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평화를 위한 재정비(1)
(75/210)
75화 평화를 위한 재정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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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평화를 위한 재정비(1)
2022.12.17.
전례 없는 불행한 사고를 맞닥뜨린 보석탑.
미궁이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소식은 시간이 지나 탑 곳곳까지 전해졌다. 책임을 묻는 이, 미래를 비관하는 이, 그리고 살길을 궁리하는 이. 갖은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탑은 몹시 혼란스러운 분위기였다.
한 가지 애석한 사실은, 그들의 불행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이안!”
희생자들을 보호하며 마법사들이 허튼 짓을 못 하도록 감시하고 있던 유리아가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원로 교수들에게 위치를 캐물어 그녀를 찾아온 자이안도 환한 미소를 지었다.
“유리아. 역시 무사했네요.”
“엄청 고생했다구! 으아아앙!”
장난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달려간 유리아가 자이안에게 가볍게 안겼다. 자이안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는 몸을 떼고 방 안을 바라보았다.
“구출한 분들은…… 이게 전부인가요?”
“아니. 아직 좀 남았어. 근데 중간에 졸트 교수한테 덜미를 잡히는 바람에…… 어?”
자이안의 등 뒤에 시선이 닿은 유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케이가 있는 거야 당연하지만, 그 옆에 뜻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벌레라도 씹은 것 같은 표정을 한 졸트 타기온 원로 교수였다.
“저 사람이 왜 여깄어?”
“제가 데려왔어요. 마법사들이 저지른 죄상을 파헤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그…… 좀 위험하지 않을까? 배신당할지도 몰라.”
직설적인 말에 졸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이안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가볍게 웃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그런 짓은 안 할 거예요. 주제도 모르고 그런 짓을 하면…… 그땐 죽여야죠.”
뜻밖의 거친 말에 유리아는 자이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이안, 괜찮아?”
영문 모를 질문에 자이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다소 지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걱정 받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유리아의 눈은 우려로 가득했다.
“전 괜찮아요.”
“그럼 다행이지만…… 자이안, 좀 쉴래?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고생했을 거 아냐.”
“괜찮다니까요? 앞으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혼자 편히 쉴 수는 없죠.”
갑자기 유리아가 두 손으로 자이안의 볼을 붙잡았다. 언젠가 제국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자이안은 그리움에 휩싸였다.
“자이안. 너 지금 많이 지친 것 같아. 스스로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자이안은 잠시 망설였다.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그는 결국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아가 보기에 그렇다면, 분명 그게 맞겠죠. 유리아의 눈은 저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정확하니까요.”
“아하하, 그건 좀 과장이다. 그래도…… 알아줘서 다행이야. 나머지는 내가 어떻게든 할게. 내가 알아둬야 하는 게 있으면 그것만 알려줘. 그다음엔 꼭 푹 쉬고.”
“알았어요. 그럼…… 잠깐만요.”
말을 멈춘 자이안이 졸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통신기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졸트는 자이안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기 위해 모른 척할 생각이었으나, 어차피 자이안은 보석탑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통신기가 작동하는지 아닌지 정도는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작동 중인 통신기에 간섭해 내용을 도청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받아요. 중요한 일일지도 모르잖아요.”
졸트는 흠칫 놀랐으나 이내 체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며칠만 더 지나면 자이안이 더 이상 무슨 짓을 해도 놀라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감하며, 졸트는 조심스럽게 통신기를 작동시켰다.
“누구냐? 소속과 책무를 밝혀.”
-졸트 타기온 원로 교수님? 어제부터 일주일간 탑의 문지기를 맡은 필립 로큘로스 준교수입니다! 시급히 나와보셔야 합니다!
“뭐? 난 지금 바빠! 중요한 일이 아니면 다른 놈들한테 맡겨!
-주, 중요한 일입니다! 솔레리온 법왕국에서 사자가 찾아왔습니다!
또 다른 불행이 보석탑을 찾아왔다.
* * *
“이거까지만 보고 쉬어야 돼? 꼭이야!”
“알았어요. 알았다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유리아 말 안 들은 적이 있나요?”
“엄청 많았던 것 같은데……?”
