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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비상 (72/210)


72화 비상
2022.12.14.


“사실은 말이야. 미칠 것 같았어. 아니, 나는 이미 한참 전부터 미쳐 있었던 거야. 동지들에 대한 분노, 질투, 원망, 집념, 그리움. 온갖 끔찍한 감정들이 내 영혼을 너덜너덜하게 갉아먹고,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된 지 오래였어. 그래서 더욱 그 감정들에 매달렸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 자신이 영영 사라져 버렸을 테니까. 어쩌면, 내가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 나 역시 교만이나 음욕처럼 너희에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을지도 몰라.”

그가 고개를 숙였다. 한쪽만 남은, 그마저도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듯 흔들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것은 오열하는 모습 같기도 했다. 동시에, 참회하는 모습 같기도 했다.

“고마워. 내가 망설이지 않고 결단을 내릴 수 있게 해줘서.”

“당신은…….”

“이걸 받아.”

그가 두개골 위에 얹힌 선홍빛 서클릿을 벗어 건넸다. 정리되지 않은 채 말을 꺼내려던 자이안은 다시 입을 다물고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모은 음욕의 힘, 그리고 내 남은 모든 힘이 담겨 있어. 교만은 준비가 덜 된 상태라 놓치고 말았지만. 너라면 분명 잘 다룰 수 있을 거야. 나처럼 휩쓸리지 않고. 앞으로 남은 동지들을 만날 때, 분명 그게 필요한 날이 올 거야.”

“하지만, 이걸 받으면 당신은…….”

“마지막으로 부탁할게. 네가 앞으로 다른 동지들을 만난다면. 그들이 만약 교만이나 음욕처럼 영락해버린 모습이라면, 그땐 망설임 없이 죽여.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얘기를 들어줘.”

“그들을 원망하고 있던 거 아니었나요?”

“맞아. 원망스러워. 수천, 수만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순간도 잊지 못하고, 언젠가 나를 데리러 돌아오겠다던 약속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하고 있을 만큼.”

시기가 서클릿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 순간, 그의 온몸의 뼈가 천천히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케이가 그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시선을 느낀 시기는 케이를 돌아보고는 그 머리에 손을 얹었다.

“케테르크. 너는 항상 막중한 역할을 자진해서 맡았지. 마지막까지 나를 따라줘서 고맙다.”

“괜찮아, 아빠. 내가 좋아서 한 일인걸.”

“케테르크, 용의 인자를 심어 오직 내 손으로 빚은 나의 아이. 모방품이 아닌 단 하나의 창조물. 내가 죽음으로써 너는 완전해지고, 자유로워질 거야. 너를 속박하는 건 아무것도 없게 될 거란다. 그러니 앞으로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하렴.”

“그럼 나 자이안 따라가도 돼?”

“하하. 그러렴.”

케이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세계의 근간에 엮인 방대한 얘기를 들은 뒤에도 케이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자이안도 복잡했던 머릿속이 좀 단순해지는 것 같았다.

“아아…… 그래. 이제 기억이 나. 케테르크, 넌 언제나 내 곁을 지켜주었지. 내가 힘들고 괴로울 때도, 기쁘고 행복할 때도. 우리가 지상에서 번영을 누리며 살아가던 오랜 옛날부터, 항상.”

케이를 쓰다듬던 시기의 손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 순간 신비한 일이 일어났다. 사방에 흩날리던 그의 뼛가루가 바람을 타고 케이의 머리 위 허공에 모이기 시작했다.

“용은 축복받은 생물. 절대적인 지배자로 군림한 우리와 견줄 수 있는 대등한 존재이며, 유일한 이해자. 균형의 파수꾼이고, 자연의 수호자이며, 별의 대리자. 그런 너를 나는 내 욕심으로 속박하고 말았어.”

“내가 원해서 했던 일이잖아. 기억나? 우리는 처음 만난 날 아주 많은 대화를 나눴어. 수단과 방법에는 문제가 있었지만, 그 이상에는 공감할 수밖에 없었어. 나는 우리의 대표로서 너희 곁에서 너희를 지켜보기로 했었지.”

“그래…… 그랬지. 바로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나.”

용의 멸종은 차원이 마나에 오염되기 시작한 뒤로 첫 번째로 일어난 비극이었다. 자연의 수호자이며 별의 대리자인 그들은 마나 오염에 더욱 심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과 함께했던 케이만이 그들의 기술 덕분에 살아남았다.

