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깊은 지하에 잠든 비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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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깊은 지하에 잠든 비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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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깊은 지하에 잠든 비밀(4)
2022.12.13.
모든 인류의 영지를 모은 대규모 프로젝트였어.
차원과 차원 간의 틈새에 표류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는 워프 게이트 기술.
살아남은 모든 인류를 태우고 항행할 수 있는 차원 항행함선.
돈과 자원, 그리고 시간을 무한정 들이부었지.
하루아침에 결실을 볼 수는 없었어. 마나 오염은 점점 강해졌고 사망자가 발생하기 시작했지. 그래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어. 단 한 명도.
나는…… 대속자 중 한 명이기는 했지만,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어. 개입할 수가 없었지. 다른 동지들이 그걸 막았어. 왜냐면 나는 대속자 중에서는 정신적으로 많이 불안정한 상태였거든.
사실 나만 그랬던 건 아냐. 애초에 대속자라는 건 자신이 짊어진 원죄의 감정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그걸 강철 같은 절제력으로 억누르고 있을 뿐이지.
나는 다른 동지들보다 그게 좀 부족했고…… 마나 오염이 심해지자 동지들도 결국에는 감정에 휩쓸리기 시작했어.
서로 의견이 부딪치며 회의가 표류하고, 프로젝트의 진행이 번번이 발목을 잡혔지.
그래도 우리는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어. 서로가 같은 처지라는 걸 이해하고 있었고, 같은 목적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안전한 차원 항행을 위한 기술을 연구하면서, 동시에 우리는 몇 가지 보험을 들고자 했어.
예를 들어보자. 간신히 도착한 미지의 차원이 도저히 우리가 살 수 없는 가혹한 환경이라면? 그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고, 함선의 동력이 고갈되어 더 이상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수 없게 되면?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우리는 설령 함선의 동력이 고갈되더라도 돌아올 수 있는 닻을 만들기로 했어. 바로 이 행성, 우리 고향에 말이야.
처음에 그저 단순한 닻이었을 뿐이지만, 설계 도중 닻이 더 많은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어.
우리가 이 차원을 떠나면 마나를 사용하는 존재가 사라지는 셈이니 오염은 멈출 테고, 천문학적인 시간이 지나고 언젠가는 원래의 깨끗함을 되찾겠지.
우리는 닻에 우리가 떠난 뒤부터 작동을 시작해 오염의 정화를 보조하는 기능을 더하기로 했어. 예정에 없던 계획인 만큼 당연히 오랜 시간이 걸렸어. 그래도 결국에는 ‘생명의 나무’가 완성됐지.
차원을 떠나는 항행함선. 차원에 남아 오염을 정화하는 생명의 나무. 두 계획이 모두 결실을 맺고 출항이 눈앞까지 다가왔어.
둘 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계획인 이상, 양쪽 모두 관리 감독을 위한 책임자가 필요했지. 그리고 생명의 나무의 책임자가 된다는 건 오염된 세계에 혼자 남아야만 한다는 뜻이야.
그래, 말하자면 제물이지.
“너를 함선에 태울 수는 없어. 너는 지금 너무나도 위험한 상태다. 그러니…… 이곳에 남아 우리를 기다려다오. 언젠가 반드시 너를 데리러 돌아올 테니.”
동지들은 나를 제물로 삼았어.
* * *
“무슨 말인지 알겠어? 동지들은 나를 버린 거야. 일어날지 말지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를 명분으로 삼아,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함께 인류를 위해 봉사했던 나를 내친 거라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조곤조곤 말하던 그가 갑작스럽게 격앙하며 언성을 높였다. 거세게 틀어쥔 손아귀의 뼈가 끼릭끼릭 섬뜩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자이안은 침묵을 지켰다. 동료들에게 버림받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는 그의 처지는 동정했으나, 그와 별개로 그의 정신상태는 분명 불안정해 보였다.
“난 반론 한 마디 못 했어. 당연한 일이었지! 6:1의 불합리한 싸움이었는걸! 어떻게 반론하든 온갖 궤변으로 밀어붙일 게 뻔한 상황에서 내가 왜 무의미하게 힘을 빼야 해? 대속자들의 힘은 큰 차이 없이 동등하니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지. 결국 나는 이 텅 빈 지하에, 이 거대한 관에 산 채로 갇히는 꼴이 되고 말았어.”
그리 말하는 시기의 목소리에는 절제되지 않은 거친 감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조롱, 비웃음, 원망, 시기.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펜던트를 쥐었다.
이성적인 대화가 통하는 대속자 ‘시기’의 존재가 점점 희미하게 느껴졌다. 눈앞의 해골은 대속자가 아닌 마족으로서 변모하려는 듯 보였다.
