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그녀들의 전장(2)
(67/210)
67화 그녀들의 전장(2)
(67/210)
67화 그녀들의 전장(2)
2022.12.09.
‘한동안은 밤에 구름이 짙을 것 같아.’
정오를 넘긴 시각. 간소하게 차려진 식사를 기계적인 동작으로 입에 담으며 소아레스는 멍하니 그런 것을 생각했다.
화창하지도, 그렇다고 먹먹하지도 않은 어중간한 날씨였다. 눈앞에는 그녀의 수발을 맡은 수도사제가 조심스럽게 음식을 접시에 옮겨 담고 있고, 등 뒤에서는 머리가 벗겨진 주교가 지루한 목소리로 세뇌의 내용을 반복하고 있었다.
방 안에는 불쾌한 냄새가 가득했다. 수도사제와 주교는 정화의 신성술이 담인 천으로 코와 입을 막고 있었다.
‘세뇌도 거의 막바지인 것 같은데…….’
매일 정해진 시간마다 나오던 액체 형태의 약물이 끊긴 것이 3일 전. 대신 법왕국은 여러 마약을 배합한 향을 피우기 시작했다.
즉효성은 적지만, 세뇌가 깊이 진행된 상대에게 맡게 하면 뇌에 손상을 주지 않고 세뇌 상태를 거의 영구적으로 지속할 수 있다.
‘단순하지만 기본에 충실한 세뇌법. 법왕국은 이런 지식을 어디서 구했을까. 외부에서?’
생각보다 어둠이 깊은 나라였다. 그들의 교리가 그토록 빛과 불의 정화를 부르짖는 것이 어쩌면 그 때문이리라
‘슬슬 탈출을 준비해야 하는데. 문제는…….’
자이안과 각성자들이 만들어준 아티팩트는 강력한 힘을 지녔다. 그러나 그 힘을 가지고도, 지금으로선 무력한 민간인에 불과한 성녀 후보 100여 명을 달고 무사히 탈출할 자신이 솔직히 없었다.
버리고 갈 생각은 없지만, 가혹한 여정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일손이 하나만 더 있었더라면. 올소라를 보낸 건 실수가……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스스로의 생각에 소아레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불안, 후회, 그 모든 것은 제국 근위부에게 금지된 감정이었다. 그런 감정들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어 외풍에 쉽게 흔들리게끔 한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감정이었다. 즉, 인간적인 감정이라 할 수 있었다.
소아레스에게 자각은 없으나, 한때 제국을 이로이 하기 위한 부품 중 하나였던 그녀는 서서히 인간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이르고 있었다.
‘……깊이 생각하지 말자. 그럴 여유가 있으면 탈출 계획을 한 번이라도 더 다듬는 거야.’
그날 밤. 소아레스는 아티팩트를 이용해 얼핏 봐서는 전혀 분간되지 않는 더미를 만들어 대신 침대에 눕히고 조용히 방 밖으로 나섰다. 조심스러운, 그러나 최근 며칠간 반복해 완전히 익숙해진 동작이었다.
‘앞으로 남은 게 다섯 명.’
태양궁에 잠입하고 성녀 후보들의 실태를 알게 된 날 이후로 소아레스는 밤마다 몰래 다른 성녀 후보들을 만나고 있었다.
약물에 의한 세뇌를 풀 수단은 없지만, 세뇌를 덮어씌우고 암시를 더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그들은 평소에는 고위 사제들의 세뇌에 따르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소아레스를 따를 것이다.
하는 김에 후보들의 상태도 점검했다. 세뇌의 진행이 깊었지만 다행히도 정신에 큰 손상을 입은 이들은 없었다. 우선 무사히 탈출한 뒤 치료를 거듭하면 오래 지나지 않아 별다른 후유증 없이 세뇌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어쩌면 각성자들이 훨씬 더 쉽게 해결해줄 수도 있고.
‘……어? 잠깐.’
갑자기 소아레스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 아이…… 완전히 세뇌에 걸리지 않았어.’
갓 스무 살 정도 되었을까 싶은 여성이었다. 납치된 성녀 후보 중에서는 나름 나이가 있는 축이었다. 흔히 있을 법한 순박한 시골 사람 같은 모습이었으나, 문제는 눈이었다.
