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깊은 지하에 잠든 비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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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깊은 지하에 잠든 비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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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깊은 지하에 잠든 비밀(3)
2022.12.12.
까마득한 옛날. 그러니까, 이 행성이 한 차례 붕괴의 위험을 겪었다가 간신히 위기를 피해 정화되기도 이전의 이야기야.
응? 붕괴는 뭐고 정화는 또 뭐냐고? 너무 보채지 마. 가장 오래된 기억부터 모두, 내가 알고 있는 건 다 얘기해줄 테니.
이 행성에는 ‘지배자’라고 불러 마땅한 종족이 살고 있었지. 직립 보행을 하도록 진화한 결과 두 팔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고, 지혜를 가지게 되어 나약한 육신을 도구와 전술로 보완할 수 있게 됐어.
본래 천적이어야 했을 야수들을 모두 굴복시키고, 몰아내고, 온 땅을 지배하며, 순조롭게 행성 전역으로 퍼져 나갔지. 그리고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지칭했어.
천적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자연의 험난함조차 극복한 뒤 그들은 높은 지능을 자신들의 안락함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했어.
문명이 고도화되고, 생활이 안정되고,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그렇게 늘어난 인류가 지성을 모아 다시 문명을 발달시키고…… 문명을 이룩하고 언어로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이후로, 그런 선순환이 수천 년간 이어졌어.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열어서는 안 될 문을 열었지.
계기는 사소한 것이었어. 당시 우리…… 아, 나는 그때 그 시대의 생존자 중 하나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편하게 ‘우리’라고 지칭할게.
아무튼, 우리는 그때 워프 게이트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어. 이 행성에서 벗어나 우주로 향하기 위해서였지.
알고 있어? 우주는 네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광활해. 1초에 30만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빛이 수백만, 수천만 년 동안 쉬지 않고 달려도 그 끝에 도착할 수 없을 정도야.
기껏해야 수백 년밖에 살지 못하는 나약한 생명체가 그런 광활한 우주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어?
워프 게이트 말고도 아광속 항행이나 냉동 수면 등 우주를 여행하기 위한 아주 많은 수단이 동시에 연구되고 있었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문을 연 거야.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적인 우주 어딘가가 아닌,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어지는 워프 게이트.
문이 열리고, 엄청난 양의 미지의 에너지가 우리 행성으로 쏟아져 들어왔어. 문은 에너지를 쏟아낼 만큼 쏟아내고는 제멋대로 닫혀 버렸지.
프로젝트에 연관된 수뇌부들은 다들 혼비백산했지. 하지만 그 에너지를 안전하게 활용할 방법을 알아낸 뒤로는 여론이 반대로 뒤집혔어.
우리는 그 축복받은 에너지를 ‘마나’라고 부르고, 마나를 다루기 시작한 문명은 과거와도 비교할 수도 없는 속도로 고도화됐어.
응? 맞아. 지금 네가 품고 있는 그 에너지가 바로 ‘마나’야. 또 궁금한 거 있어? 아, 나중에 듣겠다고? 알았어. 그럼 계속할게.
아주 많은 것이 변했어. 뭐가 어떻게 변했는지는 자세히 설명하면 너무 길기도 하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으니까 생략할게.
최종적으로는, 그렇게 문명이 발달한 결과 모든 나라와 민족이 진정한 의미로 하나로 통합되었어. 그리고 마침내 일곱 원죄의 대속자가 만들어졌지.
교만. 음욕. 시기. 나태. 탐식. 분노. 강욕. 이 일곱 가지 부정한 감정을 우리는 인간의 모든 죄의 씨앗이라고 봤어. 문명이 얼마나 고도화되어도, 제아무리 생활이 안락해져도 범죄는 사라지지 않고 악인은 반드시 나타났지.
우리는, 우리가 더욱 고등한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 바로 그런 죄의 씨앗을 완전히 뽑아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 결과 ‘대속자 시스템(Redeemer system)’이 만들어진 거야.
숭고한 희생정신을 가진 지원자들을 모집하고, 엄격한 선정을 거쳐 일곱 명이 남았어. 그들 한 명이 원죄 하나를 담당하기로 했지. 수백억에 달하는 모든 인간의 부정한 감정을 혼자서 짊어지게 된 거야.
