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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깊은 지하에 잠든 비밀 (2) (69/210)


69화 깊은 지하에 잠든 비밀 (2)
2022.12.11.


최근 며칠간 보석탑 전체에 소란이 끊이지 않았다. 잊을 만하면 사이렌이 울리고, 곳곳에서 늙은 마법사들이 노성을 터뜨렸다.

‘지금까지 열다섯 군데.’

탑 곳곳에 준비한 거점 중 한 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유리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절반도 못 돌았는데…… 이제는 섣불리 움직이면 바로 눈에 띌 거야. 진정될 때까지 하루 이틀 기다리면…… 그러면 경비가 더 삼엄해지겠지. 으으, 어렵다.’

연구실을 파괴하며 지금까지 구해낸 희생자의 수가 총 스물. 전체에 비하면 결코 많지 않은 수였으나, 그것만으로도 유리아에게는 큰 족쇄였다.

지켜야 하는 이가 한 명 늘어날 때마다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범위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구해낸 이들이 얌전히 유리아의 지시에 따른다는 사실이었다. 도저히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모습이 되어버렸지만, 내면까지 마물이 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대화가 통하지 않고, 복잡한 말은 알아듣지 못해도 최대한 지시에 따르려 노력했다. 유리아가 자신들을 구해줬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아티팩트는 아직 충분히 있어. 수단을 바꿔볼까.’

적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빈틈을 넓히는 게 중요했다. 단순히 한쪽에 소란을 일으키고 반대쪽에서 움직이는 건 이제 효과가 약했다. 그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허상을 만드는 아티팩트. 미끼를 만들자.’

좁은 공간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희생자들에게 얌전히 기다리라고 부탁하고, 유리아는 조심스럽게 거점을 빠져나갔다. 환기구를 통과해 복도로 나온 뒤 곧장 천장에 달라붙었다.

그 상태로 기척을 죽인 채 이동하며 목표를 물색했다.

‘저 아저씨가 괜찮겠네. 지위도 제법 높아 보이고.’

적당한 목표를 찾은 유리아가 소리도 없이 내려왔다. 그대로 목표의 등 뒤에 바짝 접근한 뒤, 입을 틀어막고 전기충격을 일으키는 아티팩트를 옆구리에 가져다 댄다. 마법사가 거품을 내며 거세게 경련했다.

상대가 의식을 잃은 것을 확인하고, 유리아는 다시 유령처럼 천장에 붙으며 1회용 아티팩트를 바닥에 던졌다. 마법사가 쓰러짐과 동시에 아티팩트가 작동했다.

마법사가 쓰러지는 소리에 돌아본 다른 마법사들의 눈에 범인인 듯 보이는 인영이 빠른 속도로 도망치는 광경이 비쳤다.

“저 여자다! 저 여자를 쫓아!”

“저 여자가 범인이다! 조교! 넌 당장 원로들에게 연락해! 범인을 찾았다고!”

그런 일이 일정 간격으로 탑 곳곳에서 벌어졌다. 곧 탑 전체가 존재하지도 않는 범인을 붙잡기 위해 어수선해졌다.

‘됐다. 이걸로 며칠은 더 벌 수 있겠어.’

허상을 만드는 아티팩트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유리아는 곧장 교란을 일으킨 곳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인체 실험실로 향했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엉뚱한 곳을 뒤지고 있는 덕분에 이 근방은 한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작전이 제대로 먹혔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유리아는 복잡한 장치로 숨겨진 실험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 근처를 목표로 삼을 거라고 생각했지. 예상대로였군.”

졸트 타기온 원로교수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자이안은 눈앞에 드러난 거대한 건축물에 시선을 빼앗겼다. 땅에 내리꽂힌 듯한 거대한 원통형의 기둥이었다. 너비는 수백 미터에 이르렀고 금속 재질 표면에 희푸른 선이 거미줄 같은 복잡한 문양을 그리며 발광하고 있었다.

잠시 자이안의 시야를 빌려 관찰하던 프레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표면의 문양 전체가 MP 회로로군. 나도 해석하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는데, 이거.」

「이게 마법사들이 말한 기능 중추일까요?」

「십중팔구는 그럴 거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조종하느냐인데…… 일단은 케이를 따라가 봐야겠군.」

마물의 낌새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나 MP의 냄새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짙었다. 자이안은 기둥의 주변을 따라 이어진 나선형 계단을 케이를 따라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이윽고 기둥이 박혀 있는 밑바닥에 도달했다. 깊이로 따지면 아마 100층 정도이리라. 미궁의 진정한 끝이었다. 앞서 나간 케이는 밋밋한 기둥 앞에 손을 짚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케이?”