명령이 없으면 어떤 외부의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아야 하는 눈동자가 소아레스의 움직임에 희미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이지를 완전히 잃지 않았다는 증거다.
‘어떻게? 선천적인 약물 내성인가? 아니, 놈들이 먹인 약은 어지간한 내성으로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독했어. 작정하고 후천적으로 면역력을 기른 게 아니라면…….’
문득, 소리가 들렸다. 여성의 정면에 서서 그녀의 반응을 면밀히 살피며 소아레스는 동시에 그 소리에 집중했다. 소리의 근원은 여성이었다. 목이 아니라, 그 안쪽. 심장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은 곳.
낯선, 그리고 신비한 경험이었다. 소아레스의 귀는 날 때부터도 자매들과 비교해 특히 예민한 편이었고, 가혹한 훈련 끝에 그녀가 자부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수백 미터 밖에 떨어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정보를 수집하는 건 그녀에게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들리는 소리는 그런 ‘일상적인 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지금 그녀는 ‘소리가 아닌 것’을 귀로 듣고 있었다. 그녀의 동료 유리아가 ‘볼 수 없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되었던 것처럼.
‘마력…… 아니, 그보다 좀 더 근원적인 힘. 영혼에 내재된 변환 기관…… 신성력에 특화된…….’
전모를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아이는 신성술을 사용하고 있어. 스스로도 깨닫지 못할 만큼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제들이 알아차릴 수 없도록 은밀하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힘은 세뇌를 완전히 풀어버릴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았다. 소아레스는 여성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두 눈을 마주 보며 작업을 시작했다.
“……붓꽃.”
여성의 입술이 움찔거리며 열렸다.
“마, 마른, 잎.”
“청색. 유황.”
“연명.”
“열세 번. 나흘. 정오.”
“월식, 그림자.”
“육성. 검소. 주의 불꽃이 네 죄를 씻으리라. ……이름은?”
“퀴, 퀴나스.”
키워드의 조합으로 제어권을 가져온 뒤, 문답이 시작되었다. 극히 낮은 가능성이겠지만, 그녀가 소아레스 같은 이를 색출하기 위해 법왕국 측에서 심은 끄나풀일 가능성이 있었다.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지금 정체를 파악해야 한다.
‘역시, 그냥 평범한 시골 사람이야.’
짧은 문답을 마치고 소아레스는 그리 판단했다. 법왕국 외곽, 신성술 따위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농가의 딸이었다. 그녀의 신성술은 순전히 선천적인 재능이다.
잠들어 있던 재능이 이곳에서 모종의 계기로 눈을 뜬 것이리라.
‘잘 설득하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그러려면 우선 세뇌를 풀어야 했다. 다른 여성들은 어렵겠지만, 무의식 중에 신성술을 사용하고 있는 퀴나스라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자이안 님과 함께 유민 님의 백마법 강의를 들은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소리를 통해 퀴나스의 내면을 관조하며 소아레스는 신중하게 명령을 내렸다. 내재된 신성력을 느끼게 하고, 신성력의 흐름을 알고 있는 이론에 맞춰 올바른 방향으로 이끈다.
자의적인 판단이 끼어들 여지가 없기 때문인지 작업은 예상보다 더 수월하게 진행됐다. 그리고 마침내.
“아…… 으으, 머리야……. 여, 여기는…….”
의자에 앉은 채 한 차례 머리를 푹 수그린 퀴나스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힘겹게 고개를 들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소아레스의 모습을 보고는 눈을 부릅뜬다.
그러나 그녀가 채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소아레스가 신속한 동작으로 입을 틀어막고 남은 손으로 두 팔을 결박했다.
“당신을 해치려는 게 아닙니다. 진정하고 심호흡을 하세요. ……진정됐나요? 그렇다면 작게 고개를 끄덕이세요.”
“…….”
“잘했습니다. 신성기사단이 도적단으로 위장해 당신의 마을을 습격하고 당신을 성도로 납치했어요. 지금까지의 일을 기억하고 있나요?”
“……!”
퀴나스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이윽고 그녀의 두 눈에 강한 분노와 원망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세뇌 당했을 때의 일도 모두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전 당신과 같은 처지에 처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당신보다 한발 먼저 사제들의 세뇌에서 벗어났지요.”