어떻게 그게 가능했냐고? 아…… 이걸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건 너무 복잡한데. 솔직히 나도 잘 기억이 안 나. 막연히 설명하자면, 전 인류가 느껴야 하는 각각의 감정을 대속자들이 대신 느끼게 하는 시스템, 이려나.
당연히 엄청난 돈이 드는 프로젝트였어.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되는 프로젝트이기도 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프로젝트는 예상보다도 더 성공적이었어.
일곱 대속자들은 전 인류의 원죄를 짊어지면서도 이성과 지성을 잃지 않고 온전한 정신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지. 그뿐만이 아니라 원죄가 아닌 다른 감정도 어렴풋하게 느끼고 교감할 수 있는, 일종의 감응 능력을 얻게 됐어.
우리, 그러니까 대속자들, 눈치챘겠지만 나도 대속자 중 한 명이었거든. 아무튼 우리는 곧 기존의 수뇌부들을 밀어내고 나라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어.
우리는 그들보다도 훨씬 직접적으로 민심을 이해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국책에 반영할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대속자 시스템 덕분에 범접할 수 없는 무력을 손에 넣기도 했고.
시스템에는 수백억 인류의 감정에 짓눌린 대속자들의 정신이 쉽게 붕괴하지 않도록 하는 여러 기술이 접목되어 있었거든.
그렇게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인류 공동체가 만들어졌어. 우리는 우주로 진출하려던 욕심을 접고 이 행성에서 오랫동안 평화를 누렸지. 아마 대충 천 년 정도…… 그보다 더 길었나?
아무튼, 재미있는 건 원죄로부터 자유로워진 인류가 더 이상 문명의 발전을 바라지 않게 됐다는 거야. 발전을 거부하지는 않지만, 적극적으로 추구하지도 않게 됐지. 문명의 발전이라는 건 대부분 더 편안한 삶을 누리고 싶다는 강한 욕심에서 비롯되니까.
그렇게 해서 인류는 가진 것에 만족하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참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어.
우리는 애초에 첫 단추부터 완전히 잘못 끼웠던 거야.
마나는, 결코 축복받은 에너지가 아니었거든.
* * *
숨죽인 채로 듣고 있던 자이안은 얘기가 멈췄음을 한 박자 늦게 깨닫고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시기가 턱을 괸 채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이라고는 없는 텅 빈 해골이건만 즐거움이 느껴졌다.
“그렇게 재밌게 들어주니까 나도 기쁜걸.”
“당신들이 오래전부터 이 땅에 존재했던 인류고, 당신이 대속자 중 한 명이라면…… 저는, 우리는 뭐죠? 당신들의 먼 후손인가요?”
“글쎄? 후손이라……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런데, 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잘 모르겠네. 호문클루스라는 개념을 알고 있어?”
“대략적인 내용이라면…….”
호문클루스, 보석탑의 마법사들의 연구 과제 중 하나였다. 핵심은 인공 생명체의 창조. 말하자면 암수의 생식이 아닌 마법적인 수단으로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것을 뜻했다. 자이안도 자세한 건 알지 못했다.
어렸을 적 그의 스승 신스 웰플레인에게서 대략적인 설명을 짧게 들었을 뿐이다.
“시험관 속에서 마법으로 탄생한 아기와, 부부의 성교를 통해 태어난 아기는 뭐가 다를까?”
“……네?”
“인공적으로 창조되었다. 이 인식을 어디까지 적용해야 할까? 성교를 통해 자연적으로 태어난 아기는 인공적으로 창조된 게 아니라고 확언할 수 있을까? 이 아기 역시 자식을 갖겠다는 부부의 의도로 계획되고, 성교를 통해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 세포분열을 거쳐 ‘인공적으로 창조’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오오, 철학적인데요. 태생의 차이가 개인의 본질을 정의할 수 있느냐는 거죠? 저 친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거고.」
「어려운 문제구만…… 아니, 정말로 어려운 문젠가? 애가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는지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흐음. 이거 재밌는데. 한 번 고찰해볼 가치가 있겠어.」
재밌는 화두를 눈앞에 둔 각성자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꺼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자이안은 시기의 시선을 느꼈다. 뻥 뚤린 두 눈구멍이 펜던트에 고정되어 있었다.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펜던트의 체인을 단단히 붙잡았다.
