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평화를 향한 재정비(4) (78/210)


78화 평화를 향한 재정비(4)
2022.12.20.


“이렇게 다섯 명이 한자리에 모여서 처음으로 한 일이 이런 거라니, 어떻게 보면 재미있네요. 이 정도 전력이면 마족을 상대로 싸워도 반항조차 못 하게 흠씬 때려눕힐 수도 있을 텐데.”

“하, 마족이 아니라 마족 할애비가 와도 마찬가지일걸. 아니면 그…… 뭐더라, 찬탈자라고 했던가? 그놈이 여기 있었으면 지금쯤 아마 흔적도 못 남기고 불타버렸을 거다. 쳇, 아쉽게 됐군.”

“또 기회가 있겠죠. 자이안, 기분은 어때? 일단 검진 결과는 정상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조금 전에 느낀 감정들이 모두 꿈이었던 것만 같아요.”

자이안이 확신을 가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각성자들도 저마다 긴장을 풀었다. 커다란 고비를 하나 넘긴 기분이었다.

동시에, 각성자들은 직감했다. 이제 자이안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해질 수 있으리라.

“그보다, 이제 법왕국과 보석탑 사이의 전쟁을 막을 방법을 생각해봐야겠어요.”

“뭐? 괜한 짓 하지 말고 더 쉬어, 이 녀석아. 그런 건 내일 생각하면 돼.”

“삼촌. 저 괜찮다니까요? 게다가, 제가 이 일을 미루면 그만큼 전장에서 더 많은 사람이 죽어갈 거예요. 그걸 지켜만 볼 수는 없어요.”

“…….”

프레이는 팔짱을 끼고는 불편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자이안을 우려하는 만큼, 자이안의 우려에도 역시 공감하는 것이다.

“하핫. 프레이 형은 자이안한테는 진짜 약하네요.”

“뭐 인마? 약한 게 아니라 봐주는 거지. 그럼 내가 이 나이 먹고 스물도 안 된 꼬맹이랑 진심으로 아웅다웅해야겠냐?”

“그럼 전 왜 안 봐줘요, 아저씨?”

“봐주긴 뭘 봐줘? 신소리 말고 자이안 상태나 계속 보고 있어라. 저놈 저거 보기엔 멀쩡한 거 같아도 영향이 아주 안 남았을 것 같지는 않다.”

“그 정돈 저도 알거든요? 아저씨가 얘기 안 해도 알아서 할 거거든요?”

투덜투덜 볼멘소리를 하며, 유민은 손바닥에서 빛의 실을 뻗어 자이안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눈이 마주치자 자이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유민도 언제 투덜댔냐는 듯 헤실거리며 웃었다.

“전쟁을 멈춘다…… 가장 편한 건 어느 한쪽에 힘을 빌려주는 거다.”

분위기가 정리되고, 프레이가 먼저 화두를 꺼냈다.

“어차피 우린 저놈들이 무슨 수를 써도 감당할 수 없는 비대칭 전력이다. 아무 쪽에나 가세해서, 피해가 확산되기 전에 힘으로 쭉 밀고 들어가서 적진의 대가리를 따버리는 거지. 여기서 법왕국까지는 거리도 제법 되고, 우린 그 나라 지리도 잘 모르니까…… 이왕 이렇게 할 거면 법왕국 쪽에 가세하는 게 좋겠군.”

“자기 나라 국민들을 납치하고 약으로 세뇌해서 인간 폭탄으로 쓰려는 나라의 아군이 되라고요?”

“아니, 뭐…… 예시를 든 거다. 이게 가장 쉬운 방법이니까.”

“전 어느 쪽도 편들고 싶지 않아요.”

자이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프레이 역시 그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어깨만 한 번 으쓱했다.

“하하. 자이안이라면 그렇게 말할 것 같았어요. 그럼 남은 방법은 제3세력으로서 전쟁에 개입하는 것뿐이네요.”

