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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깊은 지하에 잠든 비밀 (1) (68/210)


68화 깊은 지하에 잠든 비밀 (1)
2022.12.10.


미궁 심층. 아마도 68층 부근.

“후우…….”

주위를 둘러본 자이안은 모든 적이 쓰러졌음을 확인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마물들 평균이 상위 1급은 될 것 같은데. 대체 이 미궁은 얼마나 깊은 거지?」

「이 정도로 깊고 넓은 미궁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네요. 음, 으음……. 자이안, 아주 잠깐이면 되니까 저 좀 소환해 보면 안 될까요?」

「가뜩이나 MP 관리 빡센 애한테, 지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냐? 쟤가 괜찮다고 해도 내가 뜯어말릴 거다.」

「아하하하. 기대도 안 했어요.」

프레이와 크룩스의 대화에 자이안도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나 한 자리에 느긋하게 있을 틈이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전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케이와 합류해, 자이안은 즉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깊이 내려갈수록 점점 마물들이 강해졌다. 60층을 넘은 현재, 아직까지는 피해 없이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일격에 적을 쓰러뜨리는 건 불가능해졌다.

마물들의 강함도 강함이지만, 마물들이 점점 흉포해지는 것도 만만찮은 문제였다. 잠깐이라도 한 자리에 발이 묶이면 사방에서 마물들이 달려들었다.

한 마리를 쓰러뜨리는 동안 두 마리가, 그 둘을 쓰러뜨리는 동안 네다섯 마리가, 그리고 그 네다섯을 쓰러뜨리는 동안…… 그런 식으로 일대의 마물을 모조리 쓰러뜨리기 전까지는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

체력도, 정신력도 소모가 심대했다.

각성자는 적어도 마물 상대로는 그 어떤 종류의 병사보다 지속 전투 능력이 뛰어나다. 마물을 쓰러뜨릴 때마다 MP를 흡수해 회복하며 강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궁에서는 그러한 전제가 무너졌다. 마물을 쓰러뜨려도 자이안이 흡수하는 MP는 소량에 불과했다. 지상에 가까운 층에서는 거의 실감되지 않을 정도였으나, 깊이 내려갈수록 점점 더 그런 경향이 심해졌다.

60층을 넘은 지금은 강력한 마물을 쓰러뜨려도 한줌의 MP밖에 흡수할 수 없었다.

자이안이 본연의 자질과 펜던트의 보조 덕분에 남들보다 몇 배나 더 뛰어난 MP 흡수 효율을 보인다는 걸 감안하면, 실제로는 MP를 거의 흡수하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다.

「남은 MP는 미궁 깊은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 아무래도 미궁 최심부에 있다는 기능 중추에서 마물이 만들어내는 MP, 죽을 때 내뿜는 MP를 회수해 그걸 가지고 새로운 마물을 만들어내는 모양인데.」

「그러고도 남은 MP가 미궁에 산재한 천연자원을 침식해서 탑의 마법사들이 말하는 ‘미궁 자원’이 만들어지는 거겠죠.」

마안을 연 프레이가 현상을 분석하고 크룩스가 이를 보강했다. 추측이긴 했으나 더없이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 당장은 해결할 방법이 없단 소리잖아요?」

「그렇겠네에. 아티팩트로 MP 흡수를 보조하려고 해도, 펜던트보다 뛰어난 걸 만들지 못하는 이상 별 의미는 없을 거고.」

각성자들의 의견은 부정적이었으나 정작 자이안은 크게 걱정을 하고 있지 않았다. 정확히는, 걱정이라든가 불안이라든가 하는 감정 자체를 가질 여력이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마물 하나를 쓰러뜨리는 데 걸리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단축하는 것뿐이었으니까.

케이의 안내를 따라 길을 나아가고 마주치는 마물을 차근차근 쓰러뜨리며, 동시에 적을 효율적으로 쓰러뜨릴 방법을 연구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맡으며 적의 습성, 행동 양식, 취약점을 분석한다.

가령 어떤 마물은 시력이 과도하게 발달해서 강한 빛에 약하다. 어떤 마물은 몸이 축축하게 젖어 있기 때문에 몸을 마르게 만드는 불꽃을 두려워한다.

그런 식으로 하나씩, 하나씩. 힘으로 압도할 수 없다면, 경험으로 극복한다.

같은 적을 쓰러뜨리는 데 총 네 번의 공방이 필요했다면, 다음에는 세 번. 그다음에는 두 번.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전에는 네 번의 공방으로 쓰러뜨렸던 마물을 다음에는 다섯 번 이상에 걸쳐 쓰러뜨린 적도 많았다. 그러나 자이안은 초조해하지 않았다.

