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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보석탑의 미래(2) (74/210)


74화 보석탑의 미래(2)
2022.12.16.


탑의 최상부, 의 바로 아래. 4인의 장로가 잠든 최상부가 수십 년간 출입 금지가 된 이래 실질적으로 ‘최상층’이라고 불리는 장소였다.

원로 교수들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 원로회실이 바로 그 위치에 있었다. 본래는 다른 목적의 방이었으나, ‘원로회’라는 조직이 만들어지고 언제부턴가 그렇게 쓰이게 된 것이다.

“다 모인 거 맞죠?”

본래 졸트가 앉아있어야 할 자리에 자이안이 당당히 앉아있었다. 느긋하게 원로회실에 들어오던 교수들은 모두 한 번씩 자이안의 사나운 시선을 마주해야만 했다.

이윽고 33명이 모두 모인 것을 확인한 뒤, 회의의 시작을 선언하지도 않았는데 자이안이 바로 말을 꺼냈다.

“미궁에 대해서 알려줄 게 있어요.”

“잠시, 잠시만요. 이봐요, 타기온 교수. 지금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회의를 소집한 건 타기온 교수 아닙니까? 왜 외부인인 저 소년이 멋대로 회의를 진행하려는 겁니까?”

졸트는 대답을 망설였으나, 바로 자이안이 그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향했다. 졸트는 작게 한숨을 뱉고는 힘없이 대답했다.

“이번 회의에 대한 제 권한은 모두 자이안 님에게 양도했습니다. 자이안 님의 발언에 대한 책임은 제게 있으니 여러분들은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타기온 교수, 원로 교수라는 직함이 그렇게 가볍게 보여요? 원로회실에 몇 번이나 외부인이 난입했던 것만 해도 유례가 없는 사고예요. 지금 당신 행동은 원로회의 질서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미궁은 최심부까지 모두 공략했습니다.”

졸트를 맹공격하는 원로 교수의 말을 끊고 자이안이 폭탄을 던졌다. 교수들은 처음에는 자기 귀를 의심했고, 그다음은 자이안을 의심했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당신들이 연구한 대로였어요. 최심부에는 마물과 미궁 자원을 만들어내는, ‘기능 중추’의 역할을 하는 거대한 구조물이 있었더군요. 저는 기능 중추를 완전히 정지시키고 미궁 내부를 누구도 발을 디딜 수 없도록 완전히 파괴했습니다. 가장 얕은 층부터 가장 깊은 층까지 모두 다.”

또다시 원로 교수들은 귀를 의심했다. 정작 자이안의 표정은 섬뜩할 정도로 무덤덤했다. 자주 다니던 주점이 하필 휴일이라 일찍 귀가했다는, 그런 별거 아닌 얘기를 할 때에도 그보다는 더 감정이 담겨 있으리라.

때문에 원로 교수들은 자이안의 말이 무언가의 비유가 아닌가 멋대로 생각했다. 단 한 명, 열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졸트를 제하고.

“자이안 님의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제가 제자들을 통해 이미 확인했습니다.”

그리 말하는 졸트의 목소리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차라리 홀가분하게 들렸다. 가장 먼저 미궁이 붕괴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덕분에 다른 원로 교수들보다 현실을 받아들일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자이안을 적대하는 게 어리석은 일이라는 사실 역시 한 발 일찍 깨달을 수 있었다.

“미궁이…… 파괴됐다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예상대로 원로회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미궁은 보석탑이 존속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사람이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잠을 자야만 살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졸트와 자이안이 서로 짜고 질 나쁜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면, 보석탑의 미래에 남은 건 죽음뿐이다.

“이봐요, 손님. 아니 자이안! 우리가 네게 미궁을 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한 건 어디까지나 마물 범람을 해결하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네게 무슨 권리가 있다고! 우리가 마법을 연구하고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 미궁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 거야?! 이걸 대체 어떻게 책임질 거야!”

“거 너무 흥분하지 말게, 마빌로 교수. 설마 저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곧이곧대로 믿는 건가? 그 넓은 미궁을 대체 무슨 수로 파괴하겠나? 저 애송이가 미궁을 최심부까지 공략했다는 건 또 어떻게 믿고? 하여간, 보고 들은 걸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말고 생각하는 힘을 좀 기르는 게 어떤가?”

