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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보석탑의 미래(1) (73/210)


73화 보석탑의 미래(1)
2022.12.15.


“케이. 방금 전 맥 빠지는 소리는 대체 뭐야?”

짧은 시간 유리아와 시선을 나눈 자이안이 발밑, 두꺼운 비늘을 내려다보며 불평했다. 케이는 공중에서 꼬리를 흔들며 장난을 성공시킨 악동처럼 깔깔 웃었다.

-하하하. 걱정 마! 용화한 내 목소리는 너처럼 마나를 품은 자가 아니면 어차피 안 들리거든.

실제로 그 말은 탑의 마법사들에게는 그저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들렸다. 벼락이 몇 줄기 그 소리에 응답하듯 땅에 내리꽂혔다.

간신히 목숨을 구한 마법사들은 부서진 벽 너머로 그 광경을 보고 온 세상의 종말을 목도한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적당히 좀 괴롭혀. 이제 내려가자.”

-하지만 저 마법사들은 네 적이잖아?

“그렇다고 지나치게 겁을 줄 필요는 없어. 어차피 저들은 이미 네 모습에 압도됐을 테니까. 이 이상은 불필요한 위협이야.”

「공포가 역치를 넘어버리면, 사람은 이성이 완전히 마비되어 예측할 수 없는 미친 짓을 벌이기도 하지. 자이안 말이 맞다.」

-알았어. 나도 인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지만, 너희만큼은 아닐 테니까. 내려가자!

잉어가 호수를 헤엄치는 듯한 유려한 움직임으로 케이가 공중을 누비며 고도를 낮췄다.

턱을 지면에 가져다 대고, 자이안이 훌쩍 뛰어내려 착지하자 돌연 케이의 온몸이 환한 빛을 뿜으며 변하기 시작했다.

기다란 몸이 줄어들고, 뱀과 같았던 몸통이 좀 더 두꺼워지고, 두 쌍의 다리가 더욱 두껍고 튼튼해지고, 등을 따라 솟은 갈기가 복잡하게 얽히며 좌우로 벌어져 한 쌍의 날개의 모습을 이뤘다.

이윽고 케이가 꼬리로 지면을 후려쳐 평탄하게 만들고는 뒷다리로 똑바로 섰다. 용의 진정한 모습이 아닌, 일반적으로 민간에 흔히 알려진 전설상의 생물 ‘용’의 모습이었다.

-휴우. 역시 천룡화는 너무 피곤하다. 이 모습이 제일 편하다니까!

몸길이가 수백 미터에 달하던 방금 전보다야 낫지만, 지금의 모습 역시 지면에서 머리까지의 높이만 약 50미터에 달하는 거체였다.

대륙의 그 어떤 거대한 생물도, 심지어 사나운 마물마저도 그 앞에 서면 한없이 초라해질 뿐이리라.

상황을 살피기 위해 급히 탑 밖으로 뛰어나온 마법사들도 물론 예외가 아니었다.

대치하고 있던 유리아조차 내버려 둔 채 마법사들을 이끌고 앞장선 졸트는 자이안과 그 신화적인 생명체가 친밀한 분위기를 내는 것을 보고는 공포와 혼란으로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워, 워, 원로 교수님, 고, 공격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같이 온 마법사 중 어설프게 담력이 강한 이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꺼냈다. 졸트는 그를 홱 돌아보며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이 아이는 제 친구예요. 여러분들도 잘 아는 아이고요.”

그들의 대화는 당연히 자이안에게도 들렸다. 자이안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경고하자, 졸트는 반사적으로 마법사의 주둥이를 주먹으로 후려쳐 강제로 침묵시켰다.

노구에 어울리지 않는 강렬한 정권에 마법사가 나가떨어졌다. 졸트는 식은땀을 닦으며 이를 악물었다.

“미궁은…… 어떻게 된 겁니까?”

“제 얘기 아직 다 안 끝났어요. 지금 이 아이를 소개하고 있잖아요?”

자이안의 목소리는 흡사 사나운 눈보라를 연상케 했다.