“신기한 물건을 가지고 있구나. 잠깐 만져봐도 될까?”
“안 됩니다.”
“그럼 보는 건 괜찮지? 아무 것도 안 건드릴 테니.”
자이안은 대답 대신 불편함을 감추기 위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어차피 단순히 보기만 하는 걸 막을 수도 없었다.
“으음. 호오. 흐으으음.”
몇 번 의미심장한 탄성을 터뜨린 시기가 턱뼈를 매만지며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꼭 기분 나쁜 웃음소리처럼 들렸다.
「자이안. 잠깐 시야 좀 빌리자.」
펜던트의 교신 기능을 응용, 자이안의 주변을 부감하듯 관측하는 것이 아니라 자이안이 보고 있는 광경을 공유하는 기술이다.
자이안의 눈동자에 일순간 금빛이 어른거렸다. 잠시 뒤 시야 공유를 마친 프레이가 타이르듯 말했다.
「너무 경계할 것 없다. 저 녀석, 네가 그냥 툭 치기만 해도 죽을 정도로 약한 상태야.」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상대가 마족이라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거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마주한 마족, 교만과 음욕 모두 인간을 벌레 이하의 존재로 취급하며 마물이나 다를 바 없는 행동을 벌였다.
그런 자들이 원죄를 짊어지는 대속자라는 존재였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신기한걸. 어디서 구한 거야? 너희들의 문명으로는 결코 만들 수 없는 물건일 텐데.”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하하, 통렬하긴. 알았어, 알았다니까. 네게 많이 중요한 물건인 모양이지?”
“얘기 더 안 할 거예요? 다 안 끝난 것 같은데.”
“오? 맞아. 그랬지. 내 정신 좀 봐. 잠깐만,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기억을 되짚어보듯 두개골을 똑똑 두드리던 시기가 이윽고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 * *
가장 처음 나타난 징조는 자연재해였어. 본래 우리는 행성 대규모 마나 구조체로 관리하고, 모든 자연현상을 완벽하게 관측하며, 정밀하게 제어하고 있었어.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돌발적인 자연재해가 벌어지기 시작한 거야.
처음에는 마나 구조체의 노후화, 혹은 이상이라고 짐작했어.
하지만 몇 번을 점검해도 마나 구조체에는 아무런 문제도 발견할 수 없었고, 혹시 몰라 기능을 개선한 뒤에도 돌발적인 자연재해는 계속 일어났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잦아졌지.
나태를 비롯한 일부는 초기부터 위험을 느끼고는 면밀한 조사를 주장했고, 시간이 지나고 나자 사태를 방관했던 다른 대속자들도 그 의견에 동의했지.
아, 참고로 나는 방관하던 측이야.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됐다고? 하하, 알았어.
두 번째 징조는 동식물의 변이였어. 가축으로 기르던 온순한 초식 동물이 갑자기 흉포해져서 사람을 공격하거나, 식용에 적합하게 유전자를 조정한 과일이 갑자기 치명적인 독성을 가지는 일들이 일어났지.
피해 규모는 작았지만 민심은 급격하게 불안해졌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우리는 천 년이 넘게 아무 위기도 겪지 못하고 평화를 누렸으니까.
오랜 조사 끝에 마침내 원인을 찾았어. 충격적인 내용이었지. 우리가 축복받은 힘이라 여기며 다루고 있던 마나가 이 행성을, 나아가 우주를 오염시켜 이 세계를 생물이 살 수 없는 환경으로 변질시키고 있었던 거야.
당장 마나의 사용을 멈추고 더 늦기 전에 행성을 정화해야 했지만…… 당연히 불가능했지. 우리 문명은 마나 그 자체로 이루어진 셈이었으니까. 모든 기술이 마나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어.
행성을 정화하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봤자 마나 오염을 가속화할 뿐. 말하자면, 우리는 그저 살아있는 것만으로 행성을 오염시키는 병원균이 되어버린 거야.
“워프 게이트에 관한 자료를 모두 모아줘. 연구를 다시 시작하자.”
우리는 결단을 내렸어.
“고향을 떠나, 다른 차원으로 향하자. 그곳에 자리를 잡고, 같은 과오를 거듭하지 않도록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