“난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 아빠. 왜냐면 난 아빠를 좋아하니까.”

“그래…….”

꺼져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시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제 그의 몸 대부분이 가루로 흩어지고 남은 것은 척추와 두개골뿐이었다.

“핀제루스. 이요리카. 곧 갈게.”

그가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니, 어쩌면 그 너머 지상을. 어쩌면, 그보다도 더 먼 푸른 하늘을. 그를 이 땅에 남기고 위험천만한 차원 항행을 시도한 그의 동족들이 떠나가는 그 모습을.

“너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

자이안은 지그시 눈을 감고 시기가 앉아있던 자리를 향해 조용히 애도를 표했다. 그때 눈꺼풀 너머로 강렬한 빛이 번쩍이는 것이 느껴졌다. 자이안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케이의 머리 위에 뭉쳐져 있던 시기의 뼛가루가 환한 빛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빠. 걱정하지 마. 자이안은 잘 해낼 거야.”

케이가 그리 말한 순간, 빛이 마치 그에 대답하듯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수십 갈래로 나뉜 빛의 궤적이 허공을 수놓다가 마침내 케이에게 하나둘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환상적인 광경에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넋을 잃었다.

“이제 푹 쉬어도 돼, 아빠.”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자리를 채웠다. 시기의 흔적이 모두 사라진 석실은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던 벽면과 케이블들도 제 역할을 모두 마치고 침묵했다.

“이제 나가자, 자이안.”

잠시 케이를 말없이 바라보던 자이안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까지처럼 케이가 앞장서고, 자이안이 그의 뒤를 따랐다.

“케이, 너는…… 너를, 앞으로는 케테르크라고 불러야 할까?”

여태까지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는 등을 향해 자이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케이는 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다만 작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자이안. 내가 어떤 존재가 되어도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아. 기억을 잃고 심장만이 뽑혀 너희들의 장난감이 되어도. 아빠를 다시 만나고 잊고 있던 내 책무를 되찾아도. 이름과 자유를 되찾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로 돌아온다고 해도.”

그 목소리 역시 얼핏 들어서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르지 않은 듯 느껴졌다. 그러나 그 천진한 목소리의 안쪽에 지금까지 없었던 지혜의 편린이 희미하게 존재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말 한 번 복잡하게도 하네. 그냥 지금까지처럼 케이라고 불러도 된단 뜻 아니냐?」

“하하. 맞아. 본질이라는 건 원래 단순한 법이잖아?”

프레이의 볼멘소리에 케이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일행들은 위화감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조금 지난 뒤에야 흠칫 놀랐다.

「우와, 깜짝이야. 펜던트의 교신에 아주 자연스럽게 간섭하고 있잖아?」

「펜던트의 기능에 간섭한다고? 잠깐, 그거 위험한 거 아냐?」

「어어……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에. 펜던트의 다른 부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럽게, 정중하게 간섭하고 있어.」

「하하하. 예의 바른 무단침입자 같은 소리네요, 그거.」

크룩스의 비유에 전원이 미묘한 표정을 했다. 경계를 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애매한 상황이었다.

“혹시 기분 나빴어? 그러면 앞으로는 안 들을게.”

잠시 고민한 자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하지만 펜던트의 다른 기능은 건드리면 안 돼.”

“응. 알았어!”

해맑은 대답에 자이안은 내심 안심했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케이를 대하는 태도를 바꿀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지금 미궁은 동력원이 사라진 상태에서 남은 에너지를 통해 관성적으로 기능을 유지하고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작동을 멈출 거야. 하지만 자이안이 원한다면 완전히 정지한 미궁을 다시 작동시킬 수도 있어.”

석실을 나온 케이가 자이안의 손에 든 서클릿을 보며 말했다. 자이안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케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궁이 기능을 멈추는 것만 가지고는 부족해. 미궁을 완전히 파괴하는 게 가장 확실한데…….”

자이안의 힘만 가지고는 어려운 일이었고, 설령 가능하다 쳐도 까마득한 시간이 걸릴 게 뻔했다. 각성자, 특히 광범위 파괴에 특화된 프레이의 힘을 빌리는 것이 가장 확실하리라.

“그냥 둬도 미궁은 점점 힘을 잃을 텐데? 길어봤자 너희 시간으로 10년도 걸리지 않을 거야. 굳이 지금 파괴할 필요가 있을까?”

