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성녀의 자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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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성녀의 자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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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성녀의 자질(1)
2022.12.23.
소아레스가 데려온 여성들은 거의 100여 명에 달했다. 법왕국이 납치한 성녀 후보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구한 것이다.
그중 일부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지만, 이미 마을은 신성기사단에 의해 멸망했으며 법왕국에 남아 있으면 또 성녀 후보로 납치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는 체념했다.
부양해야 할 인원이 갑자기 늘어나자 여러 가지 문제가 부상했다. 당장은 탑의 시설을 빌려 생활할 수 있다지만, 언제까지고 그럴 수는 없었다. 보석탑은 결국 적진 한가운데다.
자이안이 언젠가 전장으로 향하고 나면, 남은 이들이 마법사들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 몰랐다. 인간을 재료로 한 실험의 주동자는 원로교수들이지만, 다른 마법사들 역시 공범이다.
“저희 마을로 오시겠습니까? 작은 마을이지만, 이 정도 인원을 수용할 만한 여유는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피해자들의 대표가 된 페시스 카펜트리가 뜻밖의 구조선을 냈다. 자이안은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돌아오는 길에 전선의 상황을 조금 살펴봤습니다.”
소아레스는 자이안이 바라 마지않았던 정보를 들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현재 전선은 법왕국보다 보석탑 쪽에 가깝게 펼쳐져 있다. 전황은 쌍방 모두 어느 정도 소모를 보인 채 소강상태. 드문드문 소규모 접전을 일으키며 일진일퇴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저쪽도 꽤나 난감한 상황일 겁니다. 전략의 핵심인 성녀 후보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으니까요. 현대전으로 비유하면, 제공권을 확보해 승기를 굳히려 했는데 하루아침에 전투기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거죠. 아마 병력의 소모를 감수하고서라도 어떻게든 전선이 밀리지 않도록 버티다가, 다음 성녀 후보가 완성되면 다시 밀어붙이려는 게 아닐까요?」
「마법사들이 진짜 아무 생각도 없는 멍청이들이 아닌 이상, 적의 기세가 주춤했다는 사실을 오래지 않아 알아챌 거다. 조만간 전선에 큰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
애초에 성녀와 같은 대칭 전력을 제외한 법왕국의 순수한 전력은 보석탑에 비해 처지는 편이다. 마법사들이 얼마나 빨리 그 사실을 눈치채느냐, 그리고 법왕국이 얼마나 빠른 시일 내에 제2의 성녀 후보들을 준비하느냐.
전쟁의 행방은 그 둘에 달려있다고 봐야 하리라.
「당장이라도 전장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겠지만…… 일단은 눈앞의 일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처리하자고. 급한 마음에 서두를수록 발이 꼬이기 쉬운 법이다.」
「근데 지금 탑도 원로회가 힘을 못 쓰는 상태잖아요? 그럼 성녀가 없는 법왕국이랑 전력이 비슷해지지 않았을까요?」
유민이 날카롭게 지적했다. 아르스와 프레이는 예상치 못한 듯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이었고, 크룩스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균형을 이루지는 못해도, 전력 차는 아무래도 꽤 좁혀지겠죠. 애초에 원로회를 제압한 건 보석탑의 전력을 크게 깎으려는 의도도 있었고요. ……응? 두 분 모두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어?! 어어, 아무것도 아니다. 암, 그렇고말고. 처음부터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지!」
아르스가 허튼소리를 하기 전에 프레이가 크게 소리치며 과장되게 웃었다. 이로써 자기들이 저지른 일의 여파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두 각성자의 명예가 지켜지게 되었다.
“자이안 님, 소개해드릴 분이 있습니다.”
점심 무렵.
100명이 넘는 인원의 식사를 혼자서 준비했으면서 지친 기색 하나도 없는 소아레스가 식사를 마치고 앞으로의 계획을 가다듬고 있는 자이안에게 다가왔다.