“흥. 설령 저놈의 말이 과장된 거라 해도 미궁 입구를 파괴하고 탑을 엉망으로 만든 책임은 치러야지. 그래, 그러고 보니 저놈이 제국 황제랑 친밀한 관계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 책임은 제국에 물어야겠군.”

“응? 잠깐만. 그러고 보니 탑은 대체 왜 이 꼴이 된 거요? 난 실험에 열중하고 있느라 제대로 확인을 못 했는데. 올라오면서 얼핏 보니 연구실 하나가 터진 정도가 아니던데?”

“글쎄…… 조교나 준교수들 말로는 용이 나타났다느니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던데…….”

“용이라니? 푸하하하! 단탈레스 교수, 아랫사람들 관리 좀 하셔야겠소. 얼마나 기강이 해이해졌으면 말단들이 낮술을 먹고 헛걸 보단 말이오?”

“낮술을 먹은 건 자네인 것 같은데? 용이 나타난 건 사실일세.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거든. 잠깐 신경을 뗀 사이에 어딘가로 사라져 버려서 행방은 알 수 없지만.”

언젠가 본 것과 비슷한 광경이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자이안은 더 이상 그들의 개싸움을 참고 볼 생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자이안이 슬쩍 뒤에 시선을 던졌다. 바닥에 앉아 지루하게 하품을 하고 있던 케이가 눈을 빛내며 일어났다.

“내가 뭐 할 일 있어?”

“겁만 조금 줘. 누가 다치거나 하면 안 돼.”

“음…… 이 원탁은 부숴도 돼?”

“그건 괜찮아.”

“예? 자, 잠깐, 이 원탁은 장로회 시절부터 이어진 유서 깊은…….”

졸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케이가 두 팔을 번쩍 들었다. 그의 팔이 삽시간에 푸른 비늘에 휩싸이더니 거대하게 팽창했다.

용의 앞발이었다. 마지막으로 케이는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자이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가하자, 그는 앞발을 가볍게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푸른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무언가가 교수들의 시야 가득 나타났다. 시끄럽던 원로회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해졌다.

날카로운 발톱이 돋은 발가락을 꿈틀거리며 바닥을 몇 번 긁은 케이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두 팔을 되돌렸다.

“헤헤, 시원하다! 발톱 간지러워서 큰일 날 뻔했네. 고마워, 자이안! 덕분에 살았어.”

싸늘한 정적으로 가득 찬 원로회실에 케이의 천진한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자이안은 말없이 가볍게 웃고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용은 여기, 제 옆에 있어요. 당사자를 눈앞에 두고 무례한 말은 되도록 삼가세요.”

“아니…… 그냥 어린애잖아?”

“용이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건 흔한 얘기잖아요? 아니면 당신들은 자기 눈으로 직접 본 것도 못 믿는 머저리들인가요?”

거친 말투에 원로 교수 일부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러나 완전히 박살 난 원탁의 잔해를 눈앞에 두고도 불만을 표할 만큼 무모한 이들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자리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좀 전에 누가 미궁의 권리가 어쩌니 했는데…… 당신들은 대체 무슨 권리로 아무 허락도 안 받고 미궁을 점거하고 있는 거죠? 멋대로 미궁 위에 이런 커다란 탑까지 세우고.”

“……?”

교수들의 표정이 하나로 통일됐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들은 양 얼이 빠진 그들에게 자이안이 재차 물었다.

“당연한 거잖아요. 설마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어요? 저 미궁의 주인이 누구일지? 저 미궁이 설마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니죠?”

“그건…… 아니, 그렇긴 한데…….”

“하, 하지만 미궁은 수백 년, 어쩌면 수천 년 전부터 이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단 말이오. 설령 미궁의 주인이 존재한다 한들, 여태까지 살아있을 리가 없지 않소?”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당신들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연구해도 일부분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광대하고 정교한 구조의 미궁을 만든 이가, 평범하게 수명이 다해 죽었을 거라고 단정하고 있는 거예요?”

교수들은 저마다 불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였다. 미궁도, 탑도, 지금 그들이 누리고 있는 그 모든 것은 그저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것에 불과했다.