졸트는 저도 모르게 압도당하고, 아무리 그래도 자기 인생의 1/5도 못살았을 애송이에게 겁먹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가,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침묵을 지켰다.

“케이. 얼른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내 원래 모습은 지금 이건데?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아하하.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케이의 온몸이 다시 빛에 휩싸였다. 겁에 질린 마법사들이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빛에 휩싸인 케이의 몸이 쭉쭉 작아지더니 이윽고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 얼굴을 확인한 졸트는 비명을 터뜨릴 뻔했다.

“안녕, 탑의 마법사! 난 케테르크야. 편하게 부르고 싶으면 케이라고 불러도 돼. 아, 너희들은 나를 실험체 K라고 불렀지?”

졸트와 함께 나온 마법사들은 모두 그의 파벌에 소속되어 있었다. 케이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말단 마법사들도 실험체 K라는 단어를 듣고는 저마다 표정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말단 마법사들마저도 탑이 행한 비인도적인 행위에 빠짐없이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였다.

“미궁에 대해 할 얘기가 많아요. 제 동료가 지금 어떻게 됐는지도 듣고 싶고요. 그리고, 탑이 그동안 민간인을 납치해 벌인 여러 실험에 대해서도.”

자이안은 그들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한 차례 어깨를 으쓱였다.

“들어가죠. 대화를 나누기 위한 적당한 자리를 만들어주세요, 졸트 타기온 원로 교수님.”
 

* * *

마법사들이 급히 자리를 떠난 뒤, 유리아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희생자들을 숨겨둔 거점이었다. 유리아의 거점은 과거 마법사들이 만들었으나 지금은 잊힌 비밀의 방들을 재활용한 것이었다.

쉽게 발견되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있었지만, 유리아의 행동반경을 예상하고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졸트의 예를 생각하면 더 이상 안심할 수 없었다.

“방 전체를 샅샅이 뒤져라! 뭔가 숨겨진 통로나 장치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 너, 똑바로 경계해! 조금이라도 마음을 풀지 말란 말이다! 지금 우리가 붙잡고 있는 건 이성 따윈 없는 괴물들이라는 걸 잊지 마라!”

무너진 벽 너머로 거센 호통이 들려왔다. 유리아의 표정이 초조로 삐뚤어졌다. 스무 명이 조금 넘는 희생자들을 숨긴 거점이었다.

“잠깐만요! 무슨 짓을 하려는 거죠?!”

벽 안쪽으로 뛰어 들어간 유리아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반항 하나 없이 얌전한 희생자들을 제압하고 있던 마법사들은 놀라며 행동을 멈췄다. 그들을 지휘하는 늙은 마법사가 재차 호통을 쳤다.

“내가 방심하지 말라고 했지! 그 괴물들한테 뜯어 먹히고 싶으냐!”

“읏…… 당장 멈춰요!”

“멈추지 마라! 지시를 들어야 할 상대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는 거냐!”

마법사들은 잠시 우왕좌왕했으나 결국 늙은 마법사의 지시에 따르기 시작했다. 유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늙은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눈을 지그시 감고 깊이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이분들은 제가 직접 구한 사람들이에요. 대체 무슨 권리로 이들을 붙잡으려는 건가요?”

“손님께선 이상한 말을 하는군. 무슨 권리로 이 괴물들을 붙잡는 거냐고?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오. 이들은 모두 탑의 귀중한 재산인데, 손님은 무슨 권리로 이들을 마음대로 여기 데려온 거요?”

“사람은 재산이 될 수 없어요. 대륙의 그 어떤 나라도, 오지의 약소국가조차도 노예 제도를 인정하고 있지 않아요. 혹시 보석탑은 지금도 노예 제도를 인정하고 있는 시대에 뒤떨어진 나라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늙은 마법사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그러나 그는 곧 입매를 뒤틀어 비웃으며 턱짓으로 희생자들을 가리켰다.

“사람? 마물인지 뭔지도 알 수 없는 저 기괴한 괴물들을 두고 하는 말이오?”

