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몰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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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몰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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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몰락(1)
2022.12.21.
소아레스가 보낸 소식은 낭보라 할 만했다. 법왕국이 납치한 성녀 후보들을 모두 구해 탈출했다는 것이다. 성녀 양산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된 지금, 법왕국의 기세 역시 크게 꺾일 것이 자명했다.
“이걸 계기로 정전 협상이 진행된다면 좋을 텐데…….”
「글쎄다. 어제 그 수도사제의 꼬라지를 봐선 아무 망설임 없이 또 자국민을 납치해 세뇌할 것 같다만.」
프레이의 추측은 비관적이지만 정확했다. 일행들도 그 말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소아레스의 연락을 받은 뒤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이른 아침. 자이안은 케이와 함께 희생자들이 머물고 있는 거점으로 향했다.
그들의 정확한 상태를, 그리고 유민이 행한 치료의 경과 역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유리아는 이미 유민과 함께 한발 앞서 거점으로 향한 뒤였다.
「우리도 슬슬 거점을 옮기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언제까지고 보석탑에 신세만 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으응? 어차피 공짜로 주는 건데 마다할 필요 없지 않을까아?」
「탑과 저희는 사실상 적대관계나 마찬가지잖아요? 원로회도 지금에 와서는 저희를 좋게 보고 있지 않을 겁니다. 저쪽에서 무언가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도 몰라요. 예를 들어보면…….」
그때 갑자기 자이안이 걸음을 멈췄다. 거점의 입구에 일단의 무리들이 모여 있었다. 원로회에서 몇 번 본 마법사들도 있었고, 원로교수보다는 한참 젊어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유리아는 단검을 쥔 채 그들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어라, 이거…… 하핫.」
크룩스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예시로 들려고 했던 일들이 일어난 것 같네요.」
“지금 웃을 때가…… 서둘러야겠어요.”
자이안은 걸음을 재촉해 그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따끔따끔하게 날이 서 있던 분위기가 와해되고, 그를 알아본 마법사 몇몇이 숨을 삼켰다.
“자이안! 벌써 왔어?”
유리아가 반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자이안은 마법사들의 면면을 한 차례 쭉 살펴본 뒤 유리아에게 물었다.
“이 사람들은 다 뭐예요?”
“실험체들을 돌려받고 싶대. 우리 때문에 중단된 연구가 한두 가지가 아니라면서.”
자이안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유리아조차 깜짝 놀라며 입을 가렸다. 자이안은 유리아의 곁에 서서 마법사들을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들의 요구는 들어줄 수 없어요. 돌아가세요.”
“호오? 괜찮겠어, 소년?”
대표인 듯 보이는 마법사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반문했다. 어제 원로회에서도 본,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이질적인 마법사였다.
자이안은 눈을 가늘게 뜨며 펜던트를 쥐었다. 만약에라도 그들이 힘으로 희생자들을 데려가려 한다면, 그때는 자이안도 더는 참지 않을 것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헤이젤 교수?”
“어라? 내 이름을 알아?”
“어제 회의 중에 들었으니까요. 원로회의 일원들은 모두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고 있어요. 그러니 허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오오, 무서워라. 마냥 순수한 어린애인 줄 알았는데 협박도 할 줄 아네?”
헤이젤이 손뼉을 치며 장난스럽게 감탄했다. 자이안은 헤이젤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다시 한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경고합니다. 돌아가세요.”
“정말? 정말 돌아가도 괜찮겠어? 아직 너희들이 구하지 못한 실험체들이 우리 손에 있는데?”
“…….”
자이안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헤이젤의 말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남은 희생자들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
“자이안, 괜찮아.”
유리아가 옷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안심시키는 듯한 그 목소리에 자이안은 정신을 차리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한 차례 마법사들의 눈치를 보고, 유리아는 펜던트를 붙잡고는 통신 기능을 응용한 텔레파시로 자이안에게만 말했다.
-남은 희생자들이 어디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어. 내가 여기서 마법사들을 붙잡고 시간을 끌게. 자이안 너는 요구를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희생자들을 구해줘. 위치는 알려줄 테니까.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나쁘지 않지만…… 어딘지 미적지근하게 느껴졌다. 굳이 그렇게 몰래 일을 진행할 필요가 있을까? 자이안은 잠시 생각해본 다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포칼립스. 데우스 마키나. 아틀라스.”
