도 없이 집어삼켜질 것만 같았다. 고함. 비명. 울음소리. 타는 냄새. 피 냄새. 증오의 말과 저주의 말. 그 모든 게 무절제하게 흘러넘치는 지옥이었다.
자신이 저런 곳에 던져질 뻔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사람이 그 지옥에 제 발로 들어가려 한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가요. 알았어요.”
짐짓 태연하게 대답한 퀴나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휙 등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자이안이 머뭇거리며 그 등을 바라보았으나,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가 볼게요. 잘 자고, 내일 봐요.”
“어…… 네…….”
어정쩡하게 대답하는 자이안을 뒤로 하고 퀴나스가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자이안은 한동안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이내 다시 침대로 가 드러누웠다.
“결국 설득은 실패했네요.”
「설득? 서얼드윽? 그게? 절대 협력해 주지 말라고 뜯어말린 게 아니라?」
“아니, 그건…….”
퀴나스가 찾아왔을 때, 그녀를 설득할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상대의 의사를 무시하는 잘못된 수단인 것 같았다.
머리로는 그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이해했지만, 마음은 끝까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자기 마음에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한 자이안도 결국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안 되면 제가 더 고생하면 되죠. 괜찮을 거예요.”
「사서 고생을 짊어지겠다는 소리를 그렇게 당당히…… 하, 젠장. 난 모르겠다. 전쟁터에 가서 뒤지든 말든.」
「아저씬 또 마음에도 없는 말을…… 괜찮아요, 자이안. 퀴나스가 빠진 만큼 저희도 많이 도와줄게요.」
미래는 불투명해졌지만 마음은 차라리 홀가분했다. 역시, 상관도 없는 남에게 짐을 짊어지게 할 바에는 그냥 혼자 짊어지고 가는 게 더 편했다.
자이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각성자들과 얼마간 대화를 나누다가 곧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 시간.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자이안과 유리아, 소아레스, 그리고 프레이라는 평소의 면면이 모인 자리에 대뜸 퀴나스가 찾아왔다.
“네?”
“저를 성녀로 내세워서 전쟁을 막을 거라는 계획이요.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자이안이 멍한 얼굴로 굳었다. 유리아의 얼굴이 환해졌고, 소아레스는 그저 작게 웃었다.
“어? 아니, 그게…… 도, 도와주시려고요?”
“그럼 도와주지도 않을 건데 이런 말을 할 것 같아요?”
“아니, 하지만 어젯밤에는…….”
문득, 어제 그녀가 떠나면서 아무것도 확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갑작스러운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스스로의 판단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등을 떠밀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퀴나스의 눈을 마주 본 자이안은 자신이 얼마나 무례한 생각을 했는지 깨달았다.
타인에게 판단을 떠맡긴 사람은 결코 저런 눈을 하지 않는다.
“어젯밤에 당신하고 얘기한 뒤에 잠깐 좀 생각해봤어요.”
반만 사실이었다. 내내 방에서 고민한 끝에 간신히 결심을 한 퀴나스는 아침에 가까운 시간이 되고서야 간신히 눈을 붙였다. 희미하게 거뭇한 눈두덩이 이를 소극적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법왕국은 분명 포기하지 않으리라. 하루빨리 그들을 막지 못하면 제2, 제3의 성녀 후보가 다시 나타나 전쟁터에 떠밀릴 것이다. 어쩌면 성도에서 벌써 그 준비가 이뤄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슴 속에서 그런 게 무슨 상관이냐고, 일단 나만 살아남으면 그만이라고 다그치는 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 작게 웅크린, 그럼에도 분명하게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무언가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부드럽게 그녀를 타일렀다.
그것을 누군가는 양심이라고 불렀다. 인간이 천성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선한 마음이었다. 작고 약하며 지키기 힘든, 그래서 더욱 지켜냈을 때 가치를 빛내는 것.
“정말이지, 제게 감사하라고요. 당신처럼 못 미더운 어린애 혼자한테 책임을 떠맡기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안해서, 그래서 제가 대신 나서겠다는 거니까.”
퀴나스는 팔짱을 낀 채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퉁명스러운 말투였으나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이런 아이가 혼자서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 채 노력하는 걸 그저 방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대로 도망쳐도 분명 아무도 그녀를 욕하지 않으리라.
누군가 욕하는 이가 있다면, 그건 분명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본인뿐일 것이다.
그런 감정을 모르는 척, 안 보이는 척하고 살아가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 또한 처세술이다. 관점의 차이일 뿐, 어느 것이 옳고 그른가 하는 문제는 아니다.
다만, 퀴나스는…….
“……!”