“그래. 잘만 대응한다면 피해를 확실히 억제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대응을 잘못하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어. 가장 이상적인, 그래서 가장 어려운 방법이지.”

“제3세력…….”

자이안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자이안 측 전력은 각성자와 유리아, 지금은 없는 소아레스나 그녀의 부하까지 모두 합해도 열 명도 되지 않는다. 어느 쪽에도 가세하지 않고 양쪽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분명 어려운 일일 터였다.

“시작하기도 전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지. 하다가 안 될 것 같으면 방침을 바꿔도 된다. 전황을 보다 보면 더 좋은 방법이 발견될지도 모르지.”

긴 고민 끝에 자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본적인 방침을 정한 뒤, 일행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세세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어? 잠깐만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자이안이 문득 품속을 뒤졌다. 통신용 아티팩트가 반응하고 있었다. 소아레스와 연결된 아티팩트였다.

“소아레스에게 연락이 왔어요.”

여태까지는 소아레스는 통신에 거의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 자신의 상황을 단방향 통신만 며칠 단위로 짤막하게 행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아티팩트가 밝게 명멸하며 양방향 통신을 요청하고 있었다.

“소아레스? 자이안이에요.”

잠시 회의를 멈추고 자이안은 통신을 연결했다.

* * *

원로회실은 태풍이라도 한차례 지나간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탐사 마법을 특기로 하는 교수들을 모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곳까지 미궁 내부를 탐사했소. 미궁은…… 파괴된 게 맞소.”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원로회의 면면은 저마다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나마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이는 졸트 한 명뿐이었다.

아니, 평정을 유지하고 있다기보다는 여러 가지를 체념했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리라. 자이안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직접 그와 대면하며 그의 힘을 체감한 덕분에 다른 원로교수들보다 더 일찍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미궁도 미궁이지만, 법왕국은 어쩔 거요?”

“안 그래도 조금 전 전선에서 보고가 왔어. 상황이 상당히 안 좋아. 조교나 준교수 수준의 마법사만 가지고는 전선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모양이야.”

“이상한 일이군. 법왕국의 전력이 그렇게 강할 리가 없는데? 전선에 참여한 마법사들이 일을 대충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그저 우리가 그동안 착각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지. 적의 전력도, 우리 전력도.”

졸트의 말에 원로교수들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법왕국처럼 껍데기만 남은 나약한 나라를 상대로 자신들이 고전할 리가 없다고.

“현실은 적의 전력이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강하고, 이미 적지 않은 수의 마법사들이 전선에서 죽어 나갔다는 사실이오. 이대로 탁상공론만 계속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거요.”

“졸트 교수. 못 보던 새에 많이 비굴해졌구먼그래? 아니, 이제야 자기 주제를 알았다고 해야 하나?”

“흥. 그 미친 종교쟁이들이 나름대로 비장의 수단이 있는 모양이지.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우리가 잃은 건 별 것 아닌 일부에 불과해. 조교나 준교수들 따위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들이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미궁이 완전히 파괴된 지금 이 상황에, 조교들과 준교수들마저 모두 전장에서 죽어 나간 보석탑에 미래가 있다고?”

“인재야 어떻게든 모으면 그만 아닌가? 어차피 마법의 비의는 온전히 우리 손에 있는데.”

“미궁 자원을 이용할 수 없게 된 이상, 그만큼의 손해는 각오해야 할 거야. 어쩌면 탑의 규모를 줄여야 할지도 몰라.”

모든 원로교수들이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앞으로의 대책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 소년…… 자이안을 이용할 수 없을까?”

갑자기 누군가 그런 말을 꺼냈다. 상상도 못 할 소리에 졸트는 홱 시선을 돌렸다. 정신 장악 마법의 전문가, 헤이젤 아펠고그였다. 100살이 넘은 노령인데도 겉모습을 10대 중반의 아이처럼 유지하는 괴짜이기도 했다.