퀴나스가 눈동자만 돌려 소아레스를 바라보았다. 곧 눈동자 속에서 휘몰아치던 감정이 가라앉고 이성의 빛이 돌아왔다. 소아레스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만 감탄했다.
생각보다 훨씬 말이 잘 통한다. 똑똑하고 판단도 빨랐다.
“지금 당신이 큰 소리를 내면 사제나 신성기사단이 그걸 듣고 이리로 달려올 겁니다. 그러면 저와 당신 모두 세뇌에서 풀렸다는 게 알려지겠지요.”
“…….”
퀴나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소아레스는 입을 막은 손을 떼었다. 퀴나스는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크게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얘기가 잘 통하는 분이시군요.”
“다, 당신은…….”
“소아레스입니다.”
“소아레스는…… 여기를 탈출하려는 건가요?”
잠시 침묵한 소아레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퀴나스의 표정이 밝아졌으나, 잠깐뿐이었다. 그녀는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고작 저희 둘이서 여길 탈출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렇다고 여기 대책 없이 앉아서 저들이 말하는 대로 조종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법왕국은 저희를 전쟁 병기로 쓸 속셈입니다.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 소모품이지요.”
“저, 전쟁이…… 으읍!”
퀴나스가 큰 소리를 내려는 순간 소아레스가 재차 재빠르게 입을 막았다. 그 상태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소아레스는 청각을 집중했다.
다행히 사제나 기사들이 소리를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소아레스는 작게 한숨을 뱉으며 천천히 손을 떼었다.
“큰 소리를 내시면 안 됩니다.”
“미, 미안해요.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아니, 그런데 전쟁이라뇨? 대체 어디하고…….”
평범한 시골 사람인 그녀가 법왕국과 보석탑 사이의 알력이나 법왕국 내부의 음모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어디까지 알려줘야 할까, 고민했다가 소아레스는 그게 부질없는 고민임을 깨달았다.
피해자인 퀴나스는 진실을 알 권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협력자로 삼으려면 그쪽이 더 편했다.
“그럴, 그럴 리가…… 법왕 성하께서 그런 일을 할 리가 없는데…… 소, 소아레스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제가 오해한 것일지도 모르고, 제가 모르는 다른 진실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들이 독한 마약으로 우리를 세뇌해 꼭두각시로 부리려 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
퀴나스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법왕국의 일반 서민층은 너 나 할 것 없이 견고한 신앙심으로 무장하고 있다. 태어나기도 전부터 받아온 세뇌에 가까운 법왕국의 가르침 때문이다.
이를 저버리고 현실을 직시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터. 그러나 소아레스는 조금 전까지 퀴나스가 보여준 판단력을 믿었다.
“저희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까요?”
마침내 퀴나스가 결연한 빛이 깃든 눈동자를 향했다. 그녀는 맹신의 장막을 벗고 현실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데 성공했다.
“걱정 마십시오.”
이제 소아레스가 그녀에게 앞길을 가리킬 차례였다.
“제가 모시는 분의 이름을 걸고, 여러분들을 반드시 모두 구해내겠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 초승달이 완전히 가려질 만큼 구름이 짙게 낀 밤.
콰아앙!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법왕 펠하네스 2세는 별안간 들린 굉음에 경련을 일으키며 눈을 떴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는 더없이 불쾌한 표정이었다.
안 그래도 최근 몇 주간 전쟁을 진행시키고 동시에 성녀 양산 계획을 앞당기느라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굉음의 원흉을 붙잡게 된다면 제아무리 신앙심이 신실한 이라도 쉬이 용서할 수 없으리라.
“파리디오네 경. 무슨 일입니까?”
“성하! 기침하셨습니까?”
“그거야, 이런 소리가 들렸는데 깨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 아닙니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말씀해 보십시오.”
“죄송합니다, 성하. 저희도 지금 상황을 파악하는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두껍고 호화로운 문 너머로 다급한 대답이 들렸다. 초조한 시간이 지나고, 얼마 뒤 기사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성하, 상황을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러세요.”
“다히트 추기경의 침실이 폭발했습니다. 다히트 추기경은…… 목숨이 위중한 상황입니다.”
“……폭발이라니요?”
펠하네스 2세는 자기가 아직 꿈을 꾸고 있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