“잠깐만 기다려, 친구. 지금 문을 열고 있거든.”

그리 대답하는 케이의 눈이 형형색색으로 빛났다. 이윽고 기둥의 표면 일부가 소리도 없이 지워지듯 사라졌다. 기둥에서 손을 뗀 케이가 자이안을 바라보며 손짓했다.

“됐다! 이제 들어가자.”

케이의 태도는 마치 자기 집에 친구를 초대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자이안은 잠시 주저했으나 이내 마음을 다잡고 그를 따라 기둥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석실이었다. 정확히는, 넓기는 했으나 기둥 전체의 크기에 비교하면 턱없이 좁았다. 벽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굵은 선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고, 일부는 바닥까지 내려와 어딘가로 이어져 있었다.

주변을 살핀 자이안이 천천히 정면을 향했다.

그것은 석관, 어쩌면 탁상이나 침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바닥까지 내려온 굵은 선들이 바로 그 석관에 이어져 있었다.

“어서 와, 내가 뿌린 씨앗.”

그 위에 목소리의 주인공이 앉아 있었다.

“마침내 여기까지 도착했구나. 널 진심으로 환영해.”

환희에 찬 목소리와는 반대로 그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도 당연했다. 그의 모습은 말라붙은 해골에 불과했으니까. 아마도 한때 고급스러운 의복이었을 천은 찢어지고 마모된 채 그의 뼈에 허술하게 감겨 있었다.

메마른 뼈는 먼지와 부패의 흔적으로 황색에 가깝게 변색되어 있었다. 오직 두개골 위에 얹힌 선홍색 서클릿만이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듯 붉은 광택을 발하고 있었다.

“당신은…….”

“나는 ‘시기’라고 해. 이름은 있지만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소리의 나열에 불과하니까 자칭하지 않겠어.”

“당신은, 마족이군요.”

눈을 가늘게 뜬 자이안이 그리 말했다. 그러나 정작 자기 말에 가장 큰 위화감을 품은 이는 자이안 본인이었다. ‘시기’라고 스스로를 밝힌 눈앞의 해골이 내는 냄새는, 종류를 나누자면 분명 마족의 것이었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었다.

‘지금까지 만난 마물, 마족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깨끗해. 그리고…… 약해. 마치 자연사하기 직전에 이른 쇠약한 노인처럼.’

눈앞의 마족은 죽어가고 있었다. 겉모습이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본질적인 부분, 말하자면 영혼이라고 해야 할 부분이 걷잡을 수 없이 부서지고 있는 상태였다.

자이안의 판단으로는 길어야 한 달 남짓이 그의 한계였다.

“당신이 이 미궁의 주인인가요?”

“맞아.”

“미궁을 만든 것도 당신인가요?”

“그것도 맞고.”

“무슨 목적으로…….”

“하하하. 넌 지금 내게 듣고 싶은 게 아주 많을 거야. 그리고 나도 네게 말하고 싶은 게 아주 많지. 그런데 그렇게 어정쩡하게 서서 질문 하나, 대답 하나, 그런 식으로 되겠어?”

자이안은 신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마족은 지금껏 상대한 다른 마족과 전혀 달랐다. 싸울 의지가 없었고, 정상적으로 말이 통했다.

마족의 정체. 목적. 마계와 마물에 대해. 나이아를 만난 적은 있는가. 과거 나이아가 상대했던 정체불명의 거대한 존재를 알고 있는가.

색욕이 언급했던 ‘찬탈자’는 무엇인가. 의문은 산더미처럼 많았다. 그리고 그 모든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두 번 다시없을 기회…….

“그럼, 어디 보자…… 차 마시는 거 좋아해?”

“……예?”

태평한 소리에 자이안의 표정이 괴상하게 찌그러졌다.

* * *

“캐모마일 티를 좋아하는구나. 첫인상하고 딱 맞는걸.”

“어머니가 원래 캐모마일 티를 좋아하셨어요.”

“오, 그래? 자식의 취향이 부모의 취향을 닮는 것도 자주 있는 일이지.”

자이안은 눈앞에 놓인 찻잔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살 한 점 없는 해골인 ‘시기’가 직접 탄 차였다.

독이 없다는 건 냄새로 알 수 있었고,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깔끔하게 우려낸 차였지만……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솔직히 좀 꺼려졌다.

애초에 적이라고만 여겼던 마족과 이렇게 마주 보고 티 테이블에 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었다. 그러나 잠시 갈등한 자이안은 과감하게 찻잔을 들었다.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눈앞의 마족은, 신뢰할 수는 없더라도 이성적인 대화를 나눌 수는 있는 상대다.