“죽고 싶은 거요?!”

졸트가 경기를 일으키며 소리쳤다. 그러나 정작 말을 꺼낸 헤이젤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는 표정이었다.

“왜? 괜찮은 것 같은데. 그 소년의 행동을 유도해 법왕국과 부딪치게 하면, 잘하면 양쪽 모두 자멸하지 않을까? 최고의 결과가 되는 거지.”

졸트는 뭐라 반론하려 했으나, 결국 입술을 꾹 다물며 긴 한숨만 내쉬었다. 저들은 용을 눈앞에서 보지도 못하고 자이안이 품은 힘을 직접 느껴본 적도 없으니 이런 허황된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졸트가 아무리 열심히 설득한들, 직접 체감하기 전까지는 생각을 고쳐먹지 않을 것이다.

‘그 힘. 몹시 사악하고, 거대한…… 그런 걸 이용하겠다고? 잡아먹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미궁을 파괴하며 지상에 올라온 자이안과 마주했을 때.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졸트는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용을 가까이서 보고 완벽이라는 개념이 생물로 구현된 듯한 아름다움에 숨이 막혔다면, 자이안을 보고는 사자의 앞에 선 개미가 되어버린 것만 같은 공포를 느꼈다.

왜 여태까지 그 힘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지 이상할 정도였다.

사실 그가 그때 느낀 거대한 힘은 자이안의 것이 아니라 자이안이 시기에게 받은 서클릿의 것이었다.

순수한 MP가 아니라 원죄의 감정으로 변질된 것이기 때문에, MP를 감지하지 못하는 졸트도 어렴풋하게나마 그 힘의 편린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제 그 힘은 온전히 자이안의 것이 되었으니 그의 두려움이 마냥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이 멍청한 늙은이들과 같이 행동하다가 나까지 휘말려 죽을 수는 없지. 이 회의 내용을 그대로 자이안에게 알려주면…… 난 좀 봐주겠지? 그랬으면 좋겠는데.’

졸트가 머리를 굴리며 살길을 궁리하는 사이에도 회의는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그들도 자이안이 아주 강한 힘을 가졌다는 것 자체는 알고 있었다.

다만 그 힘이 어디까지나 자신들이 상상 가능한, 통제 가능한 수준일 거라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소년이 실험체들을 꽤나 신경 쓰는 것 같던데.”

“음? 잠깐, 그러고 보니 유리아인가 뭔가 하는 여자가 멋대로 빼돌린 실험체들은 어떻게 됐지? 누구 보고 들은 거 있나?”

“그건 일단 저쪽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되찾아오는 거야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건 너무 안일한 생각 아닌가? 자칫 실험체가 밖으로 도망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럼 바깥세상에 정체불명의 마물이 한 마리 늘어날 뿐일세.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말게나. 이런 일은 예전에도 몇 번 있었네. 그때마다 별일 없었고.”

“싸우지 좀 마.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란 거 다들 알잖아?”

헤이젤이 가볍게 손뼉을 치며 어수선해지려는 분위기를 정리했다. 교수들은 헛기침을 하며 감정을 가라앉히고는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자, 다들 들어봐. 내 생각은 이래. 실험체 일부는 그 유리아라는 여자 손에 넘어갔지만, 아직 우리 쪽에 남은 실험체가 훨씬 많아. 그러니까 그 실험체들을 가지고 협박…… 으흠, 실례. 너무 폭력적인 말을 썼네. 그 실험체들을 가지고 협상을 하는 거야.”

“무슨 소린지는 알겠네만…… 과연 그게 뜻대로 될까? 불필요하게 그 소년의 심기를 자극해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고 본다만.”

“이봐. 아직도 날 몰라? 인간의 정신을 분석하고 심리를 장악하는 마법적인 수단에 대한 논문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게 바로 나야.”

원로회의 분위기를 장악하며, 헤이젤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잘 지켜보고 있으라고. 분명 내 말대로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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