분위기가 극명하게 나뉘어 있었다. 장난을 섞어 가며 사이좋게 티격태격하는 자이안과 유리아를 뒤로 하고, 앞서 나가는 원로 교수 집단은 처참하기까지 한 표정이었다.
보석탑이 다른 나라에 비해 정치적으로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미궁으로부터 강력한 부를 끌어냈기 때문이었다.
미궁이 파괴되어도 마법이라는 강력한 힘은 남아있지만, 지나친 힘은 박해받을 뿐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박해로 점철된 역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당장 전쟁 중인 법왕국이 문제였다.
법왕국과의 관계가 지금까지 그나마 온건하게 유지된 이유가 바로 미궁 때문이었다. 보석탑이 건축된 초기, 법왕국은 당연히 바로 옆에 자리를 잡은 사악한 마법사들을 불로 정화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미궁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미궁 특유의 자원을 폭넓게 활용하려면 마법사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때문에 그들은 보석탑의 존재를 묵인했다. 마법사들이 미궁을 점거하게 놔두고, 그들이 미궁 자원을 가공하면 이를 싼값에 가져오고자 했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 세월이 지나며 어느새 역학관계가 뒤집히고 말았지만.
과거에도 무력 마찰이 몇 번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는 말하자면 다소 과격한 외교에 불과했다. 실제로 사상자도 거의 없었다. 전쟁을 벌이는 시늉을 하며 서로 요구 사항을 주고받고 절충안을 내는 것이다.
그러나 미궁이 사라진 지금은 과연 어떨까? 법왕국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정치적으로 크게 부패했지만, 그래도 그 근저에는 태양신에 대한 광신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원로 교수 중 대다수는 법왕국이 이대로 ‘진짜 전쟁’을 시작하게 될 거라고 예상했다.
「사자가 이 꼴을 보면 넋이 나가겠구만. 전쟁을 하려는 가장 큰 이유가 없어져 버렸으니.」
「절묘한 타이밍이긴 하네요. 왜 갑자기 사자를 보낸 걸까요? 설마 정전 제안은 아닐 테고.」
「글쎄에…… 아마 이번 전쟁은 예전처럼 ‘과격한 외교’가 아니라 진심이라는 걸 알려주려고 한 게 아닐까?」
「아…… 과연. 역시 아르스 누나, 가끔 이렇게 날카롭다니까.」
「으으응? 가끄으음?」
「그걸 왜 알려주냐? 안 그런 척하다가 대뜸 통수치는 게 전략적으로 훨씬 효율적이지 않나?」
「‘법왕국’이잖아요? 그런 건 신경 써야죠. 나라의 정체성인데.」
자이안 일행과 각성자들의 생각은 반대였다. 법왕국이 왜 전쟁을 시작했는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당장 전쟁을 멈추지는 않지만, 열의를 잃을 것은 분명했다.
「그래도 어쩌면…… 마법사들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어요.」
「뭐? 넌 또 왜 갑자기 말을 바꾸냐?」
「우리는 법왕국에 직접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잖아요? 하지만 보석탑은 몇 백 년 동안 옆에서 서로 부대꼈으니 법왕국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죠.」
각성자들이 불편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자이안도 크룩스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종교는 때로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목적이 되곤 해요. 지구 역시 몇 십 년 전만 해도 중동 지역에서 테러와 전쟁이 끊이질 않았잖아요? 십자군 전쟁만 해도 그래요. 온갖 정치적 목적이 복잡하게 얽힌 큰 전쟁이었지만, 바탕이 된 건 결국 신앙이었어요. 게다가 자이안의 세계는 문명이 아직 덜 발달했으니…….」
종교의 영향력이 극단적으로 적은 일리움 태생이기에, 자이안은 종교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알지 못했다. 멸망의 위기를 극복하며 극적으로 화합하게 된 지구 태생 각성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설명을 마친 크룩스 역시 내심으로는 반반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직접 봐야 알게 될 일이었다.
“졸트 교수. 얘기해줄 게 있어요.”
“……이 상황에 말입니까?”
“지금 들어야 하는 얘기예요. 법왕국이 이 전쟁을 시작한 이유를 알고 있어요.”
가장 앞서 걷던 졸트가 눈을 부릅뜨며 걸음을 멈췄다. 다른 원로 교수들도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자이안은 졸트 말고 다른 이들에게까지 정보를 공유할 생각은 없었다.