전에도 한 번 얼굴을 본 소아레스의 부하 올소라, 그리고 법왕국 측 피해자 중 한 명인 기가 세 보이는 여성과 함께였다.
“이쪽은 올소라 데이톨. 모두를 구해 무사히 법왕국을 탈출할 수 있도록 여러 도움을 줬습니다.”
“다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자이안 님! 히힛, 자랑은 아니지만 제가 없었으면 아무리 소아레스 각하라도 탈출하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을 겁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올소라.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무사히 살아날 수 있었어요.”
“아…… 하, 하하. 그렇게까지 고마워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전 정말 조금만, 진짜 요만큼만 도움을 줬을 뿐입니다. 누구보다도 고생한 건 소아레스 각하십니다.”
금세 태도를 바꿔 겸손해진 올소라를 보며 자이안은 부드럽게 웃었다.
“물론이죠. 저도 알고 있어요. 정말 고생 많았어요, 소아레스. 그래서…… 이분은요?”
자이안의 시선이 입을 꾹 다문 채 경계 섞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성에게 향했다. 화제가 자신에게 향하자,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고 짧은 한숨을 내쉰 뒤 비로소 입을 열었다.
“퀴나스예요. 저는…… 그게…… 아무래도, 제가 뭔가 특별한 힘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정작 저 자신은 아직도 그게 잘 안 믿겨서…… 으으, 소아레스, 대신 설명해주면 안 돼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다 설명할 테니 기다리라고.”
“어떻게 보고만 있어요? 적어도 당신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자이안 님’이 어떤 사람인지 정도는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죠.”
“퀴나스 님은 오해하기 쉬운 언동을 하시는군요. 저는 자이안 님을 제가 평생 모실 주인으로서 인정하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 마음을 ‘좋아한다’라는 표현으로 뭉뚱그리는 건 다소 무례한 언동이 아닐지…….”
“아아, 정말. 알았어요. 제가 생각 없이 말해서 미안해요.”
말만 들어서는 꽤나 험악한 사이인 것 같지만, 정작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는 편하고 자연스러웠다. 법왕국을 벗어나 보석탑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친해진 모양이었다.
동시에, 퀴나스라 불린 여성이 법왕국 측 피해자들의 대표로서 행동하고 있으리라는 사실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 위치가 아니라면 소아레스와 개인적으로 친해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퀴나스 님은 신성술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 말로는, 평범한 농가의 자식이며 당연히 사제 서품도 받은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선천적인 자질인 것 같습니다.”
「음? 그건 이상한데.」
소아레스의 설명에 프레이가 인상을 쓰며 팔짱을 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소아레스에게 자이안이 대신 말을 전했다.
“프레이 님? 어떻게 이상하다는 건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자이안에게 허가를 구한 소아레스가 펜던트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직접 물었다.
「전에 법왕국에서 사자로 찾아온 수도사제를 마안으로 보고 분석해 봤다. 마법사는 많이 봤지만 사제를 직접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으니까.」
프레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쪽 세계의 마법은 자질이 없으면 익힐 수 없는 까다로운 기술이지만, 신성술은 그보다도 한술 더 뜨더라고. 제아무리 대단한 자질을 가졌어도, 이미 신성술을 쓸 줄 아는 다른 누군가가 힘을 불어넣고 통로를 개척해주기 전까지는 가장 기본적인 치유술조차 사용할 수 없다. 바로 그게 법왕국에서 말하는 ‘서품’이겠지.」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서품도 받지 않고 신성술을 사용하는 퀴나스는 있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의 사정이 사실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거나.
“제가 단어 선택을 잘못했군요. 퀴나스 님이 사용할 수 있는 건, 엄밀히는 ‘신성술’이 아니라 ‘백마법’입니다.”
그러나 소아레스는 그저 가볍게 탄성을 터뜨리고는 자기 말을 정정할 뿐이었다.
