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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평화를 향한 재정비(3) (77/210)


77화 평화를 향한 재정비(3)
2022.12.19.


“미안해요!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렸어요. 자이안 상태는 어때요?!”

문이 열리고 유리아와 유민이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그러다가 침대 위에 잠든 자이안의 모습을 보고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침대 맡에서 어설픈 백마법으로나마 자이안의 감정을 가라앉혀 주며, 프레이는 시선만 둘에게 향했다.

“겉보기엔 좀 괜찮아진 것 같기는 한데…… 속내가 어떤지는 본인만 알겠지. 아무튼, 왔으면 빨리 교대하자. 너도 알다시피 나 백마법 진짜 젬병이라고.”

“잠깐만요. 상태를 볼게요. 몇 분만 그대로 유지해 주세요, 아저씨.”

프레이의 푸념에도 유민은 냉정하게 지시를 내릴 뿐이었다. 프레이는 작게 혀를 한 번 차고는 얌전히 그 말에 따랐다. 평소에는 나잇값 못하는 어린애가 따로 없지만, 환자를 앞에 둔 유민의 판단은 그 누구보다도 정확하다.

‘세인트’라는 별명은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다.

“빨리 끝내라. 힘들어 죽겠다.”

“충분히 할 수 있으면서 엄살 피우지 마세요. 잠깐만요. 이건…….”

프레이의 옆에 선 유민이 두 손바닥을 자이안에게 향했다. 손바닥으로부터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더니 마치 실처럼 가닥가닥 흩어져 자이안의 온몸에 이어졌다.

빛의 실로부터 전해지는 정보를 통해 자이안의 신체적, 정신적 상태를 점검한 유민이 미간을 모았다.

“심한 착란 상태에 빠져 있어요. 이게 괜찮아진 거라고요?”

“그야, 뭐…… 적어도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이상한 소리를 하지는 않으니까.”

“무책임한 소리 하지 말아요! 지금 자이안은 분명 심한 악몽을 꾸고 있을 거예요. 서클릿이 원인이라고 했죠? 그럼 서클릿을 부수는 게 가장 빠르고 확실해요.”

프레이는 대답을 머뭇거렸다. 서클릿에 담긴 강력한 힘을 이대로 없애버리는 것은 아까웠다. 무엇보다도…….

“서클릿에는 자이안조차 강하게 영향을 받을 만큼 엄청난 양의 MP가 그대로 담겨 있다. 섣불리 파괴했다간 무슨 일이 터질지 몰라. 다른 방법은 없냐?”

“그러면 그냥 옆에 붙어서 괜찮아질 때까지 치료하는 것뿐이죠. 시간이 꽤 걸릴 거예요.”

육체적인 치료도 물론 그렇지만, 특히 정신적인 치료는 살얼음판을 건너는 기분으로 신중하게 행해야 했다.

“알았다. 내가 뭐 도와줄 건 없냐?”

“제가 치료를 하는 동안 마안으로 서클릿의 상태를 확인해 주세요. 어쩌면 자이안의 감정에 연동해 무언가 반응을 보일지도 몰라요.”

그리 말하고 유민은 곧장 자이안에게 온 신경을 쏟기 시작했다. 프레이 역시 마안을 열고 아주 사소한 변화도 놓치지 않도록 서클릿에 의식을 집중했다.

침묵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유리아는 조심스럽게 그들에게서 멀어져 케이의 옆에 앉았다. 케이가 천진하게 손을 흔들고, 유리아는 작게 웃으며 화답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친구는 괜찮을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 역시 네가 용이라서 그런 거야?”

“아하하. 용이라고 모든 걸 알 수는 없어. 그런 게 아니라, 친구가 저 시련에 꺾이지 않을 강한 마음을 가졌다는 걸 알고 있을 뿐이야. 너도 그렇지 않아?”

잠시 생각에 잠긴 유리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이안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역시 그는 잘 해낼 것이다.

“잠깐……. 최유민, 서클릿의 상태가 이상하다.”

침묵 속에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돌연 프레이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민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지금 치료를 멈출 수는 없어요.”

“하지만…… 이런 젠장!”

유민의 목덜미를 붙잡아 확 끌어당긴 프레이가 급히 손바닥을 내밀어 결계를 펼쳤다. 서클릿으로부터 쏟아져 나온 MP의 분류가 결계에 부딪쳐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서클릿으로 빨려 들어갔다. 프레이는 인상을 쓰며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염병을 하네, 진짜. 자동방어 시스템도 아니고 뭐야 대체?”

“아무래도 서클릿…… 그 안에 담긴 시기와 음욕의 힘은 자이안이 치료되는 걸 원하지 않는 것 같네요.”