「위의 머저리들이 그 10년 동안 남은 자원을 가지고 꿀 빠는 걸 그냥 놔두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프레이가 코웃음을 치며 이죽거리고, 자이안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 반응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케이가 이윽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럼 내가 좀 도와줄까?”
 

***

유리아는 어떠한 공격에도 반응할 수 있도록 온몸을 긴장시키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등 뒤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졌다. 슬쩍 돌아보니 마법사들이 이미 연구실의 입구를 틀어막고 있었다.

“섣불리 움직이지 마라. 우리는 너를 더 이상 손님으로 간주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벌였다간,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마법들이 널 노리게 될 거다.”

완전히 포위된 상황. 주변의 마법사들이 언제든 그녀를 공격할 수 있도록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유리아는 자신의 안전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아티팩트의 재고는 충분했고, 그중에는 이런 위기 상황에 대비해 만든 것들도 있었다.

문제는 누구 한 명을 죽이기라도 하지 않으면 이 자리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점. 그리고 간신히 구출한 희생자들이 고립되어 버렸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제가 여기에 올 거라고 알아차린 거죠?”

“흠. 대화를 통해 시간을 끌 셈인가?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군. 자이안, 그 소년인가? 하지만 그 소년은 지금 미궁 깊은 곳으로 도망쳐 생사가 불명확한 상황인데. 과연 때맞춰 널 구하러 와 줄 수 있을까?”

“자이안은 무사히 돌아올 거예요.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빨리. 만약 당신이 제게 해를 끼치면, 그리고 미궁에서 돌아온 자이안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뒤는 말 안 해도 알지 않나요?”

졸트의 표정이 무섭게 얼어붙었다. 그 위압감에 눌린 일부 마법사들이 반사적으로 유리아를 공격하려 했지만 졸트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그 일련의 과정이 유리아의 눈에는 절호의 빈틈이었다. 순식간에 마법사들의 시야 사각으로 절묘하게 사라진 유리아가 출입구를 막은 마법사의 뒷덜미를 붙잡고 목에 단검을 가져다 댔다.

“그는 탑에 널리고 널린 준교수 중 하나일 뿐이다. 그 목숨은 내게 아무런 가치도 없어.”

“교, 교수님……!”

인질로 잡힌 마법사의 얼굴이 복잡한 감정으로 일그러졌다. 유리아는 그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도록 칼날을 더 가까이 가져다 대며 대답했다.

“저도 알아요. 이 사람은 당신과 협상하기 위한 게 아니라, 다른 마법사들이 우발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인질이에요.”

“그런가? 그렇다면 나와는 뭘 가지고 협상할 셈이지?”

“좀 전에 말했잖아요? 자이안이에요. 당신, 자이안의 능력을 무서워하고 있죠?”

유리아의 두 눈동자에 희미한 보랏빛 불꽃이 일렁였다. 시선이 마주친 졸트는 마치 마음속까지 간파당하는 것만 같은 불쾌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저와 자이안 모두, 당신들이 죄 없는 민간인들을 납치해 위험한 실험의 제물로 삼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어요.”

“그건 필요한 일이야. 그들은 제물 같은 게 아니다. 대의를 위한 희생, 우리가 더 높은 곳으로 발을 디디기 위한 주춧돌이 된 거다.”

“대의를 위해 남을 죽이면 죽은 사람이 나중에 되살아나기라도 해요? 저와 자이안은 당신들의 대의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어요. 수단이 그릇된 이상, 그 어떤 깨끗한 목적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군.”

“제가 할 말이에요.”

“원하는 게 뭐냐?”

“아직 탑에 남아 있는 모든 희생자들의 해방. 앞으로 이런 악행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명문화된 약속. 그 외 당신들이 저지른 모든 크고 작은 잘못에 대한 정당한 처벌.”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는군! 우리는 아무 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문답에 유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말로 설득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사실 처음부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혹시 몰라 시도했을 뿐.

“그러면 자이안이 돌아올 때까지 관련된 모든 연구를 중지하는 건 어때요?”

“소년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당신들에게 최소한의 유예를 주는 거예요. 저는 자이안을 아주 잘 알아요. 당신들이 지금까지처럼 귀를 막고 자기합리화로 무장한 채 똑같은 짓을 벌이면, 자이안은 당신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아마 탑을 흔적도 없이 박살 내려 들걸요. 하지만 당신들이 조금이나마 자중하는 시늉이라도 하면…… 혹시 모르잖아요? 자이안도 마음이 약해져서 봐줄 수도 있죠.”