「……뭐?」
네 각성자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그건…… 그게 더 이상한데?」
「자이안, 절 소환해줄래요? 한 번 확인해봐야겠어요.」
「잠깐. 나도 직접 봐야겠다.」
급히 프레이와 유민이 소환되었다. 퀴나스는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둘을 보며 화들짝 놀랐다. 소아레스가 간략하게 설명해 그녀를 안심시켰으나 두 눈에 깃든 경계의 빛을 완전히 꺼뜨리지는 못했다.
검증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프레이가 마안을 열고, 유민이 MP를 일으켜 퀴나스의 몸을 한번 슥 훑었을 뿐이다. 퀴나스는 느끼지 못했지만, 유민의 MP가 접촉한 순간 그녀의 내면에 자리 잡은 아주 작은 힘의 덩어리가 반응을 보였다.
“……이게 왜 진짜냐?”
마안으로 직접 봤음에도 불구하고 쉬이 믿지 못한 프레이가 몇 가지 방법을 더 시도했다. 그럴 때마다 퀴나스의 표정이 점점 더 안 좋아졌다. 마침내 그녀가 뭐라 한마디 해야겠다고 결심했을 즈음에야 프레이는 간신히 현실을 받아들였다.
“너 진짜 농가의 딸이냐? 사실 고위 사제가 숨겨둔 첩이나 딸 같은 게 아니고?”
“아니라고 했잖아요! 소름 끼치는 말 하지 말아 줄래요?!”
“나는 네 존재 자체가 소름 끼친다…….”
현상이 존재하는 이상 원인도 존재할 터였다. 크룩스가 가설을 제시했다.
「제 생각은 두 가지 정도예요. 선조로부터 이어진 격세유전이거나, 본인도 모르는 외부의 영향으로 각성하고 말았거나.」
“둘 다 이상한데.”
「성유물의 영향 아냐? 그거, 아마 아티팩트인 것 같은데에.」
생각지도 못한 아르스의 말에 프레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일리가 있는데요. 저쪽 사람들도 자질과 계기만 있으면 각성할 수 있다는 건 이미 유리아를 통해 증명되기도 했고. 아, 이젠 소아레스도 각성자죠?」
소아레스 역시 각성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퀴나스를 관찰하기 위해 소환된 프레이의 마안에 의해 밝혀졌다. 유리아와 비슷한 경위였다.
하필 각성자로서의 힘에 눈을 뜬 장소가 법왕국의 수도였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이봐, 너. 혹시 성유물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냐?”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계속 말했잖아요! 전 그냥 농부의 딸이라고요!”
“아니, 모르면 모르는 거지 왜 화를 내?”
“그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달라붙어서 이상한 질문을 해대는데 화가 안 나게 생겼어요?”
가시 돋친 불평에 프레이는 황망히 입을 다물었다.
「성유물이 선주 인류 시대의 유산이 아닐까요?」
크룩스의 추측은 그럴듯했다. 지금 인류와는 달리 선주 인류는 MP를 매우 능숙하게 다뤘으니까.
지구에서는 일부 강력한 아티팩트에 각성을 재촉하는 효과가 있다고 밝혀지기도 했다. 선주 인류가 남긴 유산이 퀴나스의 각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게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다.
“상황이 아주 걸작이구만. 진짜 자질을 가진 각성자는 법왕국을 도망쳤는데, 정작 그 나라에서는 고위 사제니 성녀니 하는 가짜들이 떵떵거리며 돌아다니는 꼴이라니.”
「어? 프레이 형…… 잠깐…… 바로 그거예요!」
갑자기 크룩스가 뭔가 깨달은 듯 크게 손뼉을 쳤다. 가만히 듣고 있던 자이안도, 프레이를 비롯한 각성자들도 영문 모를 표정을 했다.
「저쪽은 가짜. 여기 있는 퀴나스 양이 진짜. 성유물의 힘에 휘둘린 저쪽 성녀는 가짜. 성유물의 힘을 받아들여 진정한 성녀로 각성한 퀴나스 양이 진짜.」
“……!”