오직 적을 쓰러뜨리는 것에만 집중하는 그의 의식에 그런 하찮은 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머릿속 각성자들의 말소리도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로부터 몇 층을 더 내려가고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났을까. 공간감도, 시간감도 모두가 무뎌지고 오직 스펙트럼을 휘두르는 자신과 쓰러뜨려야 할 적만이 남게 되는 그런 순간이었다.

“…….”

대검을 휘두른 모습으로 잠시 굳어 있던 자이안이 천천히 자세를 되돌렸다. 그리고 눈앞에 쓰러진 마물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일격이었다. 강철보다도 더 단단한 갑각과 갑각의 미세한 틈새를 파고들어 검을 찔러 넣고, 교묘하게 궤도를 꺾으며 심장을 포함한 중요 장기들을 일시에 도려냈다.

시간 낭비도 없고 군더더기도 없는 이상적인 교전이었다. 무엇보다도, 처음 보는 마물이었다.

‘몸이 멋대로…… 아냐. 멋대로 움직인 게 아니라…….’

조금 전,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기묘한 상태였다. 눈앞의 적을 확인한 순간 의식과 몸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반응했다.

예리하게 다듬은 오감이 적의 전신을 가차 없이 파고들며 취약점을 분석하고, 몸이 실시간으로 그에 맞춰 움직였다. 그 결과가 눈앞의 시체였다.

「……벽을 넘었네.」

스쿼트를 하던 자세로 얼어붙어 있던 크룩스가 감탄한 듯한, 어쩌면 질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를 포함해 각성자들 전부가 얼어붙어 있었다. 그만큼 놀라운 광경이었다.

「와…… 형, 이거 보여요? 저 지금 온몸에 소름이 돋아서 가라앉지를 않고 있는데.」

「거 우연이구만. 나도 지금 똑같은 상태다.」

무도의 달인인 크룩스, 달인은 아니지만 지식만은 그에 못지않은 프레이가 가장 올바르게 자이안의 경지를 이해했다.

아르스와 유민 역시,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 자이안이 얼마나 높은 경지에 도달한 것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건 정말이지…… 재능, 아니, 고작 그런 단어 가지고는 정의가 안 되네요. 재능은 기본적인 거고, 뼈를 깎는 노력, 오랜 경험, 본인의 심성, 그런 요소들이 모두 완벽하게 갖춰져 있어야 돼요. 그게 전부 준비돼 있어도, 저 나이에 도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겠죠.」

「그 어려운 일을 자이안이 해냈다. 역시 알코스의 피야, 어디 안 가는구만.」

「아저씨가 대단한 게 아니라 자이안이 대단한 건데요?」

「나도 안다. 아니, 넌 내가 뭔 말도 안 했는데 태클부터 거냐?」

「제가 태클 안 걸면 이상한 말 할 거잖아요.」

자이안 역시 자신이 도달한 위치를 올바르게 인식했다. 어렸을 적,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검과 마법을 단련하며 막연하게 꿈꾸던 바로 그 경지였다.

어쩌면, 그가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았더라면 발을 디디기 위해 평생의 목표로 삼았을지도 모르는 경지.

“하하. 다행이네요. 이제 시간 끌릴 일은 없겠어요.”

「……감상이 그게 다냐? 내가 너였으면 지금쯤 미친놈처럼 소리 지르고 난리가 났을 것 같은데.」

“그랬다간 사방에서 마물이 몰려올 텐데, 어떻게 그래요?”

「말이 그렇다는 거다, 인마. 그 정도로 기뻐해도 좋다는 거라고.」

“글쎄요. 기쁘긴 한데…….”

자이안은 쓰게 웃었다. 기쁨은 컸다. 그러나 환희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정도는 아니었다. 각성자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힘을 알게 된 지금, 그런 중간다리에 만족하고 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그가 바라보는 등은 아직도 먼 곳에 있었다. 이제야 겨우 현실적인 가능성이 생긴 것에 불과했다.

“기쁨에 잠기는 건 미궁을 공략하고 난 다음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거야 뭐…… 그렇기는 하지.」

다시 자이안은 케이와 함께 미궁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MP 흡수 효율은 형편없었고 체력 소모도 컸으나, 반대로 정신적인 여유는 훨씬 늘었다.

어지간한 적은 이제 일격으로 쓰러뜨릴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일격으로는 쓰러뜨릴 수 없는 적도 마찬가지로 거의 시간을 들이지 않았다.

마물 하나를 상대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그 소리를 들은 마물이 몰려드는 것보다 빨랐다. 답파 속도는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빨라졌다.

“케이. 기억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어?”

“응? 응…… 글쎄? 뭔가 기억나는 것 같기는 한데, 아직 잘 모르겠어. 더 내려가 봐야 될 것 같아!”

60층 이후로 끊겼던 대화도 다시 시작했다. 대부분은 일상적인 것이었지만, 가끔 중요한 내용이 화두에 오를 때도 있었다. 대부분은 케이의 기억에 관한 것이었다.