펜던트가 연달아 환한 빛을 쏟아냈다. 놀란 마법사들이 반사적으로 마법을 쏘아냈다. 그러나 빛 속에서 걸어 나온 프레이가 장갑을 낀 손을 가볍게 휘젓자 마치 바람에 휩쓸린 먼지처럼 힘없이 흩어졌다.
“뭐 하고 있어! 당장 반격해! [망설이지 마! 지금 저 소년이 먼저 우리를 공격했잖아!]”
헤이젤이 짐짓 다급하게 소리쳤다. 마법이 실린 그 목소리가 마법사들의 귀에 닿은 순간, 겁먹은 채 주춤주춤하던 그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다른 원로교수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좁은 복도에 파괴적인 폭풍이 휘몰아쳤다.
“하하핫. 환영 인사가 격렬하네요.”
크룩스가 가볍게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자이안을 노리고 쏘아진 온갖 살상마법이 무방비하게 선 그에게 부딪쳤으나, 어느 것 하나 그의 피부에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나이스 탱킹. 그럼 나도 느긋하게 분석을 해볼까아.”
백팩으로부터 뻗어 나온 기계장치의 다리들이 가차 없이 마법사들에게 쇄도했다. 헤이젤은 흠칫 놀라며 물러났고 대신 근처의 마법사 한 명이 그를 몸으로 지키려는 듯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정작 다리들은 헤이젤을 무시하고 다른 원로교수들의 정수리에 꽂혔다.
“예상한 대로, 정신 지배 마법의 영향을 받고 있네. 교만이나 음욕이 쓴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어설프지만…… 헤에. 나름대로 머리를 썼는거얼. 미리 대상의 머릿속에 마력의 씨앗을 심고, 이걸 매개체로 지배력을 강화시키는 거구나.”
원로교수들의 정수리에 깊이 꽂혀 있던 바늘이 아무렇지도 않게 뽑혀 나왔다. 바보처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그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깜짝 놀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야? 여기 어디야?”
“으윽, 머리가…… 젠장. 내가 어제 술이라도 마셨던가?”
아르스의 행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기계장치의 다리들이 공중에서 복잡하게 얽히며 마치 아티팩트의 회로를 연상케 하는 문양을 그렸다.
아르스가 MP를 흘려보내자, 문양이 정신 간섭을 차단하는 강력한 파동을 방출하기 시작했다.
“지, 지배의 싹이……!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당장 그만둬!”
급변하는 상황에 헤이젤이 다급하게 소리쳤으나, 이미 모든 마법사들이 정신지배 마법의 영향을 벗어난 뒤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강제로 정신지배에서 풀려난 탓에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마법사들이 적대적인 시선으로 헤이젤을 노려보고 있었다.
“교만과 싸운 뒤부터 정신 간섭 대책은 꾸준히 연구하고 있었거든. 이제 와서 이런 어설픈 정신 간섭에 애를 먹을 수야 없지이.”
헤이젤에게는 불행한 얘기일 테지만, 상성이 극단적으로 나빴다고밖에 할 수 없으리라. 물론 헤이젤이 정신지배가 아닌 다른 마법이 특기였다 해도 결국 오래지 않아 제압됐겠지만.
“자, 그렇게 됐으니 얌전히 있으렴, 꼬마 마법사니임.”
“꼬마라고? 하, 이 모습은 상대를 방심시켜 수월하게 정신지배를 걸기 위해 철저하게 계산된…….”
“응응, 알았어, 알았어. 그런 건 됐으니까아.”
기계장치의 다리들이 헤이젤의 주위를 빈틈없이 포위했다. 손가락 하나라도 잘못 움직였다가는 날카로운 바늘이 가차 없이 박힐 정도였다. 온몸이 발가벗겨진 기분에, 헤이젤은 이를 갈며 분을 삼켜야만 했다.
“삼촌, 희생자들은요? 괜찮은 거겠죠?”
“잠깐만 기다려 봐라. 흠…… 괜찮다면 괜찮은데, 상황이 좀 묘하게 돌아가는데?”
아르스와 크룩스가 마법사들이 허튼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지켜보는 사이, 프레이는 유리아가 알려준 위치들을 중점으로 탑 전체를 마법으로 탐색하고 있었다.
희생자들은 마족과도, 일반적인 마물과도 이질적인 MP 패턴을 가지고 있으니 위치를 찾는 건 쉬웠다.