“흥. 됐어. 어차피 다 지난 일인데. 무엇보다도 난 비록 오래 기다리긴 했지만 결국 목적을 이뤘어. 그래, 내가 이긴 거야. 내가…… 내가 그놈들을 이긴 거라고! 바로 널 통해서!”
이번에는 광기와 환희로 울부짖는다. 자이안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전 당신의 뜻을 대변한 적 없어요.”
“그런 건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교만과 음욕, 그 빌어먹을 것들이 네 손에 죽었다는 사실뿐이라고! 그리고 넌 앞으로도 남은 동지들을 차례차례 죽여 나가겠지! 네가 바라지 않아도, 너는 내 목적을 이뤄주고 있는 거야!”
두 팔을 치켜들며 소리치던 시기가 갑자기 모든 행동을 멈췄다. 마치 그대로 평범한 해골이 되어버린 것처럼. 침묵이 잠시 이어지다가, 그가 점잖게 두 손을 내리며 헛기침을 했다.
“내가 너무 흥분했네. 미안해. 너무 기뻐서 그만.”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쓰게 웃는다. 자이안은 혼란스러웠다. 금방이라도 마족으로 변모할 듯 보이던 그가 삽시간에 원래대로 돌아온 것이다.
“내 얘긴 이제 다 했어. 여기 갇힌 뒤 나는 시간의 흐름조차 잊을 정도로 오랜 시간 홀로 지냈지. 생명의 관리자라는 건 허울 좋은 명분일 뿐이었어. 생명의 나무가 제대로 작동했는지, 계획대로 정화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이 좁은 방에 갇혀서 한 발짝도 못 나가는 내가 알 바 아니잖아? 동지들이 매뉴얼이랍시고 뭘 주기는 했던 것 같은데 짜증 나서 훑어보지도 않았고. 어디 남아 있으려나? 하하, 이미 썩어서 흔적도 없어졌으려나.”
“지금 지상은, 오염의 흔적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어요. 솔직히 당신이 말한 그런 일들이 과거에 있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렵고요. 당신을 제외한 모든 인간이 이 차원을 떠났다면, 지금 ‘인간’을 자칭하고 있는 대체 우리는 누구죠?”
“그건 나도 몰라.”
“……예?”
얼이 빠진 자이안이 멍청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면 아까 호문클루스니 뭐니 의미심장한 얘기를 꺼낸 건 다 뭐였단 말인가?
“생명의 나무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대속자는 몇 가지 중규모 프로젝트도 병행했어. 그중에 신인류 창조에 관한 프로젝트가 있었던 것도 같고, 없었던 것도 같고. 누가 담당했더라? 분노…… 아니 강욕? 탐식인가? 확실히 기억이 안 나네. 아마 셋 중 하나일 테니까 나중에 만나면 물어봐.”
무책임한 소리였다. 그가 말한 세 대속자가 눈앞의 시기처럼 대화가 통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교만이나 음욕을 생각해 보면 도저히 낙관할 수 없다.
“자. 이제 보답을 받아야지?”
“예? 무슨 보답이요?”
“하하. 시치미를 떼려는 거야? 처음 봤을 때 나 역시 네게 듣고 싶은 게 많다고 했잖아? 너도 그 말에 동의했고. 이제 네가 내게 얘기해줄 차례야.”
해골이 덜그럭거리며 몸을 숙였다.
“어서 얘기해줘. 네가 죽인 동지들이 얼마나 꼴사나운 모습으로 영락했는지. 빨리.”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득을 보는 것도 편치 않았다. 자이안은 시기의 광기 서린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려 주의하며 천천히 얘기를 시작했다.
시기에 비하면 자이안의 말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시기의 반응은 극적이기까지 했다. 마족들의 행적을 들을 때마다 조롱하고, 비웃고, 이죽거리다가, 마침내 마족들이 최후를 맞은 얘기를 듣자 턱뼈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정신없이 웃어댔다.
“하하하. 그런 일이 있었구나. 마계, 그리고 마족이라.”
이윽고 자이안의 얘기를 모두 들은 시기는 턱을 매만지며 가볍게 고찰을 시작했다.
“차원 항행 함선이 최종적으로 도착한 차원이 바로 그 마계라는 차원이었겠지. 너희 어머니가 싸웠다는 미지의 존재는…… 글쎄? 뭘까? 원래부터 마계에 살고 있던 생명체? 그 존재는 다른 생명체를 흡수하고 동화시키는 특수한 힘을 가지고 있고, 마계에 발을 디딘 내 동족들은 그 존재에게 모두 동화 당하고 말았다…… 아마 이런 흐름이 아닐까?”
“저는 마물 역시 마족과 마찬가지로 마계에서 비롯된 괴물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미궁에는 지상의 마물들과 같은 종류의 마물들이 존재하고 있더군요. 미궁의 마물들을 당신이 창조한 거라면, 당신 역시 마계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는 게 아닌가요?”
