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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몰락(2) (80/210)


80화 몰락(2)
2022.12.22.


“이건 말도 안 돼.”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처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힘없는 목소리였다. 헤이젤의 마법에 지배당하고 있던, 그러나 애초부터 자이안과 적대를 결심한 파벌의 원로교수였다.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던 구조의 끈이 눈앞에서 먼지가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헤이젤의 계획은 무너졌고, 졸트는 파렴치하게도 탑을 배신해 제 발로 협상 재료들을 갖다 바쳤다.

설상가상으로, 대화가 통하지도 않고 이성도 없는 단순한 괴물에 불과한 실험체들이 인간으로 돌아왔다. 탑이 지금껏 주변 마을에서 사람들을 납치해 온갖 끔찍한 실험을 벌였음을 증언할 수 있는 이들이 생긴 것이다.

‘아니다. 이렇게 끝날 리가 없어. 지금이라도 저 소년을 죽이면…….’

그의 특기 분야는 마법의 은닉이었다.

그가 작정하고 마법의 발동을 숨기면 다른 원로교수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만큼 마법의 위력은 다소 약했지만, 그래도 모두가 방심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년 한 명을 죽이는 데에는 충분했다.

그는 짐짓 절망에 빠진 듯한 표정을 유지하며 마법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네놈들이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인지는 내가 알 바 아냐.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어차피 어디 내놓기도 부끄러운 수준의 마법사일 게 뻔하고. 그래도 하나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있다.”

심장에 깃든 마력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되면, 네놈들은 그저 힘없고 시대착오적인 늙은이들에 불과하다는 거지.”

팔짱을 낀 프레이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마안을 통해 MP를 포함한 모든 에너지의 흐름을 읽고 그에 개입할 수 있는 프레이에게, MP의 하위호환에 불과한 마력의 흐름을 지배하는 것은 숨 쉬는 것만큼이나 간단한 일이었다.

“근방의 모든 마력의 흐름을 동결시켰다. 흠,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것 같으니 더 쉽게 풀어 말해주지. 지금 네놈들의 심장에 깃든 마력, 그걸 언제든지 쾅 터뜨려서 네놈들을 끝장내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나,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분명한 현실이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고 발버둥을 치던 원로교수들의 표정이 이번에야말로 절망으로 물들었다.

사실 프레이로서는 이런 상황 자체가 많이 봐준 것이었다. 만약 자이안이 아닌 프레이가 이 일의 당사자였더라면 이미 한참 전에 모든 마법사들을 죽여버리고 탑을 흔적도 없이 무너뜨렸을 것이다.

그러나 프레이는, 그들을 그냥 죽여버릴 것이 아니라 피해자와 대면시켜 제대로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한다는 자이안의 사상에도 공감했다.

설령 그들이 죽을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 판결을 내리는 것은 피해자여야만 한다. 제3자에 불과한 자이안 일행이 멋대로 그들을 단죄한다면, 이는 피해자의 권리를 빼앗는 주제넘은 행동에 불과하다.

‘흥. 늙은이들이 운이 좋았던 거지. 하지만 피해자들에게의 속죄를 끝내고 나면, 그 뒤에는 피해자조차 남지 않은 다른 죄에 대한 심판도 받아야 할 거다.’

속으로 칼을 가는 프레이와는 대조적으로, 아르스는 펜던트의 백업을 받아 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어 희희낙락하며 특별한 아티팩트를 제조하고 있었다.

프레이의 마력 동결은 완벽하지만, 딱 하나 단점이 있다. 그 상태를 유지하려면 프레이가 계속해서 소환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됐다! 이름은…… 음…… 대충 목줄이라고 부르지 뭐.”

얼마 지나지 않아 시범형 아티팩트가 완성됐다. 투박한 금속제 목걸이처럼 보이는 아티팩트는, 프레이가 마력을 동결시킨 메커니즘을 고스란히 구현해 담은 것이었다.

아티팩트를 장착한 마법사는 체내의 마력이 얼어붙어 두 번 다시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게다가 착용자의 마력을 멋대로 빨아들여 영구적으로 작동하며, 역시 착용자의 마력을 이용해 목에 달라붙기 때문에 절대 벗을 수 없다.