“시기 그 놈, 터무니없는 폭탄을 선물이랍시고 넘겨줬구만. 하. 좋아.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최유민, 계속할 수 있지?”

“당연하죠. 절 뭘로 보는 거예요?”

두 사람은 다시 침대에 붙어 치료를 이어나갔다. 이후로도 비슷한 일이 여러 번 일어났고, 두 사람의 대응 역시 점점 더 노련해졌다. 그러나 시간이 늘어지는 걸 아예 막을 수는 없었다.

‘…….’

그리고 자이안은 선잠에 빠진 듯한 몽롱한 기분으로 둘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감각에 뿌연 안개가 낀 것 같았다. 둘의 목소리가 의미 없이 웅얼거리는 듯한 소리로만 들렸다. 그래도 둘이 자신을 걱정해주고, 자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당장 일어나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스스로의 상태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아직도 가슴 속에 거무튀튀한 감정이 자리를 잡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 감정은 내 것이 아냐.’

자이안은 마치 그 감정을 설득하려는 듯 속으로 말했다. 서클릿으로부터 조금씩 흘러들어오는 MP, 그 속에 섞인 탁한 흐름이 자이안의 정신에 간섭하며 멋대로 감정을 심고 있는 것이다.

‘대속자’의 힘은 그들이 짊어진 원죄의 감정 그 자체나 마찬가지다. 때문에 그 주인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지금도 수천, 수만 년 동안 쌓인 감정만이 아직까지 남아, 이제는 새로운 먹잇감을 찾고 있다.

‘시기가 그랬지.’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감정이 얼마나 강력하건 결국은 찌꺼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나라면 이 힘을 자기처럼 휩쓸리지 않고 잘 다룰 수 있을 거라고.’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감정과는 별개로 사고는 더없이 깨끗했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유민의 백마법이 자이안의 정신을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자이안은 냉정하게 대응책을 생각할 수 있었다.

‘서클릿을 부수는 건 삼촌 말씀대로 좋지 못한 방법이야. 이 힘이 아무 대책도 없이 세상에 풀려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을 거야. 가장 확실한 건…… 내가 이 힘을 모두 받아들이고,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거야.’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였다. 단순히, 서클릿에 담긴 MP가 너무 많았다. 그걸 전부 몸에 받아들였다간 지금보다 더 심각한 사태로 번질 가능성이 높았다.

‘이 힘이 내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완전히 격리시킨 상태로, 내가 수용할 수 있는 양만 조금씩 받아들인다면…… 그럼 될 것 같아. 그러면 이 힘을 어디다 격리시켜 놓지?’

자이안이 저도 모르게 펜던트를 붙잡았다.

‘가능할까? 가능할 것…… 같은데.’

명확한 근거는 없었다. 그러나 기묘한 확신이 있었다. 아르스를 필두로 한 지구의 기술자들이 온 힘을 쏟아 만들고, 거기에 나이아가 직접 개조를 거친 펜던트라면 분명 그 정도는 괜찮을 것이라는 믿음.

자이안은 천천히 눈을 떴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온 신경을 쏟고 있는 유민의 모습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유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 자이안? 다 나았어? 어? 아닌데?”

“아직 완전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유민 누나 덕분에 많이 괜찮아졌어요.”

“덜 괜찮으면 그냥 누워서 쉬어라. 괜히 힘쓰지 말고.”

“삼촌. 저한테 생각이 있어요. 아르스 님이랑 크룩스 형도 한 번 들어보시고 가능성이 있는지 판단해 주세요.”

자이안이 누워있는 동안 생각한 계획을 각성자들에게 전했다. 세 명은 아리송한 표정이었지만, 단 한 명 아르스는 확신에 차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생각이네. 한 번 해 보자.」

“뭐? 그러다 펜던트가 고장이라도 나면…….”

「펜던트는 그 정도로 고장 안 나. 원래부터 차원 도약 도중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변수를 버틸 수 있도록 튼튼하게 만들어진 데다가, 나이아가 여러 번 손을 대면서 내구성 하나는 나조차도 손도 못 댈 수준이 됐거든.」

아르스의 말은 단정적이었다. 넷 중 가장 아티팩트에 해박한 그녀가 그리 말하는데 더 이상 이견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거기에 있는 둘만 가지고는 안 되겠네. 자이안, 나랑 크룩스도 소환해 줘.」

「어라? 저도 필요합니까?」

「너랑 프레이랑 같이 힘쓰는 역할. 유민이는 자이안이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백마법 담당. 나랑 자이안이 같이 기술 담당. 다른 의견 있는 사람?」

모두가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곧 자이안이 아르스와 크룩스를 마저 소환했다. 평소였다면 넷을 모두 소환한 시점에서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텐데, 서클릿 덕분에 MP는 오히려 남아돌았다.