미궁에 관한 진상을 알고 있는 이도, 그걸 파헤치려 시도한 이도 없었다. 4인의 장로는 무언가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들은 수십 년간 깨어나지 않는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생존을 확인할 수단이 없는 이상, 죽었다고 상정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 않나? 이미 우리는 수백 년간 미궁의 자원을 이용해 왔어. 이제 와서 그 체제를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

“미궁의 주인이 직접 당신들 앞에 나타나서, 주인의 권리를 주장하며 당신들을 쫓아낸다고 해도요?”

“그러니까 그 주인이…….”

“전 미궁의 주인을 만나고 왔어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미궁의 주인으로부터 정식으로 전권을 위임받은 아이를 데려왔죠. 이 아이, 이름은 케테르크고, 당신들도 봤다시피 용이에요. 정확히는…… 당신들이 떠받드는 4명의 장로가 미궁에 기어 들어가서 용의 심장을 훔치고, 당신들이 그걸 가지고 온갖 실험을 벌인 끝에 인간의 태아와 융합해 새로 태어난 존재죠. 관련된 실험은 타기온 교수 파벌이 진행했으니까, 자세한 건 그쪽에 확인하세요.”

“응? 그 용이 실험의 결과물이라고? 그럼 소유권은 우리한테 있…….”

원로 교수는 끝까지 말을 맺지 못했다. 번개처럼 날아간 투창이 그의 귀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피부를 찢고, 뒤쪽 벽을 완전히 무너뜨리며 훤히 드러난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입. 닥쳐요.”

“…….”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실험체의 소유권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꺼냈다간 두 번 다시 그 하찮은 입을 열 수 없는 꼴로 만들어버릴 거예요.”

자이안이 가볍게 손목을 꺾었다. 날아간 투창이 그대로 돌아오며 다시 한번 원로 교수의 피부를 찢고 자이안의 손아귀에 잡혔다.

원로 교수는 피가 맺힌 귀를 감싸며 고개를 숙이고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지금 당신들이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게 있어요.”

자이안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전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들 모두를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릴 수 있어요. 당신들의 더러운 피로 손을 더럽히는 걸 꺼릴 생각도 없어요. 제가 지금 당신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건, 지금까지 저지른 일에 책임도 지지 않고 도망치는 꼴을 보기 싫어서예요.”

일부는 두려움에 떨었고, 일부는 믿지 못하고 코웃음을 쳤다. 머리를 굴리는 듯 조심스럽게 자이안의 안색을 살피는 이들도 있었다. 그 모든 행동이 자이안은 하찮게 보였다.

“그래서, 이제 미궁의 주인의 전언을 들을 준비는 다 됐나요?”

“……그래, 어디 들어는 보지.”

자이안의 말에 코웃음을 쳤던 원로 교수 중 한 명이 대표로 말했다. 원탁의 잔해가 널브러지고 발톱으로 할퀸 자국이 남은 중앙의 공간 한가운데에 케이가 섰다.

“난 당신들이 뭘 하든 아무래도 상관없어.”

교수들을 한 번씩 차례대로 보고, 빙글빙글 웃으며 그는 말했다.

“당신들이 미궁 표층에서 한 줌도 되지 않는 자원을 가져가서 뭘 하든 내게는 무가치한 일이거든. 그러니까 난 미궁에 대한 전권을 자이안한테 맡길 거야. 왜냐면 나는 자이안의 친구니까. 사람의 일은 사람끼리 해결해.”

어찌 보면 무책임한 말을 남기고, 다시 자이안의 뒷자리로 돌아간 케이가 바닥에 털썩 앉았다.

“그렇다고 하네요. 그러면…… 미궁의 전권을 가진 제가 미궁을 부순 게, 무슨 문제가 되나요?”

“이, 인정할 수 없다.”

“당신들한테 제 행동을 인정하고 말고 할 권리는 없어요. 당신들이 무슨 소리를 하든 이미 미궁은 파괴됐고 더 이상 복구할 수 없어요. 복구할 수 있다고 해도 그럴 생각도 없고요. 이제 그만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어때요?”

자이안이 싸늘하게 웃었다.

“보석탑은 머지않아 멸망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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