문제는 그들이 한곳에 머무르고 있지 않고 점점 이쪽으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자력으로 연구실에서 탈출했을 가능성은 낮다.
그렇다면 누군가 그들을 구출했음이 분명한데, 대체 누가? 프레이는 저도 모르게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나, 아르스, 크룩스, 최유민. 자이안, 유리아. 다 여기 있는데?”
“왜요? 무슨 일인데요?”
“잠깐 기다려 봐라. 더 정밀하게 탐색을 해봐야겠다. 위험한 상황은 아닌 것 같으니, 너무 걱정 마라.”
정신을 집중한 프레이가 다시 한번 마법을 넓게 전개했다. 곧 셀 수도 없이 많은 정보가 그의 머릿속에 해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필요 없는 정보들을 걸러내며 탐색 망을 가다듬은 끝에, 마침내 구출된 희생자들을 이끄는 이가 누군지 전모가 밝혀졌다.
“푸하하하!”
프레이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까, 깜짝이야. 삼촌, 또 왜 그러세요?”
“어? 그게 그러니까…… 아니, 이걸 내 입으로 말해주면 재미가 없지. 저쪽에서 조만간 여기로 올 테니, 네 눈으로 직접 봐라. 크하하, 이거 진짜 걸작이네.”
“……?”
영문을 모른 채 인상을 쓰면서도, 자이안은 프레이의 말을 따라 기다려 보기로 했다. 프레이가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실없는 장난을 칠 성격은 아니었으니.
“오, 이런. 내가 혹시…… 아아. 다행히 너무 늦지는 않은 것 같군.”
복도 저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홱 돌아본 자이안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졸트였다.
그와 그의 파벌의 마법사들이, 탑에 남은 희생자들을 모두 이끌고 걸어오고 있었다.
“졸트 교수? 구하러 왔구나!”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헤이젤이 졸트를 보고는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정작 그는 그쪽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곧장 자이안에게 향했다.
헤이젤은 문득 뭔가가 터무니없이 잘못된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탑에 남아있던 실험체들…… 크흠, 아니, 피해자들을 마저 구해왔습니다.”
“졸트 교수…… 왜 이런 짓을?”
자이안은 의심이 섞인 시선으로 졸트를 노려보았다. 졸트 역시 반갑게 맞아주리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일단은 자신이 자이안 일행을 적대할 생각이 없음을 알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제가 더 이상 탑의 방침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탑을 배신하겠다는 건가요?”
“배신이라. 하하하, 애초부터 저희 원로회는 단 한순간도 아군이었던 적이 없었습니다만.”
넉살 좋게 웃는 그 모습에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수긍하고 말았다. 확실히, 지금까지 본 원로회의 모습은 서로가 서로의 적에 불과한 싸움판에 가까웠다.
“납득을 하지 못하시겠다면, 흠…… 글쎄요. 신물이 났다고 할 수도 있겠군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착각에 빠진 채 주어진 상황에 안주할 뿐인 원로회의 실태에 말입니다.”
“당신은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고요?”
“적어도 다른 원로교수들보단 낫다고 자부합니다. 적어도 당신과 싸울 생각은 깨끗하게 접었으니까요.”
말없이 졸트를 노려보다가, 자이안은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믿을 수는 없지만, 희생자들을 구출해 이리로 데려온 그의 행동은 분명 도움이 되었다.
“저기요. 자꾸 문 앞에서 시끄럽게 굴래요? 치료에 집중을 못 하겠잖아요!”
갑자기 벽이 미닫이문처럼 옆으로 스르륵 밀려나더니 유민이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식은땀에 젖은 채 짜증스런 표정이었다.
“유민 언니! 치료는 다 끝났어?”
유리아가 반갑게 말하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유민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흐흥. 날 뭐로 보는 거니? 당연히 완벽하게 끝났지. 이번에는 처음이라 치료에 시간이 걸렸지만, 덕분에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감을 잡았으니까 다음부터는 괜찮을 거야.”
문 안쪽의 광경이 드러났다. 자이안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각성자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웃었고, 마법사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이라도 본 듯 눈을 부릅떴다.
거기에 마물과 뒤섞인 흉측한 괴물의 모습은 없었다.
서로 부둥켜안으며 울고 있는 그들은, 틀림없는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