“좋은 지적이야. 근데 그건 아냐.”
떠보는 듯한 그 질문에 시기는 담담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내가 만든 마물들은 지상이 모두 정화된 뒤 나타나기 시작한 마물들을 참조해서 빚은 거거든. 지상에 있는 마물들이 진짜고, 미궁의 마물들은 모방에 불과하지.”
「변명처럼 들리긴 하는데…… 아마 거짓말은 아닐 거다.」
「시기가 굳이 자이안한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는 진심으로 자이안을 자기 협력자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목적이 일치하는 건 사실이니 맞는 말이긴 한데…… 저런 정신 나간 해골의 협력자라니, 난 사양이다. 자이안, 너한테 양보하마.」
‘저도 좀…… 그런 것보다 생각을 좀 정리하고 싶어요.’
자이안이 머릿속으로 힘없이 푸념했다. 시기에게서 들은 얘기가 너무 복잡하고 방대한 나머지 머리가 과열될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푹 쉬면서 차근차근 정리하고 싶었다.
“아무튼, 다행이네. 계획대로 돼서.”
등받이에 몸을 기댄 시기가 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그의 손목 관절이 힘없이 바스러지더니 손뼈가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집념으로 억지로 움직이는 해골이 마침내 목적을 이루고 시체로 되돌아가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천장을 바라보며, 시기는 감회에 잠겼다. 돌이켜 볼수록 참 허술하고 조악하기 짝이 없는 계획이었다.
마물을 지배하는 기술, 호문클루스 창조의 오의, 수명 연장 기술 등, 본래 그의 문명으로부터 비롯된 여러 기술들을 그는 아무렇게나 탑의 마법사들에게 유출했다.
그렇게 하면 자기 문명의 내막을 아는 이들이 언젠가 그의 존재를 눈치채고 찾아올 거라고 생각해서. 예를 들면, 약속대로 그를 맞이하러 온 그의 동지들이라든지.
“어라? 그러면 너를 부를 필요가 없었던 거 아닌가? 너는 그냥 예측 밖의 변수였던 건가?”
“마물을 조종하는 마법을 퍼뜨린 게…… 당신이었군요.”
“응? 맞아.”
“그 마법 때문에 코르니카에서 많은 사람들이 위험에 빠졌어요.”
“알아. 네가 조금 전에 말해줬잖아?”
“당신은 아무런 죄책감도 못 느끼는 건가요?”
“죄책감? 왜?”
시기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해골이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기술을 가르쳤을 뿐이야. 어설프게 배운 기술을 악용하려다가 자멸할 뻔한 건 너희들이고. 그렇지?”
자이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성은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심정은 그러지 말라고 발버둥 쳤다. 그런 기술을 가르친 시기가 나쁘다. 마법사들, 그리고 코르니카의 벤야는 그의 기술에 이용당했을 뿐이다.
‘……그렇게, 알기 쉬운 상징을 세워두고 죄를 모두 덮어씌울 수 있다면 참 쉬울 텐데.’
문득, 시기의 본래 직책이 대속자라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인류의 모든 원죄를 짊어지고 대신 속죄하는 자. 그야말로, 죄를 덮어씌우기 위한 알기 쉬운 상징이 아닌가.
“갈등하고 있구나? 왜?”
“당신을 원망해야 할지, 그러지 말아야 할지, 판단할 수 없어서요.”
“네가 편할 대로 생각하면 그만 아냐?”
“그럴 수는 없어요. 그건 판단을 내리는 게 아니라 판단을 방치하는 거고, 자기 마음에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어렵게 돌아가는 걸 좋아하는구나.”
“……정했어요.”
자이안이 시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시기는 턱을 매만지며 자이안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당신을 원망할지 말지는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판단할 거예요.”
“……뭐어?”
시기가 저도 모르게 턱뼈를 쩍 벌렸다.
“그건 판단을 내린 게 아니라 판단을 미룬 거잖아?”
“지금은 당신에 대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어요. 이대로는 분명 감정에 휩쓸려서 그릇된 판단을 내리게 될 거예요. 그러니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 감정이 충분히 가라앉고 난 뒤, 당신에 대해 신중히 생각해 보고 판단을 내릴 거예요.”
그건 타인에 대해 판단을 내릴 때 당연히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어쩌면 누군가는 그렇게까지 번거롭게 생각할 필요가 있냐며 핀잔을 줄지도 모르지만, 자이안은 그런 과정이야말로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라고 생각했다.
“하…… 하하하하하.”
한참이나 굳어있던 시기가 갑자기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있잖아.”
이윽고 웃음을 멈추고,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 와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