“졸트 교수. 대표는 당신이니까 당신만 들어요.”
졸트는 가시밭길을 헤쳐나가는 기분으로 원로 교수들 사이를 지나 자이안에게 다가갔다. 자이안이 자신과 유리아, 졸트를 제외한 주변의 소리를 차단하는 간단한 결계를 펼쳤다.
졸트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조금 뒤에야 다른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법을 사용한 겁니까?”
“이제 숨길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런 건 됐으니까, 잘 들어요. 법왕국이 전쟁을 시작한 이유는 미궁 때문이에요.”
자이안이 소아레스의 보고서를 통해 알게 된 사실들을 그대로 전했다. 졸트는 미간을 모으며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미궁 자원을 활용하려면 마법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설령 그들이 미궁을 손에 넣는다 한들 원하는 바를 이루지는 못할 겁니다.”
“글쎄요. 그건 법왕국이 생각할 문제죠. 당신들도 신성술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잖아요? 신성술로 어떻게 할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요.”
다시 졸트는 인상을 쓰며 신음을 흘렸다.
“어차피 성유물이 힘을 잃은 이상 법왕국은 다른 수단이 없어요.”
“음? 잠깐…… 그걸 알고 계셨으면서 미궁을 파괴한 겁니까?”
잠시 멈칫한 자이안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졸트는 문득, 가진 능력에 걸맞지 않게 어수룩한 이 소년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손바닥 보듯 알 것 같았다.
“발상은 나쁘지 않군요. 하지만…….”
졸트는 힘없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법왕국은 그 정도로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겁니다.”
“…….”
자이안이 말없이 방음 결계를 풀었다. 졸트는 복잡한 표정으로 선두로 돌아갔다. 일행들은 다시 탑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1층, 외부인을 대접하기 위한 객실. 법왕국에서 찾아왔다는 사자는 대접받은 홍차도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며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졸트와 자이안, 유리아를 포함한 몇 명이 대표로 들어서자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흘깃 시선을 향할 뿐이었다.
“보석탑의 마법사들은 참 팔자가 좋은 분들이시군.”
“그러는 법왕국의 사제들은 약속이라는 개념도 잘 모르는 모양이군. 원로 교수, 졸트 타기온이오.”
“수도사제 코드윈이다.”
“……수도사제?”
졸트가 불편한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수도사제는 낮은 직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나라에 사자로 보낼 만큼 중역도 아니었다. 태도도 무례했다. 법왕국이 보석탑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너희들에게 신의 말씀을 전하러 왔다. 이 이상 무익한 피를 흘리고 싶지 않다면 항복해라. 너희들이 얌전히 항복한다면, 불로써 정화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거부한다면 너희들 모두 시체가 되어 흙바닥 위에서 썩어갈 것이다.”
“……이 전쟁에는 더 이상 의미가 없소.”
“무슨 말이냐?”
“당신들이 왜 전쟁을 벌인 건지 알고 있소.”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며, 졸트는 눈앞의 사제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지금 법왕국은 모종의 이유로 반드시 미궁을 손에 넣어야 한다지? 애석하지만, 미궁은 이미 손쓸 수 없이 파괴된 상태요. 입구가 막힌 건 물론이고 기능 자체가 완전히 멈춰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마물이 태어나지도, 미궁 자원을 채취할 수도 없소. 이제 와서 우리를 쓰러뜨리고 미궁을 손에 넣은들 아무 의미도 없소.”
“흥. 어디서 이상한 소문을 주워들은 모양이군.”
수도사제는 팔짱을 끼며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졸트는 저도 모르게 큰 한숨을 내쉬었다. 수도사제는 한숨 소리를 듣지도 못한 듯 열변을 하기 시작했다.
“그게 뭐 어쨌단 거냐? 이건 성전이다! 그런 건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해! 미궁을 손에 넣은들 아무 의미도 없다고? 솔레리온이, 태양신의 나라가 고작 그런 사사로운 일에 좌우될 만큼 덧없어 보이느냐?”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광신으로 가득 찬 두 눈은 마치 이글거리며 불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너희 사악한 족속들을 이 땅에서 모두 불태워 없애버리기 전까지! 우린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프레이가 이마를 탁 짚었다.
「돌겠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