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반격 시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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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반격 시작(2)
2022.12.07.
「아저씨.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갑자기 뭐냐? 또 시답잖은 소리나 하면 가만 안 둘 줄 알아라.」
「저를 뭘로 보고 그런 소릴 하세요? 누가 들으면 제가 맨날 시답잖은 소리만 하는 줄 오해하겠어요.」
「너 여기 와선 맨날 시답잖은 소리만 했던 것 같은데……?」
「그, 그거는, 그냥…… 그…… 오랜만에 아저씨들을 보니까 바, 반갑기도 하고…… 음…… 아, 아무튼!」
얼굴을 붉히며 빽 소리친 유민이 겨우 질문을 꺼냈다.
「미궁을 공략하고 기능을 완전히 정지시키는 게 지금 목표잖아요?」
미궁 가장 깊은 곳에는 자원 생산과 마물의 탄생을 모두 관리하는, ‘마도학적 관점에서의 기능 중추’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탑을 세운 뒤 마법사들이 오랜 시간 미궁의 구조를 연구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이론상으로는, 기능 중추를 지배할 수만 있다면 미궁 전부를 지배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이론이 그렇다는 소리지 실제로 마법사들이 이를 시도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예외는 수십 년 전 미궁 공략을 시도했던 4명의 장로뿐이었다.
그마저도 불발로 그치고, 결국 장로회의 자리는 오래도록 공석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원로회는 네 장로의 직계 제자들이 그들을 대신해 탑을 관리하고자 만든 조직이었다.
「보석탑의 경제력이 미궁 자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데, 갑자기 미궁을 없애버리면 보석탑뿐만 아니라 탑 주변의 마을 사람들도 피해를 입지 않을까요?」
제법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넓은 침대를 점거한 채 백팩을 점검하던 아르스가 슬쩍 고개를 들고, 방구석에서 하체를 단련하던 크룩스가 입술만 움직이며 작게 감탄했다.
“그건 괜찮을 거예요.”
마물 무리를 일소하고 망중한의 여유를 찾은 자이안이 피와 먼지가 묻은 얼굴을 닦으며 대신 대답했다.
“보석탑의 영역에 들어와 탑에 도착하기까지 여러 마을들을 거치고 정찰하면서 알 수 있었어요. 주민들이 탑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지는 않아요.”
「그건…… 확실히 그러네요?」
유민 역시 자이안과 함께 보석탑 영역 내의 주민들의 모습을 봤다. 외적의 걱정 없이 평화로운 삶을 누리고 있었지만, 생활 양상 자체는 그녀가 상상한 중세, 근세 농민들의 모습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자이안이 보기에도 농지에 속박되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면 다른 나라의 평민들과 거의 똑같았다.
“게다가 여기 주민들은 사실 탑이 없어져도 충분히 자급자족할 수 있어요. 여긴 땅이 엄청나게 좋으니까요.”
「자이안 말이 맞다. 보석탑을 중심으로 영역 전체에 펼쳐진 환경 조절 결계 덕분이지. 당장 미궁을 없애고 탑을 완전히 무너뜨려도 결계 자체는 앞으로 100년가량 문제없이 유지될 거다. 그 정도로 튼튼하게 만들어진 결계더라고.」
“무엇보다도, 바로 남쪽에 제국이 있어요.”
음욕을 쓰러뜨리고 주권을 되찾았다 해도 제국은 아직도 상처투성이였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에는 많은 것이 부족했지만, 사람 목숨을 장난감처럼 허비한 음욕과 나쟈의 유희 탓에 특히 인력 부족이 심각했다.
보석탑이 멸망하고 주민들이 제국으로 몰려든다면? 클라비수스 황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리라.
“그때가 되면 저도 전하…… 아니, 폐하께 한 말씀 드릴 생각이에요. 굳이 제가 그러지 않아도 그분께서는 현명한 판단을 내리시겠지만요.”
「자이안의 황자 놈 올려치기는 아무래도 좋지만, 어쨌든 결론은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사람은 생각보다 끈질겨. 살려고 이를 악물고 작정하면 어떻게든 살아남는 법이지.」
둘의 논리정연한 설명에 황망히 고개를 끄덕인 유민이 이윽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거 왠지 좋네요.」
「……갑자기 뭔 소리야?」
「옛날 생각이 나요. 헤헤.」
유민이 소녀처럼 해맑게 웃었다. 반면 프레이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을 뿐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옛날. 아마 넷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고, 거기에 나이아까지 더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리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추억이지만, 비어있던 한 자리에는 이제 자이안과 그의 동료들이 있다.
“이런. 한 자리에서 쉬고 있었더니 마물이…….”
자이안의 후각이 빠르게 접근하는 마물의 냄새를 포착했다. 자이안은 스펙트럼의 상태를 가볍게 살핀 뒤 곧장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프레이가 얼마 전 말했던 것처럼, 미궁 공략은 자이안의 성장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사방이 MP로 가득한 공간에서 마물의 접근을 감지하기 위해 그의 오감은 날이 갈수록 예리해졌고, 지금까지 이론과 훈련으로만 익힌 현대무술과 흑마법, 백마법을 모두 응용하는 전술이 실전을 거치며 점점 더 효율적으로 가다듬어졌다.
끊임없이 마물의 MP를 흡수하며 기초능력 자체가 강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천재는 천재네요.
하체를 마무리하고 등 근육을 단련하고 있던 크룩스가 각성자들에게만 전해지는 텔레파시로 감탄했다.
처음 미궁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자이안의 흑마법, 백마법, 현대무술은 세련되게 어우러지거나 맞물리지 못했다. 삐걱거리며 억지로, 힘으로 밀고 나가는 식이었다.