“저들이 당신들의 지독한 실험으로 지금은 저런 모습이 되었다고 해서, 과거에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사실마저 없었던 게 되지는 않아요. 아, 발뺌할 필요는 없어요. 보석탑이 민간인을 납치해서 무슨 짓을 했는지는 이미 알고 있고, 그에 관한 서류도 이미 어느 정도 확보한 상태니까.”

이번에야말로 마법사의 말문이 막혔다. 그는 졸트와는 적대 파벌의 원로 교수로, 실종된 실험체들을 가장 먼저 확보한 뒤 이 일의 책임을 졸트에게 모두 밀어붙여 영향력을 크게 떨어뜨리려는 심산이었다.

운이 따라준다면 아예 졸트를 교수직에서 파면시키고 탑에서 쫓아낼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리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졸트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민간인을 납치해 실험 대상으로 쓰는 건 대부분의 파벌에서 관성적으로 행해지는 일이었으니까.

이 사실이 공론화되면 연수생의 발길이 끊어지는 건 물론이고, 내부 분열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탑의 마법사들이라고 모두가 인간을 사용한 실험에 찬동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최악의 경우는 주변 나라들로부터 공격을 받는 것이다. 특히 제국이 위험했다. 자이안 일행은 황제의 직인이 새겨진 추천장을 받을 정도로 제국에 있어 중요한 위치의 인물이었으니까.

“…….”

곤혹스러운 척 침묵을 지키며, 원로 교수는 근처의 마법사에게 슬쩍 시선을 던졌다. 그는 잠시 망설였으나 결국 체념하고는 누군가를 몰래 죽이는 데 최적화된 살상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흥.”

그 순간 유리아가 단검을 쥐었다.

섬광과도 같은 그 움직임을 제대로 눈에 담은 마법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파아앙! 공기로 가득 찬 가죽 주머니가 찢어지는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마법을 준비하던 마법사는 새하얗게 질린 채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등 뒤, 방호 마법이 걸린 튼튼한 벽에 진동의 칼날이 만들어낸 파괴적인 흔적이 몇 겹이나 새겨져 있었다.

“계속해보세요. 제가 아무런 정당방위도 안 하고 그냥 얌전히 보고만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교, 교수님…….”

마법사가 겁에 질린 눈을 원로 교수에게 향했다. 그러나 간담이 서늘해진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탑의 모든 구조물은 정교수 수십 명이 공을 들여 만들고 관리하는 반영구적인 결계로 보호받고 있다.

그걸 일격에 찢어버리는 공격이 만약 자신을 노린다면…….

원로 교수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 자리의 마법사들이 동시에 그녀를 공격해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 적지 않은 희생을 보게 될 것이고, 그게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

“세리오 마빌로 원로 교수님! 여기 계십니까?”

그때 통로 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 목숨과 유리아의 위험성을 저울질하며 도저히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원로 교수는 광명이 비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흠. 이거 미안하게 됐군. 누가 날 급하게 찾는 모양이오. 거기 자네, 이 자리의 책임은 자네에게 맡기겠네. 책임지고 맡은 바 일을 완수하도록. 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자기 할 말만 속사포처럼 뱉은 원로 교수가 쏜살같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갑자기 막중한 책임을 떠맡게 된 마법사는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유리아가 단검을 가볍게 흔들며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책임자가 됐으니, 당신한테 말할게요. 당장 이 사람들을 풀어줘요.”

유리아가 단검을 좌우로 흔들 때마다 마법사의 눈동자도 좌우로 흔들렸다. 마찬가지로 그의 마음속의 무게추도 연거푸 좌우로 흔들렸다.

여기서 그녀의 말을 따르면 나중에 원로 교수에게 호된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적어도 몇 년은 그의 밑에서 온갖 쓴소리를 들으며 고생해야 할 터.

반대로 그녀를 무시하고 원로 교수의 지시를 따르면…… 마법사는 마치 거대한 맹수가 할퀴고 지나간 것처럼 넝마가 된 벽을 한 번 바라보았다.

“항복하겠습니다.”

마법사는 힘차게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당당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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