“맛있……네요.”

그런 말이 나왔다는 사실도, 그게 솔직한 감상이라는 사실도 낯설었다. 정작 맞은편에 앉은 시기는 차에는 손도 대지 않고 가만히 자이안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에게도 차를 권유하려다가, 자이안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장기조차 남아 있지 않은 그가 어떻게 차를 마신단 말인가.

“서로 얘기를 하기 전에, 상황 정리를 좀 할까. 케테르크의 눈을 빌어 어느 정도 보기는 했지만, 모든 걸 볼 수 있었던 건 아니니까.”

자이안이 찻잔을 내려놓은 순간을 가늠해 시기가 말을 꺼냈다. 자이안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상에서 있었던 일, 케이를 발견하고 그의 안내를 따라 여기까지 도착한 일을 간략히 설명했다.

“케테르크라는 건 케이의 이름인가요?”

“맞아. 내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지. 난 여러 피조물 중에서 저 아이를 특히 아꼈거든. 미궁의 제어권을 공유하고 관리를 대신 맡겼을 정도니까.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이름 같은 게 본질을 정의하는 건 아니지. 편할 대로 불러.”

본명 케테르크, 약칭 케이. 다행히 어느 정도 공통점이 존재하는 덕분에 익숙해지기는 쉬울 것 같았다. 어쩌면 ‘실험체 K’라는 명칭 자체가 본명인 케테르크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몰랐다.

문제는 정작 누구보다도 그 말을 들어야 할 당사자가 아무 관심 없다는 듯 석관 위에 대자로 드러누워서 뒹굴거리고 있다는 사실이지만.

“정말 다행이다. 여러 변수가 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내 의도대로 됐구나.”

“제가 여기 도착한 게, 당신의 의도라고요?”

“맞아. 정확히는, 씨앗 몇 개를 허술하게 뿌려 놓고 그렇게 되기를 바랐을 뿐이지만. 일전의 나는 면밀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어. 하지만 온갖 행운과 우연이 겹쳐 너는 결국 여기까지 찾아왔지. 이제 내 바람은 이뤄질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닌 너를 통해서.”

“제가 당신의 바람을……? 그건 어려울 것 같은데요.”

“아니, 넌 분명 내 바람을 이루게 될 거야. 왜냐면 내 바람은 내 동포들 ― 네가 알기 쉽게 말하면 모든 마족의 파멸이니까!”

급격하게 고양된 목소리가 석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직전까지의 점잖은 모습이 마치 거짓말 같았다. 자이안은 말문이 막힌 채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그가 하하, 하고 멋쩍게 웃었다.

“아직 감정 제어가 잘 안 되네. 칠죄종의 주박은 이게 문제라니까.”

“칠죄종의 주박은 또 뭔데요?”

“응? 알고 싶어? 알고 싶구나?”

해골이 확 몸을 내밀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이상하리만치 얄미웠지만, 그렇다고 고개를 가로저을 수는 없었다.

“장난이야. 그렇게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면 상처받는다고. 이런, 생각해보니까 난 심장이 없어서 상처도 안 나겠다. 하하!”

“…….”

자이안은 솔직히 눈앞의 해골을 한 대 때려보고 싶었다.

“알았어, 알았어. 오랜만에 대화가 통하는 상대를 만나서 좀 신났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보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얼른 본론으로 들어가자. 그러니까, 이게, 어디부터 시작할까…… 그냥 처음부터 다 얘기해야겠다.”

“잠깐만요. 그 얘기 얼마나 걸리는 거죠?”

“글쎄. 한 반나절 정도?”

“……너무 오래 걸리는데요.”

“그래? 그럼 이 방의 시간을 좀 늦추지 뭐. 여기서의 반나절이 바깥의 두 시간 정도가 되게 맞추면 되지?”

“시간을 조종한다고요?”

“시간 자체를 조종하는 게 아냐. 이 방의 시간을 조종하는 거지. 이 공간의 지배자인 내가 그 정도도 못 하는 건 이상하잖아?”

그런 말이 태연하게 나오는 게 더 이상했다. 그러나 자이안은 구태여 그런 지적을 꺼내지 않기로 했다. 정말로 그가 시간의 흐름을 지배할 수 있다고 해도, 너무 무의미하게 시간을 끌고 싶지는 않았다.

“자, 그러면 슬슬 시작할까.”

시기가 입을 열었다.

……이건, 너희 이전에 이 행성을 지배했던 선주 인류들의 이야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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