“자, 꼬마 마법사니임. 내가 주는 특별한 선물이야.”

눈이 마주치자 헤이젤은 입술을 떨며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기계 다리들은 가차 없이 헤이젤의 목에 목줄을 걸었다.

착용자의 마력을 감지한 아티팩트가 즉시 작동을 시작하며 목을 강하게 조여들었다. 눈을 빛내며 아티팩트가 정상 작동하는지 확인하던 아르스는 곧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라……. 구속력이 너무 강했나?”

“켁……! 케헥! 푸, 풀어줘! 수, 숨을 못 쉬겠어……!”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이. 해제 수단은 아직 안 만들었는데.”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헤이젤의 모습이 급격하게 변했다. 몸이 커지며 머리카락이 하얗게 새고, 피부가 급격하게 생기를 잃었다.

목둘레도 두꺼워졌고, 목줄은 당연히 더 세게 조여들었다. 심장에 깃든 마력의 영향으로 노화가 늦어졌을 뿐인 다른 마법사들과 달리, 헤이젤은 마법으로 직접 자신의 육체를 재구성했다.

마법이 풀리자 그 몸이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끄으으윽…… 제, 제발……! 내, 내가 잘못했……!”

채 말을 끝까지 마치지도 못하고 헤이젤은 바닥에 쓰러져 가늘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마법을 잃고 어린아이의 모습도 아니게 된 그는 프레이의 말대로 힘없는 노인에 불과했다.

아르스는 그 모습을 무덤덤하게 내려다보며, 아티팩트의 개선점을 머릿속에 정리한 뒤 다시 아티팩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죽이려고요?”

아르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크룩스가 물었다. 힐난하는 투는 아니었다. 단순히 아르스의 의사를 확인하는 물음에 불과했다.

“저거 정도는 죽여도 상관없지 않을까? 작정하고 자이안을 적대했잖아. 피해자들을 인질로 쓰려고도 했고.”

“자이안이 알면 좀 그렇지 않을까요?”

“자이안도 이해해줄 것 같은데에. 어차피, 이제 손 쓰기엔 너무 늦어버렸고.”

헤이젤의 안색이 시꺼멓게 죽어가기 시작했다. 산소 공급이 차단된 뇌세포가 괴사하기 시작한 지 이미 제법 시간이 지났다.

이제 와서 구속을 풀어낸다 하더라도, 유민이 직접 치료를 하지 않는 이상 되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유민이 나서도 불가능할 것이고.

“……누나가 이렇게 화내는 거 오랜만에 보네요.”

“자이안은 너무 착하잖니. 우리가 이렇게라도 대신 화를 내줘야 하지 않겠어?”

“하핫.”

크룩스는 대답 대신 짧게 웃을 뿐이었다. 그도 결국은 아르스와 같은 심정이었다. 자이안의 의사를 존중해 참고 있었을 뿐. 자이안에게 한 소리 들을 걸 감수하고 대신 나선 아르스가 차라리 고마웠다.

“다른 마법사는 몰라도 저건 살려두면 안 될 것 같더라구우. 살아만 있으면 어떻게든 발버둥 치면서 뒤통수를 노릴 성격이라고 해야 하나.”

“아……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하긴, 화근은 눈에 띄었을 때 바로 잘라야죠. 암 걸리기 싫으면.”

헤이젤을 직접 마주한 건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아르스의 통찰력은 정확했다. 이쯤 되자 크룩스도 아르스의 결단이 옳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보다시피, 치유는 완벽해.”

한편, 벽 안쪽에서는 자이안과 유리아, 그리고 졸트가 치유된 희생자들에 대한 유민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럼 저분 옆구리에 튀어나온 거미 다리는 뭐예요?”

유민은 가슴을 치며 호언장담했으나, 정작 희생자들은 ‘완벽’이라고 표현하기엔 애매한 상태였다. 거의 대부분이 멀쩡한 인간의 모습이었지만, 신체 어딘가에 마물의 조직 일부가 남아있는 이들이 많았다.

“그건 일부러 남겨놓은 거야!”

“네? 저걸 뭐하러?”

