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그녀들의 전장(1) (66/210)


66화 그녀들의 전장(1)
2022.12.08.


‘선전포고?!’

소아레스에게 그 소식은 청천벽력 같았다.

‘성녀 양산은 아직 한참 진행 중인데, 벌써? 너무 빨라.’

부하 올소라를 자이안에게 보내고 혼자 남은 탓에 할 일은 많아졌지만 반대로 마음은 편해졌다. 이대로 조금만 더 정보를 모은 뒤, 때를 봐서 성녀 후보들의 세뇌를 풀고 사제들 중 일부를 포섭하거나 하여 성도를 탈출할 계획이었다.

지금은 한창 그를 위한 준비를 하는 단계였다.

‘경비가 비교도 안 되게 삼엄해졌어. 정말로 전쟁이 시작된 거야.’

방 한가운데 다소곳이 앉은 인형을 연기하면서도 귀에 들리는 정보를 통해 상황을 분석하며, 소아레스는 속으로 몇 번이고 신음을 터뜨렸다.

‘올소라가 도망친 게 들켰나? 아니지. 그렇다면 별궁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어. 보석탑에 시비를 걸 게 아니라, 당장 여기부터 뒤집어졌을 거야.’

실제로 사제들은 올소라의 방에서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 시신을 발견했음에도 동요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귀찮다는 듯 지겨운 얼굴을 했을 뿐. 후보가 약의 부작용으로 돌연사하는 일이 이전에도 몇 번 있었다는 의미다.

‘소아레스. 냉정해지자. 아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는 아냐.’

전쟁이 일어나고 경비가 삼엄해지기는 했으나, 성녀 후보들의 일상까지 변한 것은 아니었다. 사제들은 아직 후보들을 극진하게 모셨고, 세뇌도 현재는 예법이나 행동양식 위주로 이뤄지고 있었다.

납치된 성녀 후보들은 실상은 일회용 폭탄이지만, 대외적으로는 목숨을 걸고 성전에 자원하여 진정한 성녀로부터 힘을 나눠 받은 ‘성녀 부대’로 홍보될 예정이었다.

국민들은 물론이고 전선에 나가 있는 병사나 기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품위 있는 성녀로 보이기 위해, 그러면서도 꼭두각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철저하게 세뇌를 거듭할 필요가 있었다.

‘가장 먼저 납치된 이들이 성녀에 걸맞게 행동하려면 일주일은 더 필요해. 행동만 세뇌한다고 끝이 아냐. 성유물로의 힘을 주입하고 전선에 보내는 데 소요되는 시간까지 감안하면, 제1성녀부대가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못해도 2~3주가 걸릴 터. 왜 벌써 선전포고를?’

답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애초에 혼자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모든 성녀 후보가 안전하다고 믿고 무방비하게 정보를 누설하는 고위 사제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으니까.

“국민들의 전의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당장에라도 농기구만 들고 전장에 뛰어들까 걱정될 정도예요.”

“허어. 전쟁이라는 것이 막무가내로 적국을 쓰러뜨린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거늘. 배우지 못한 자들은 어쩔 수가 없군요. 쯧쯧.”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희들이 태양신의 뜻에 따라 그들을 바른길로 이끌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호오. 리이하이너 주교의 신실함이 교황 성하께서 존경할 정도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군요.”

“과한 칭찬이십니다. 하하하.”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치게 과열된 민심이다. 신성기사단을 통해 벌인 자작극과 날조가 너무 잘 먹힌 것이다. 법왕국이 꾸준히 이어온 전 국민의 우민화가 빛을 발했다고 봐야 하리라.

엄밀히 표현하면, 법왕국은 민심에 등이 떠밀린 것이 아니라 민심을 제어하지 못해 불미스러운 일이 터졌을 경우 대외적 체면이 구겨질 것을 염려한 것이다.

대륙 유일의 종교 국가이며 태양신의 정당한 대리자임을 표방하는 법왕국에게 체면이라는 건 무엇보다도 중요하니까.

‘전선을 붙잡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황을 질질 끌면…… 충분히 시간을 끌 수는 있겠지. 하지만 법왕국에 그런 힘이 있나? 다른 나라도 아닌 보석탑을 상대로?’

제국 입장에서야 법왕국이나 보석탑이나 모두 방심할 수 없는 경계 대상이지만, 그중에서도 보다 위험시하는 건 보석탑이다.

그만큼 마법사라는 존재가 가지는 전술적, 전략적 우위성이 대단한 것이다.

