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평화를 위한 재정비(2)
(76/210)
76화 평화를 위한 재정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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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평화를 위한 재정비(2)
2022.12.18.
「아하하하. 결국 최악의 상황이 됐네요.」
「지금 웃음이 나오냐?」
「그렇다고 울 수는 없잖아요? 자이안이 보고 있는데.」
「하아…… 염병할.」
각성자들의 대화를 흘려들으며, 자이안은 의외로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조금 놀랐다.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과연 그 상황을 맞닥뜨리면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불안했는데.
많은 여정을 거치면서 자신도 정신적으로 성장한 게 아닐까 싶었다.
“자이안, 괜찮을 거야.”
곁에 다가온 유리아가 조용히 말하며 자이안의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제야 자이안은 자신이 뼈가 삐걱거릴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너무 화내지 말자. 그보다는 같이 전쟁을 멈출 방법을 생각해 보자.”
부드럽게 말하며, 유리아는 자이안의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펼쳐 주었다. 반대쪽 손도 마찬가지였다. 자이안은 핏기가 빠져나가 새하얗게 변한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그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칠 것 같아요. 감정을 절제할 수가 없어요.”
“괜찮아. 잘될 거야. 우린 여태까지도 잘 해왔잖아?”
“아뇨. 그게 아니라…… 아니, 아니에요. 유리아 말이 맞아요. 전쟁을 멈출 방법을…… 생각해야…….”
스스로를 타이르듯 중얼거리며 자이안은 시선을 들었다. 법왕국의 사자로 찾아온 수도사제가 뭐라 떠들어대고 있었다. 마치 의미 없는 불협화음인 듯, 그 말뜻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짜증이 났다. 있지도 않은 권리를 찾으며 잇속을 챙기려 했던 원로 교수들도. 고장 난 태엽 장치처럼 성전이라는 말만 부르짖는 수도사제도.
“그래, 잘 알겠다.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겠다면, 우리 역시 너희 모두를 없애버리기 전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법왕국에 사자로 보낼 만한 인재가 당신 정도밖에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유감스럽소. 교황 성하께도 이 말을 꼭 전해주기를 바라오.”
수도사제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졸트는 지친 얼굴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참으로 무의미한 시간이었다.
아니, 법왕국의 맹목적인 의사를 확인했으니 마냥 그렇지만은 않을지도. 졸트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잠깐만요. 수도사제님.”
자이안이 탑을 떠나려는 수도사제를 불러세웠다. 그는 이건 또 뭐냐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성녀님은 잘 계신가요?”
“……뭐?”
“성녀 후보들께도 안부 인사 부탁드려요.”
영문을 모른 채 인상을 쓴 수도사제가 다음 순간 눈을 부릅뜨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당혹과 불안이 뒤섞인 눈으로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이를 악물고는 도망치듯 탑을 벗어났다.
「자이안. 마지막 그건 불필요한 소리였다.」
“……알고 있어요.”
「뭐? 알면서 왜 그랬는데?」
“저는, 그냥…… 아니, 하지만……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이안은 횡설수설 끝에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프레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자이안. 당장 방으로 돌아가라. 어서 침대에 쓰러져서 푹 쉬어.」
“유리아도 그렇고 삼촌도 그렇고…… 제가 그렇게 지쳐 보여요?”
「너 스스로가 느끼지 못할 정도면 진짜 심각한 거다. 큰일 터지기 전에 얼른!」
강경한 목소리에 자이안은 뭐라 반박하지 못하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졸트와 유리아를 비롯한 일행들이 객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자이안은 곧바로 유리아에게 다가갔다.
“미안해요, 유리아. 아무래도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 잘 생각했어!”
유리아가 손뼉을 치며 반색했다.
“아, 혹시 괜찮으면 가기 전에 유민 언니 좀 소환해줄 수 있어?”
「엥? 나?」
“희생자들을 보여주려고. 유민 언니는 백마법이 특기니까, 어쩌면 그분들을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아!」
생각지도 못했던 듯, 유민이 손바닥을 치며 탄성을 터뜨렸다. 백마법은 치유와 복원, 안정화 등을 기초로 하는 마법. MP 중독으로 인한 유전자 변이에도 통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좋은 생각이네! 당장 하자!」
“유민 누나도 괜찮다고 하네요. 저도 지금 MP는 남아도니까, 그럼…… 세인트.”
펜던트를 쥔 자이안이 작게 읊었다. 그 직후 다른 마법사들이 보고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으나, 이제 와서 뭐 어떠려나 싶었다. 어차피 저들은 자신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 벌레 같은 존재들인데.
“안녕! 유리아!”
“와아아! 유민 언니이!”
1층 로비 한 복판에서 두 사람이 서로 와락 얼싸안았다. 유리아는 각성자 모두와 살갑게 지냈지만, 그래도 가장 친한 이를 한 명 꼽자면 역시 성별도 같고 나이 차이도 가장 덜한 유민이었다.
“아참, 이럴 때가 아니지. 얼른 가자! 환자들을 치료해야지!”
“고칠 수 있을까?”
“나도 직접 봐야 알 거 같아. 하지만, 응. 성자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고쳐줄 거야!”
둘은 사이좋게 얘기를 나누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멍하니 있던 졸트는 제발 설명을 듣고 싶다는 표정으로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자이안은 그 시선을 무시하고 등을 돌렸다.
“얘기 들었죠? 전 올라가서 좀 쉴 테니까 귀찮게 굴지 마세요.”
자이안 역시 계단을 올라가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방 안은 고요했다. 얕은 숨소리만 희미하게 들렸다. 바닥에 드러누운 케이는 미동은커녕 숨소리조차 내고 있지 않았다. 본인 말로는, 이런 건 특기라고 했다.
“삼촌.”