사실 기만이었다. 이미 지은 죄가 차고 넘치게 있는 이상 자이안이 그들을 용서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아직 구하지 못한 희생자들의 피해를 조금이라도 더 막고자 그런 말을 한 것이다.

“그 소년이 제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졌다 한들…… 보석탑을,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우린 너희 같은 무지한 자들은 상상하지도 못할 위대한 지혜와 비술을 연단해 왔다. 우리를 무너뜨리려 한다면, 그 소년 역시 죽음을 각오해야 할 거다.”

유리아는 새어 나오려는 실소를 막으려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했다.

위대한 지혜와 비술이라. 과연 그게 손짓 한 번으로 수만 마리의 마물을 흔적도 없이 불태워 버리는 프레이의 능력과 비교가 될 수나 있을까?

“네 요구사항을 들었으니, 이제 우리도 요구사항을 말해야겠군. 먼저, 네가 빼돌린 실험체들. 이는 명백히 탑의 관리 하에 있는 중요 재산이며 자료다. 그러니 우리가 되찾아오는 것 역시 당연한 권리다. 실험 역시 멈추지 않을 거다. 대의에 한 발짝이라도 더 다가가기 위해, 우리는 단 한순간이라도 멈춰서는…….”

갑자기 졸트가 인상을 쓰며 입을 다물었다. 유리아 역시 갑자기 발밑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흔들림은 시간이 지나도 멈추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점점 더 강해져서, 1분도 지나지 않아 마법사들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이건 뭐냐? 너, 대체 무슨 짓을…… 설마 미궁인가?!”

유리아의 양동을 의심했던 졸트가 이내 소스라치게 놀라며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탑 전체가 뒤흔들릴 정도로 진동이 강해지고, 까마득한 아래쪽에서 무언가가 사정없이 무너지고 부서지는 굉음이 끊임없이 들렸다.

‘자이안!’

유리아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할 일을 마친 자이안이 돌아오는 것이다.

“타, 탑에 균열이…… 으아아아!”

“바닥이 무너진다! 모두 대피를…… 아아악!”

탑 곳곳에서 혼란과 비명이 소용돌이쳤다. 그리고 마침내 진동의 원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을 꿰뚫을 듯 치솟은 탑에 세로로 거대한 균열을 일으키며.

거치적거리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수직으로 솟아오르며.

-크아아아아아!

하늘을 찢어발길 듯한 포효가 들렸다. 맑은 호수를 연상케 하는, 청백색 비늘로 뒤덮인 머리와 목이 외벽을 뚫고 솟아났다.

그것이 무언가에 걸린 듯 머리를 한 번 크게 흔들자, 복잡하게 얽혀 나무뿌리를 연상시키는 한 쌍의 커다란 뿔이 외벽을 완전히 부수며 전모를 드러냈다. 뿔 사이로 백색 불꽃이 일렁이고, 거센 돌풍과 함께 날벼락이 지면에 내리꽂혔다.

굳센 앞발이 외벽을 마저 찢어발기며 넓은 공간을 만들었다. 탑 전체에 걸린 방호 마법은 그 거대하고 강고한 육체 앞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앞발로 부서진 외벽을 짚으며 기다란 몸을 쭉 내밀고, 마침내 그 전신이 탑 내부를 마저 휘저으며 밖으로 나와 하늘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미친…….”

졸트와 유리아가 대치하고 있는 실험실은 공교롭게도 그 모습이 아주 잘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의자에서 굴러떨어진 졸트는 무너진 벽 너머로 그 광경을 눈에 담고 망연히 욕설을 뱉었다.

꿈만 같았다. 그것도 끔찍한 악몽이었다.

-우와아아아! 엄청 쎈 선조룡 케테르크가 울부짖었다!

거체를 드러낸 용이 뱀을 연상케 하는 길고 두꺼운 몸을 비틀며 재차 포효했다. 유리아는 천지를 뒤흔드는 포효 속에서 맥 빠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유리아는 픽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일으키고, 용의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아주 작게 자이안의 모습이 보였다. 한 쌍의 뿔 사이에 당당하게 선 그 모습은 마치 용의 지배자를 연상케 했다.

“제 생각보다도 훨씬 빨랐네요.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실래요? 졸트 타기온 원로 교수님?”

그 물음에 졸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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