역량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제국군에 소속된 소수의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수십 명으로 이뤄진 부대를 혼자서 상대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 마법사가, 아니, 그보다도 훨씬 강력한 마법사가 천 명 가까이 있는 게 보석탑이다.

괜히 나라라고 표현하기도 뭐한 집단을 정식으로 나라로 인정하고 대우하는 것이 아니다.

좀 떨어진 나라들은 보석탑이 가진 부에 집중하기 마련이지만, 혼자서 수십, 수백 명을 상대하는 마법사가 한데 뭉쳐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위협적이라는 것을 제국은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법왕국의 역량이 제국의 판단을 뛰어넘는다면, 그래서 일부러 전선을 고착화하고 시간을 끌 수 있을 정도라면…… 전쟁은 예상보다 훨씬 더 격렬해질 거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소아레스는 새로이 모시게 된 주인이 걱정스러워졌다.

보고서를 읽은 자이안이 전쟁을 막으려 하거나, 하다못해 피해를 줄이기 위해 개입하려 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당장 돌아가 자이안 님을 보좌하고 싶지만…… 그런 행동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시겠지.’

소아레스도 죄 없이 납치되어 일회용 폭탄으로 소모될 운명인 그녀들을 버리는 건 편치 않았다.

다행히 시간은 아직 남아 있었고, 갑작스런 선전포고라는 돌발사태가 마냥 나쁜 영향을 미치기만 하지는 않았다.

후보들이 갇힌 별궁의 경비 자체는 삼엄해졌으나, 반대로 세뇌를 맡은 사제들은 시간에 쫓기듯 대충대충이 되었다.

성녀 부대의 전선 투입을 앞당기려는 것이다. 덕분에 보일 듯 말 듯 하던 틈이 날이 지날수록 서서히 벌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된 이상, 최적의 때를 기다려야 해. 최대한 많은 이들을 이끌고 무사히 탈출할 수 있도록.’

모습을 숨긴 채 날카롭게 갈고 있는 발톱이 제 역할을 다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 * *

‘위에서 터뜨리고, 아래부터 탈출시키자. 지상층에 있는 연구실은 소규모거나,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야.’

며칠에 걸쳐 탑의 내부구조를 샅샅이 살피며, 유리아는 우선 최적의 동선을 그렸다. 수면도 식사도 극단적으로 최소화한 탓에 몸이 다소 나른했으나 반대로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했다.

‘각성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가혹한 일정을 소화할 수 없었겠지. 역시 자이안, 대단해.’

맥락도 없이 자이안을 칭찬하지만 본인은 그게 이상하다는 자각이 없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 유리아의 상태는 정상은 아니었다.

제도에서 음욕과 결전을 벌였던 때와 비슷하지만, MP 과포화 상태가 아니라 정신적 고양이 원인이라는 점이 다르다.

덕분에 예전과 달리 무작정 자이안을 존경하고 그의 말을 최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냉정한 판단력을 유지하면서도 자이안에 대한 존경심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의욕을 낼 수 있다.

유리아에게 있어서는 가장 이상적인 정신상태라고 할 수 있다.

‘역시 양동이 가장 효과적이야.’

동선을 확보한 다음 생각해야 하는 건 희생자들을 가장 많이 구할 수 있는 효율적인 수단. 각종 아티팩트로 무장했으나 결국 사람 한 명이고, 소아레스에게 배우고는 있으나 아직 전술적 안목도 부족했다.

그 상태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자기 자신을 이용한 교란과 양동작전이었다.

‘고려할 게 한두 가지가 아냐. 왠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지하 연구실에 드나드는 마법사들도 많아졌고. 최적의 작전을 짜려면 며칠은 더 걸리겠네.’

구출해야 할 희생자의 범위를 어디까지 봐야 하느냐도 문제였다.

예를 들면 파르곤에서 만났던 것과 비슷한, 완전히 마물과 일체화해버린 희생자는? 파르곤에서 만난 마물은 제대로 된 대화도 하지 못하고 짐승처럼 행동했다.

‘……그렇다고 마물처럼 행동한 것도 아니긴 했지.’

마물과 다른 생물을 구분하는 가장 큰 특징. 마물은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을 죽이려 든다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높은 지능을 가진 야생동물들이 자기보다 약한 피포식자를 괴롭히는 유희도 아니다.

아무 맥락도 없이, 모든 인간을 죽여야 한다는 본능이 유전자에 각인된 것처럼 무작정 인간을 죽인다.