잠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자이안은 천천히 눈을 떴다. 프레이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대답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푹 자라. 내일부턴 더럽게 바빠질 게 뻔하니까.」
“기분이…… 이상해요.”
「뭐?」
프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자이안의 두 눈이 마치 미치광이처럼 번들거렸다.
“감정을 절제할 수가 없어요. 계속해서 짜증이 나고, 이걸 지금 당장 아무렇게나 발산하고 싶어요.”
「……계속 말해봐라. 네가 지금 느끼고 있는 걸 빠짐없이 전부.」
크룩스와 아르스 역시 각자 트레이닝과 장비 점검을 멈췄다. 자이안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며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아까 본 마법사들이 너무나 역겨워요. 벌레 같아요. 당장 죽여 버려야 하는데, 왜 이 감정을 참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 건방진 수도사제도 마찬가지예요. 저런 쓰레기들이 대체 왜 살아있는 거죠? 그들이 살아있을 가치 따위는 없어요. 남의 생명을 짓밟고, 희생을 강요하는 저런 악인들은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돼요. 제가 죽여야 해요.”
「감정이 극단적으로 증폭되고 있군. 제기랄. 이걸 왜 여태까지 알아차리지 못했지?」
「원인이 있을 겁니다. 도저히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에요. 음…… 어쩌면…… 시기한테 받은 서클릿이?」
「……! 이런 젠장!」
프레이가 눈을 부릅뜨며 버럭 소리쳤다.
「자이안, 지금 당장 날 소환해라. 잠깐이면 되니까 어서.」
“왜죠?”
「뭐라고?」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무슨 짓을 하시려는 거죠? 설마 제게서 펜던트와 서클릿을 빼앗으려고……?”
도저히 맥락을 알 수 없는 의심이었다. 그만큼 자이안의 감정이 극단적이고 불안정한 상태인 것이다. 프레이는 초조함에 이를 악물었으나, 이내 눈을 질끈 감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자이안.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냐?」
“모르겠어요. 그냥…… 너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삼촌, 유리아와 유민 누나는 괜찮을까요? 마법사들이 둘을 공격하지는 않았을까요? 만약 둘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저는…… 역시 저 마법사들은 살려둬서는 안 돼요!”
「걱정 마라, 자이안. 그 둘이 고작 여기 마법사들한테 다치거나 할 리가 없잖냐.」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는 거죠? 세상에 절대란 건 없는데?”
「내가 언제 너한테 틀린 말을 한 적 있었냐? 한번 잘 떠올려 봐.」
“그건…….”
「초조해할 필요 없다. 넌 잘 해왔고, 앞으로도 잘할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보증한다. 내 말을 못 믿겠냐?」
거칠게 흐트러진 호흡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시야가 암흑으로 휩싸이고 나니, 감정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기억을 되짚어 봐라, 자이안. 하나씩, 천천히. 우리가 처음 만난 날. 숲속을 방황하고, 영지에서 도망친 화전민들을 구한 일. 처음 아르스를 소개해줬을 때. 같이 머리를 맞대고 몰래 국경을 넘었을 때.」
“……지금 생각하면, 그때 삼촌은 솔직히 조금 심했어요. 삼촌, 솔직히 말해 봐요. 그때 그냥 장난친 거죠?”
「하하하. 하하하하.」
“삼촌…….”
「뭐. 왜. 난 장난도 치면 안 되냐?」
계속해서 기억을 되짚는다. 프레이는 여행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였다.
많은 얘기를 나누고, 많이 배우고, 함께 싸웠다. 다른 각성자들도 고마운 마음뿐이었지만, 프레이는 그 이상이었다. 그는 분명, 자랑스러운 가족이었다.
“아포칼립스.”
어두운 방이 빛으로 가득 찼다. 자이안은 다시 눈을 떴다. 침대 옆에서 프레이가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굴 한 번 보기 참 힘들다. 안 그러냐?”
“매일 보잖아요.”
“하. 펜던트로 보는 거랑 이렇게 직접 보는 거랑 같냐? 서클릿이나 얼른 꺼내 봐.”
자이안은 여러 번 망설인 끝에 허리춤에 묶어놓은 서클릿을 프레이에게 내밀었다. 프레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눈동자가 찬란한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하. 이런 젠장.”
프레이가 한숨을 뱉었다.
‘서클릿의 영향이 맞군. 하지만 생각했던 것과는 달라.’
프레이의 예상은 악질적인 저주, 혹은 정신 공격 등이었다. 그러나 진상은 훨씬 단순한, 그래서 더 건드리기 어려운 것이었다.
서클릿에 담긴, 프레이의 마안조차 단번에 파악하기 힘들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MP가 자이안의 감정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MP 과포화 상태와 비슷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심하고 위험했다.
‘해결법 자체는 단순해. 무리하지 말고 푹 쉬면서 감정을 천천히 다스리면 된다. 체내에 수용량을 넘은 MP가 날뛰는 과포화 상태와 달리, 지금 자이안은 서클릿에 담긴 MP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을 뿐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감정이 불안정해진 건, 마족…… 아니, 대속자의 힘이기 때문이겠지.’
교만을 쓰러뜨렸을 때 자이안이 직접 흡수할 수 있었던 MP는 전체에 비하면 소량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 서클릿에는 음욕과 시기의 거의 모든 힘이 온전히 담겨 있었다.
‘내 전문이 아냐. 이건 백마법의 영역이다. 백마법 중에는 정신을 평온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 했다. 완전히 평상심을 되찾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착란이나 다름없는 지금 상태를 어느 정도 침착하게 만드는 건 가능하리라.
“걱정하지 말고 자라. 푹 자고 일어나면 좀 개운해질 거다.”
그리 말하며 프레이는 조심스럽게 MP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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