“어…… 저 친구는 전에 봤던 것 같아. 가끔 내 앞을 지나다닐 때 콧김을 내뿜으면 깜짝 놀라서 도망치고는 했어.”

케이가 가리킨 것은 체고가 2미터를 넘고 머리부터 엉덩이까지는 5미터에 달하는 황소를 닮은 사족 보행형 마물이었다.

저런 마물을 콧김 하나로 겁에 질리게 했던 케이의 정체가 과연 뭘까 궁금했으나, 케이는 자신에 대한 건 여전히 조금도 떠올리지 못했다.

“아, 이쪽 봤다.”

“우리가 너무 시끄럽게 떠들었나 보네. 케이, 물러나.”

미궁 상층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케이는 전투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본인이 꺼리기도 했고, 자이안 역시 외모도 정신연령도 어린아이나 다름없는 그를 전력으로 고려할 생각은 없었다.

다행히 마물들은 결코 케이를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눈먼 공격에 휘말리지 않도록 멀리 떨어뜨려 놓기만 하면 안전했다.

“여긴 원래 분수가 있던 자리야. 지금은 기능 중추가 공급을 끊었나 봐. 작동을 안 하네. 친구들이 여기 잔뜩 모여서 느긋하게 쉬고는 했었는데.”

80층의 어느 길목에 위치한 커다란 공터를 보며 케이가 꺼낸 말은 그랬다. 그곳 말고도 케이는 정체불명의 공터나 막힌 길목을 발견할 때마다 원래 어떤 역할을 하는 장소였는지 아련한 눈으로 설명했다.

“아, 여기는…….”

그리고 88층에 도달했을 때.

“여기는…… 맞아. 내 방이야.”

지금까지 중 가장 크고 넓고 높은 공터였다. 케이 같은 어린아이를 한복판에 세워놓으면 먼지처럼 보일 정도였다.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본래 여기 머물던 존재는 그 크기에 어울릴 만큼 거대한 존재였으리라.

“자신에 대해서 좀 기억났어?”

“아니? 그렇진 않아.”

케이가 천진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여기가 내 방이라는 것만 기억난 거야. 내가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나는 지금 기억에 제한이 걸려 있는 것 같아.”

“기억의 제한? 마법사들이 건 거야?”

“아니. 내 아빠가.”

“……?”

갑자기 튀어나온 영문 모를 단어에 자이안도, 각성자들도 혼란스러워졌다. 케이는 그를 놔두고 홀가분한 걸음으로 앞서가기 시작했다.

“자이안, 얼른 따라와. 곧 도착할 거야.”

의문을 뒤로하고 자이안은 우선 그를 쫓기 시작했다.

「마물도 생식을 해요?」

「그건 뭐…… 종에 따라 천차만별이지. 대표적으로는 오크. 이거는 뭐 내가 말 안 해도 알 거고, 그 외에는 고블린이라든가…….」

「현실에 존재하는 생물과 비슷한 모습의 마물은 생물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내장기관을 갖추고, 그에 따라 정상적으로 번식하는 경우가 많다는 논문이 있어요. 반대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모습의 마물은 생식기 자체가 없는 경우가 많죠.」

「이렇게 커다란 공동에 살 정도면 전자는 아닐 것 같은데에.」

「그런 경향이 아주 높다는 거지 반드시 그렇다는 건 아니니까요. 어쩌면 케이가 말한 ‘아빠’라는 단어가 은어나 비유일 가능성도 있고요.」

「복잡하게 생각할 거 뭐 있냐? 최심부까지 내려가 보면 대부분은 알 수 있겠지.」

「만약 거기까지 갔는데도 모르면요?」

「뭐? 그럼 모르는 거지, 뭐. 넌 상대가 어디 살았는지 어느 나라 출신인지 어디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는지 뭐 이런 걸 알아야만 친구가 되냐?」

「아뇨, 그게 아니라…… 힝. 아저씨는 맨날 나만 못살게 굴어.」

「얼씨구. 야, 너네 나라에는 적반하장이라는 말이 없냐?」

89층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마물 자체가 그다지 많지 않았고, 기분 나쁠 정도로 온순했다. 자이안이 먼저 공격하기 전까지는 조금도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시험 삼아 한 마리를 죽이고 영문 모를 죄책감에 휩싸인 자이안은 이 층은 얌전히 지나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아빠가 명령을 내렸나 봐.”

“뭐? 그게 무슨…… 네 아버지가 살아있다고?”

“응. 여기 아래에.”

케이가 가리킨 방향은 발밑이었다. 자이안은 짧게 숨을 삼켰다. 어쩌면, 아니, 분명히, 이대로 내려가면 곧 케이가 말한 ‘아빠’와 만나게 될 것이다.

“여기부터는 마법사들이 말하는 기능 중추야. 나랑 아빠는 그냥 방공호라고 불렀어.”

90층.

미궁의 최심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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