‘모두 탈출시키자.’

유리아는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믿기로 했다.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마물이라고 불러야 할 존재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만약 연구실에서 탈출한 그들이 마물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면…….

‘그땐 내가 책임을 지겠어. 자이안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나도 빠짐없이 확실하게.’

허벅지에 매단 가죽 주머니 안에 숨긴 단검의 묵직함을 실감하며, 유리하는 홀로 조용히 결의했다.

‘그러려면 일단 이 탈출극을 성공시켜야겠지.’

최종적으로 작전을 검토하고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한 준비에 또 며칠. 그동안 자이안과는 서로의 상황을 보고하는 짧은 통신이 다였다.

그마저도 최근에 이르러서는 자이안이 미궁 깊이 들어가면서 무슨 문제가 생긴 건지 통신이 오래 이어지지가 않았다.

외로움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으나, 유리아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그 외로움마저 의욕으로 뒤바꿨다.

‘코르니카를 떠올려보자. 아빠, 자이안, 나를 도와준 사람들, 나와 아빠를 원망한 사람들, 모두.’

그 모든 불행한 사건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시작하자.”
 

* * *

요 며칠간 졸트 타기온은 스트레스가 지나친 나머지 밤에 제대로 잠들지도 못할 정도였다. 탈주한 실험체 K를 하필이면 자이안이 확보하고, 그 자이안은 붙잡기도 전에 다시 실험체 K와 함께 미궁으로 들어가 버렸다.

‘너무 큰 권리를 준 게 실수였나. 아니, 그 정도가 아니면 자이안을 탑에 묶어둘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자이안이 미궁 공략을 시작한 뒤로 마물 범람이 완전히 끊겼어. 올바른 판단이었다.’

원로회에게는 미궁에 들어간 자이안을 강제로 호출할 권리가 없었다. 애초에 자이안의 미궁 공략 속도가 너무 빨라서 따라잡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제는 보고조차 올라오지 않고 있지만, 기존의 속도를 생각하면 지금쯤 20층 아래의 최심부에 접어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20층 이후는 오직 4장로만이 도달한 영역이다. 원로회 33명이 함께 들어가더라도 희생 없이 자이안을 발견할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다.

‘이런 맙소사. 지금 그러니까, 그 어린 소년의 힘이 네 장로와 비등비등하다는 뜻이 아닌가?’

새삼스럽게 깨닫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미궁 지배를 목표로 했던 4장로가 ‘용의 심장’을 가지고 돌아와 깊은 잠에 빠지기 전까지, 지금의 원로회를 이루는 33명의 직계 제자들은 그들에게 반기를 들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강대한 힘을 가진, 차원이 다른 영역에 발을 걸친 게 4장로였다. 자이안이 그들과 동등한 힘을 가졌다는 건…….

‘나는…… 처음부터 실수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졸트는 ‘미지’라는 이름의 공포가 바닥을 스멀스멀 기며 다가와 콱 발목을 붙잡는 것만 같은 감각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졸트는 이를 떨쳐내듯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정신 차려라, 졸트 타기온. 인간의 진화라는 염원을 이루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겠다고 다짐한 건 바로 나 자신이다. 그게 설령 죄 없는 이들의 희생이라도. 가늠할 수도 없이 초월적인 힘을 가진 존재라도. 나 자신의 목숨이라도! 염원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이를 악문 채 졸트는 두 주먹이 새하얘지도록 세게 쥐었다. 부릅뜬 두 눈이 광적인 신념으로 번들거렸다.

그 어떤 장애물이 나타나도, 설령 스스로가 자신의 신념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더라도 결코 멈추지 않을 광신자의 눈이었다.

-콰앙!

그 순간이었다. 탑의 상층부의 위치한 그의 개인 연구실에까지 흔들림이 느껴질 정도로 거센 폭발음이 탑을 뒤흔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졸트의 비밀회선용 통신기가 작동했다. 졸트는 까닭 없는 불안에 휩싸였다.

-졸트 원로 교수님. 기, 긴급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연구실 8호에서 강한 폭발이 일어나, 조교와 준교수들이 전원 사망하고…… 살아남은 인간 실험체가 탈주했습니다.‘

“…….”

졸트는 눈앞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자이안이 탑에 찾아온 뒤로 계속해서 연구실에 불미스러운 사고가 일어났다.

‘……내가 실수한 게 맞나?’

눈앞의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졸트는 자신의 판단을 진지하게 고찰해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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