“그러고 보면…… 다섯이 이렇게 한자리에 다 모이는 건 이번이 처음인가?”

“저희 넷은 엄밀히는 아바타에 불과하지만 말이죠.”

“어떻게 보면 기념비적인 날이네에. 이따가 축배라도 들까?”

실없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각성자들은 막힘없이 자신이 맡은 역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르스가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시작하자.”

프레이가 서클릿을 붙잡았다. 마안으로 그 안에 휘몰아치는 거대한 힘을 꿰뚫어보고, 이윽고 그것을 바깥으로 강제로 끄집어냈다.

강대한 기운이 방안을 가득 채울 기세로 팽창했다. 그 순간 크룩스가 나섰다. 실체가 없는 기운을 맨손으로 붙잡은 그가 그것을 사정없이 바닥에 패대기쳤다.

“우와! 이거, 힘이…… 장난 아니네요! 월척이다, 월척!”

“농담이 나오는 걸 보니 아직 여유가 있는 모양이구만! 더 뽑아낸다!”

서클릿에서 더 많은 힘이 쏟아져 나올수록 자이안의 눈빛이 흐릿하게 탁해졌다. 유민은 자이안의 어깨에 손을 얹고 끊임없이 MP의 흐름을 살폈다.

환자와 자신의 MP 흐름을 완전히 일치시켜 환자의 상태를 자신의 몸처럼 면밀히 파악하고, 가장 알맞은 타이밍에 가장 알맞은 백마법을 건다.

이 계획은 자이안이 냉정한 정신상태를 유지해야만 성공할 수 있었다. 그녀의 어깨에 걸린 책임도 막중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애초에 용납할 생각도 없지만.

아르스는 백팩을 전개했다. 안경을 벗어 백의의 앞주머니에 넣고, 여러 갈래로 뻗은 기계장치의 다리들을 조종해 펜던트와 접속. 가상 윈도우를 통해 나타나는 정보들을 빠른 속도로 처리하며 펜던트 내부를 탐색했다.

“자이안, 펜던트에 대해서는 이제 네가 나보다 더 많이 알 거야. 지금 네가 다루기 힘든, 혹은 쓸모가 없는 기능들을 알려줘. 거기 들어가는 리소스를 돌려서 서클릿의 MP를 처리하는 데 사용하는 거야. 무슨 얘긴지 알겠니?”

“알 것 같아요. 한 번 해 볼게요.”

탁한 기운이 크룩스의 손아귀를 벗어나려 거칠게 꿈틀거렸다. 그 여파로 검은 기류가 흘러나오며 방 천장을 맴돌았다. 크룩스는 잠시 한 손을 들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은 뒤, 다음 순간 있는 힘껏 주먹으로 기운을 후려쳤다.

굉음과 함께 방 전체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서클릿의 힘을 뽑아내는 데 집중하고 있던 프레이가 확 인상을 썼다.

“야 이 미친놈아! 살살 좀 해!”

“하하, 괜찮아요. 이런 놈들은 원래 한 대 맞아야 얌전해지더라고요.”

얼토당토않은 소리 같았지만, 놀랍게도 서클릿으로부터 뽑혀 나오는 기운이 정말로 얌전해지기 시작했다. 프레이는 어이가 없어진 나머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영향은 자이안에게도 전해졌다. 그의 가슴속에서 들끓던 감정이 갑자기 잠잠해진 것이다. 절호의 기회였다. 유민은 재빠르게 자이안의 정신을 보호하는 강력한 결계를 펼쳤다.

허공을 맴돌던 검은 기류가 뒤늦게 자이안에게 쇄도했으나 유민의 두 손을 감싼 환한 빛에 부딪혀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우리도 거의 끝났어! 거의 다, 조금만 더…… 자이안, 지금!”

“삼촌! 크룩스 형! 이쪽이에요!”

자이안이 펜던트를 앞으로 내밀었다. 프레이가 서클릿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던 힘을 완전히 뽑아내고, 크룩스가 탁한 기운을 한 대 더 후려친 다음 그대로 자이안에게 던졌다.

펜던트와 기운이 맞부딪치고, 다음 순간 펜던트의 가운데 박힌 보석이 오로라가 일렁이는 듯한 찬란한 빛을 발했다. 빛에 집어 삼켜진 탁한 기운이 그대로 펜던트 안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

모두가 자이안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자이안 역시 펜던트를 두 손으로 감싸며 기다렸다.

프레이가 들고 있던 서클릿에 거미줄과 같은 균열이 번졌다. 이윽고 서클릿이 산산이 조각나 부서졌다.

“성공…… 한 것 같아요.”

진이 다 빠져버린 자이안이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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