돌연 자이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대로 퀴나스의 손을 붙잡은 그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깜짝 놀란 퀴나스가 손을 빼내려 했으나, 곧 행동을 멈췄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퀴나스 님의 결단을 결코 헛되게 하지 않을게요. 절대로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역할을 마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정말, 정말 고마워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자이안을 보며, 퀴나스는 결국 어깨에 힘을 빼고 가볍게 웃었다.
다만 퀴나스는, 이런 사람을 위해 책임을 나눠 짊어지는 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
그날 오후.
“준비가 끝났습니다. 여러분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습니다.”
방을 찾아온 페시스의 말에 일행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탑을 떠나 새로운 거점으로 향할 때가 왔다.
“소아레스, 유리아. 두 분 모두 조심하세요.”
“그건 우리가 할 말인걸? 자이안이야말로 조심해.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도망쳐야 돼? 하긴, 아저씨랑 같이 있는데 위험할 일은 없겠지만.”
“피해자분들은 책임지고 안전히 이끌겠습니다. 걱정 말고 다녀오십시오, 자이안 님.”
자이안은 일행들과는 따로 행동하게 되었다. 전장의 상황이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 직접 확인하고자 자처한 것이다. 케이와 졸트가 그와 동행하게 되었고, 나머지는 구출한 피해자들과 함께한 발 앞서 페시스의 마을로 향하기로 했다.
“지금 전선에 나선 마법사들은 지휘 체계가 엉망이 되어 크게 약해져 있을 겁니다. 제가 나서서 그들을 지휘하면 어느 정도 피해를 억제할 수 있겠지요.”
마법사들 중에서 일부, 특히 전선에 나선 이들은 탑의 어두운 부분과는 무관계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정확히는, 그런 부분에 엮이기를 싫어했기 때문에 국경 감시 등의 업무로 좌천된 것이다.
졸트의 동행은 내키지 않았으나 그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자이안은 감정은 잠시 접어두고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드디어 좁고 갑갑한 모습에서 해방이다!
날개 달린 이족 보행형 파충류의 모습, 흔히 지구에서는 ‘서양식 드래곤’이라고 일컬어지는 모습으로 변한 케이가 날개를 쭉 펴며 홀가분하게 소리쳤다.
이미 한 번 그 모습을 본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 선 졸트는 숨죽인 채 압도되었다.
용은 지금의 모습, 그리고 뱀처럼 기다란 몸에 날개도 없이 하늘을 누비며 뿔로 비와 구름과 번개 등 온갖 자연 현상을 지배하는 ‘천룡’의 모습, 두 가지로 변할 수 있는 생명체다.
‘천룡’은 모든 힘을 완전히 개방하고 권능을 발휘하기 위한 모습이다. 자의식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그 실체는 생물이라기보다는 행성의 의지를 대변하는 화신에 가깝다.
반대로 ‘성룡’, 즉 지금의 모습은 생물로서 존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권능을 억제한 형태다. 현재 전설로 전해지는 내용은 성룡에 대한 것뿐이며, 천룡에 대해서는 아무런 전설도 전해지지 않았다.
-겁먹지 마! 지금은 안전하거든. 지금은! 네가 허튼짓을 하면 바로 잡아먹어 버릴 거지만. 어흥!
케이가 장난스럽게 졸트를 겁주고는 깔깔 웃었다. 물론 졸트에게 그 소리는 위협적인 포효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자이안은 쓰게 웃으며 케이의 말을 번역해주었다.
“해를 입힐 생각은 없으니까 겁먹지 말라고 하네요.”
“저는 겁먹은 것이 아니라…… 아니,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군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완전한 생명체를 눈앞에 두고 압도된 것은 사실이니.”
그리 말하며 졸트는 힘없이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자이안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상한 기분이었다. 엄밀히는 미궁을 파괴하며 지상으로 올라온 날, 졸트가 케이를 목도했을 때부터 줄곧 그랬다.
“자이안 님? 안 가실 겁니까?”
자이안이 생각에 잠긴 사이 한발 먼저 케이의 등에 올라탄 졸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마 마법으로 날아오른 것이리라. 너무나도 태연한 그 모습에 자이안은 잠시 얼이 빠졌다.
원로교수 중 유일하게 목줄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가 졸트였다. 프레이가 그의 절박함을 시험할 기회라며 제안한 것이다.
원로회가 완전히 힘을 잃은 상황에서 혼자서 힘을 온전히 가진 그는 그러나 자이안의 빈틈을 노려 공격하지도, 원로회를 대신해 보석탑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어쩌면 이대로 도망칠 수도 있었을 지금 상황에서도 얌전히 케이의 등에 올라탔다.
“알았어요. 케이, 출발하자.”
한발 늦게 자이안 역시 케이의 등에 올라탔다. 두 사람이 비늘을 꽉 붙잡았음을 확인한 뒤 케이는 날개를 홰치며 날아올랐다.
반파된 채 방치된 탑을 등지고, 이윽고 용이 서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