“그, 그건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은인 님.”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감정을 참지 못해 눈물을 쏟고 있던 희생자 중 한 명이 황송해하면서도 나섰다.

“이건…… 증거입니다. 저희가 마법사들에게 몹쓸 짓을 당했다는, 마법사들이 결코 발뺌하지 못하는 증거.”

“…….”

생각지도 못한 얘기에 자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설득력이 있었다. 그들을 정말로 흔적도 없이 완벽히 치료해 버리면, 마법사들은 아예 자신들은 사람을 납치해 실험한 적이 없다고 잡아뗄지도 몰랐다.

“물론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말끔히 고쳐주셨습니다. 여기, 이 친구처럼요.”

아주 훌륭한 판단이었다. 황망히 고개를 끄덕였다가, 자이안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면 혹시…… 여기서 당한 일들도 모두 기억하고 계신 건가요?”

“예.”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겪은 고통, 스스로가 세상에서 사라져버리는 것만 같은 끔찍한 두려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다.”

그의 눈이 검은 불꽃으로 일렁였다.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깊은 증오에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은인께서 불편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죗값을 치를 이들은 따로 있으니까요. 예를 들면…….”

남자는 그 모든 감정을 가슴 속에 갈무리했다. 한 차례 졸트에게 시선을 던진 뒤, 그는 다시 자이안을 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지었다.

“저는 페시스 카펜트리라고 합니다. 탑의 녹을 받아먹고 살던 보잘것없는 상인의 자식……이었지요. 은인 님의 이름을 들을 수 있을까요?”

“자이안 알코스예요. 이쪽은 유리아 알즈레드, 여러분들을 구출해주셨어요. 이쪽은 유민…… 최…… 최유민, 여러분들을 치료해주셨어요.”

페시스라 이름을 밝힌 남자는 유민과 유리아에게도 한 차례 깍듯하게 인사했다. 반면 졸트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는 양 무시했다.

자이안은 그 사실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자이안 역시 졸트는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저희들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이안을 향해 그는 깊이, 아주 깊이 허리를 숙이며 진심으로 감사를 전했다.

* * *

희생자들을 모두 구하고, 치료해준 뒤로 며칠이 지났다.

사실은 당장에라도 전장으로 향하고 싶었다. 그러나 보석탑에서 할 일이 아직 남아있었다.

헤이젤에게 찬동하지 않아 운 좋게 화를 피한 원로교수들도 제압해야 했고, 정교수 이하 마법사들에게도 원로회가 제압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아직 탑의 더러운 부분에 물들지 않은 연수생들의 처우도 결정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의외로 두각을 드러낸 이는 바로 졸트였다. 그가 적극적으로 나서준 덕분에 반항을 결심했던 마법사들도 구심점을 잃고 금세 흐지부지되었다.

자이안 일행만으로 마법사들을 설득하려면 적지 않은 마찰이 일어났으리라. 어쩌면 많은 피가 흘렀을지도 몰랐다.

「일찌감치 힘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어떻게든 목숨이라도 부지하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 솔직해서 좋구만. 호감 가는데?」

피식 웃은 프레이가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뭐, 그렇다고 용서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저도 마찬가지예요.”

입으로는 동의하면서도, 자이안은 사실 조금 갈등하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졸트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죗값을 치를 때 치르더라도, 어느 정도는 참작을 해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약해지지 마라, 자이안.」

미세한 표정 변화만으로 그의 내심을 대충 읽어낸 프레이가 단호하게 충고했다.

「그 늙은이는 결정적으로 여기가 달라, 여기가.」

프레이는 자기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가리키며 말했다.

「그 늙은이는 지금 어떻게든 너한테서 호감을 사서 목숨이라도 구하려고 발악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 머릿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 그 썩어빠진 사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단 말이다. 언제 한 번 날 잡아서 그 늙은이랑 한 번 희생자들에 대해 얘기를 해봐.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되는 인종이라는 걸 바로 알게 될 거다.」

자이안은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이의 사람 보는 눈을 믿었다.

그리고 탑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정리되고, 슬슬 전장의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는 방침에 모두가 동의했을 무렵.

“자이안 님, 유리아 님!”

그야말로 절묘한 타이밍에, 마침내 소아레스가 여성들로 이뤄진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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