한발 늦게 프레이도 크룩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았다. 프레이는 자이안과 유민, 유리아, 퀴나스, 소아레스 등 자리에 모인 이들을 한 차례씩 돌아보며 급히 설명을 시작했다.
“우린 지금 명분을 손에 넣은 거다. 타락한 법왕국의 마수에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고 진정한 힘에 눈 뜬 성녀라는 아주 강력한 명분을!”
그쯤 되자 다른 이들도 그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저쪽이 제아무리 정신 나간 광신도라도, 아니, 광신도이기 때문에 더욱, 성녀라는 이름 앞에는 약해질 수밖에 없을 거다.”
한 번 더 일행들을 돌아보며, 프레이는 확신에 차 고개를 끄덕였다.
“잘만 이용하면…… 전쟁을 확실하게 끝낼 수 있단 소리지.”
“저기요. 잠깐만요.”
퀴나스가 당당하게 손을 들었다.
“전 그런 역할을 맡겠다고는 한마디도 한 적 없는데요.”
“뭐어어?”
프레이는 맥이 빠진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퀴나스는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지금 저보고 성녀인 척하고 전쟁터로 나가라는 소리 아니에요? 가서 우리나라…… 그래요, 당신 말대로 정신 나간 광신도들 앞에 서서 그 사람들을 설득하라고?”
“‘성녀인 척’이 아니에요. 진짜 성녀가 되는 거죠.”
조용하던 유민이 말을 꺼냈다.
“퀴나스의 재능은 진짜예요. 제가 제대로 가르치고, 실전 경험을 충분히 겪으면, 몇 년 안에 저와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올 수 있을 거예요.”
유민 역시 각성한 지 몇 년 만에 두각을 드러내며 삽시간에 영웅의 위치에 오른 재능의 덩어리였다. 백마법에 치우친 각성자 특성 때문에 주목을 덜 받았을 뿐, 성장 속도는 전성기의 나이아보다도 더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녀의 말에는 충분한 설득력과 무게감이 있었다.
“퀴나스. 당신이 유일한 희망이에요. 만약 당신이 없으면…… 뭐, 물론 그래도 힘으로 어떻게든 전쟁을 멈출 수는 있겠지만, 적지 않은 피가 흐르게 되겠죠. 대부분 죄 없고 억울한 사람들의 피일 거예요.”
퀴나스는 입술을 깨물며 침묵했다. 갈등하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저는…… 그럼 저는요? 저도 죄 없고 억울한 사람이라고요. 제가 섣불리 전쟁터에 나섰다가 죽기라도 하면, 그땐 어떻게 책임질 건데요?”
“절대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 걱정 마라. 넌 털끝 하나 다치는 일 없을 거다. 애초에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한 번이면 충분할 거고. 우릴 믿어.”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딨어요? 제가 뭘 보고 당신들을 믿어야 되는데요?”
“한 번 세계를 구한 영웅이라는 사실? 아, 자이안 이 녀석도 이래 보여도 나라를 두 번 정도 구하기도 했지. 공화국하고, 제국하고.”
퀴나스에게는 그 모든 말이 허무맹랑하게만 들렸다. 애초에, 법왕국에 납치당하기 전만 하더라도 아무 직위도 없는 평민이었을 뿐인 그녀에게 성녀가 되어 전쟁을 멈추라느니 하는 건 너무 막중한 책임이었다.
“퀴나스 님. 제 말이라면 믿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소아레스도 내게 성녀가 되라느니 전쟁터에 나가라느니 하는 소릴 할 셈이에요?”
“전 당신 가까이서 함께 지내고,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당신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해낼 겁니다.”
퀴나스는 와락 인상을 썼다. 모두의 시선으로부터 도망치듯 고개를 돌리며, 그녀는 힘겹게 말했다.
“생각할 시간을 좀 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