그랬던 게 일주일을 넘고 이제 겨우 2주차에 접어들었을 뿐인데 마치 숨 쉬듯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적재적소에 기술을 사용한다.
-가르쳐주고 훈련을 봐주면서도 느꼈던 거긴 한데…… 무엇보다도 실전에 강한 타입이에요.
-저건 단순히 천재라서 그런 게 아니라…….
-저도 알아요, 형. 유년기의 불행한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겠죠. 나이아 누나와 하이엘프 스승의 가르침도 있었을 테고.
-그래도 백마법은 아직 많이 부족한 것 같은데요? 적어도 사지 결손쯤은 순식간에 고칠 수 있는 정도는 돼야…….
반면 유민은 다소 불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터무니없는 요구에 크룩스는 진심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유민 양, 본인을 기준으로 잡으면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요? 현역 시절 나이아 누나도 사지 결손까지는 치료하지 못했는데.
-으으…… 하지만 적어도 그 정도는 돼야 좀 안심이 된다고나 할까…….
-저 녀석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검사다. 팔다리가 어디 하나 날아갈 정도면 이미 적잖이 열세에 몰렸다는 거지. 애초에 그 정도의 부상을 입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고, 바로 그걸 위해 우리가 24시간 내내 지켜보고 있는 거 아니겠냐.
-어? 그렇구나!
새로이 깨달은 유민이 손뼉을 짝 치며 감탄했다. 그 사이 자이안은 소리 없이 대화를 나누는 듯 보이는 각성자들을 신경 쓰면서도 거침없이 미궁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전에도 미궁을 주파하는 속도는 어마어마하게 빨랐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경이적이었다.
“자이안, 이쪽이야. 이 안으로 쭉 들어간 다음 천장을 부수면 숨겨진 통로가 나와. 어디를 부숴야 하는지 내가 가르쳐줄게!”
마치 미궁의 모든 구조를 꿰뚫어 보듯 망설임 없이 길을 안내하는 케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리아가 아니라 케이가 자이안과 동행하게 된 데에는 물론 여러 경위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둘의 의사였다. 동행을 청한 자이안에게 유리아는 드물게도 난색을 표하며 아직 그녀가 할 일이 남아있음을 밝혔다.
“케이가 있었던 연구실과 비슷한 연구실이 탑에 한두 개가 아닌 것 같아. 지하는 물론이고 지상층에서도 몇 개 찾았어. 처음에는 시험관 안의 마물들이 단순한 마물인 줄 알았지만, 그들이 원래는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유리아가 대담한 계획을 꺼냈다. 인체실험을 벌이는 연구실들에 잠입해 그들의 연구를 엉망으로 만들고, 희생자들을 최대한 많이 구해내겠다는 것이다.
“분명 위험해질 거예요.”
“나도 알아.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희생자들을 포기할 수는 없잖아?”
자이안이 그녀를 만류했으나 유리아의 의지는 견고했다. 결국 자이안은 그녀의 의지를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꺾기 힘들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자이안 역시 같은 상황일 때 그녀와 똑같이 행동했을 게 분명했으니까.
「아티팩트는 얼마나 남았니?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렴. 뚝딱 만들어줄게에.」
“아르스 언니, 이번에는 최대한 요란하게 행동해서 한 명이라도 더 많이 탈출시키는 게 목적이니까…….”
“그러면 친구. 내가 대신 같이 갈까?”
케이의 제안은 뜻밖이었다. 무엇보다, 자이안이 생각하기에 케이가 굳이 미궁에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아냐. 나는 미궁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야 돼.”
그러나 케이에게는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어째서?”
“응? 응…… 글쎄? 나도 모르겠다.”
이유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했지만, 케이 역시 유리아와 마찬가지로 의지가 확고했다. 처음에는 안전상의 이유로 꺼려졌으나, 생각해보니 케이를 처음 만난 장소는 미궁 깊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때 케이는 상처 하나 없는 상태였다. 어쩌면 마물의 심장과 태아의 융합체인 케이를 다른 마물들이 동료로 인식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데려가는 게 낫겠다.」
각성자들도 케이에게 동조를 표했다.
「생각해 보세요, 자이안. 어제 자이안이 원로회의에 케이를 데려가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실험체 K라고 밝혔죠? 지금 원로회, 특히 실험에 직접 연관된 마법사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케이를 확보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거예요.」
“아앗…….”
감정에 휩쓸려 저지른 경솔한 행동이 화근이 되어 돌아왔다. 자이안은 얼굴을 감싸며 후회했으나 그렇다고 엎질러진 물을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긴 한숨에 후회를 쏟아 보낸 뒤 자이안은 정신을 다잡고 각성자들의 말을 되짚어보았다.
“알겠습니다. 케이는 같이 미궁에 가는 게 나을 것 같네요.”
가뜩이나 아이 같은 성격에, 마법사들의 온갖 실험을 아무 반발 없이 받아들였을 정도로 경계심이 없는 케이다. 케이를 탑에 혼자 놔뒀다가는 아무리 준비를 단단히 해도 사고가 터질 것 같아 불안했다.
그렇게 해서 유리아는 단독행동을 시작하고, 자이안은 케이와 함께 미궁에 들어왔다. 공교롭게도 미궁 출입로는 어제와 같은 마법사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이안과 동행하는 아이의 정체를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자이안이 어제처럼 화를 낼까 두려운 나머지 결국 얌전히 통과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조금 전까지만 해도 20층에 있던 자이안은 21층을 통째로 건너뛰고 22층 한복판에 발을 디뎠다.
“이 통로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응? 으응?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케이의 해맑은 표정에 자이안은 그저 작은 한숨만 뱉었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대답이었다. 실험의 여파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건지, 케이의 기억은 쥐가 파먹다 버린 치즈처럼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었다.
멀쩡한 부분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다.
그래도 이유를 추측해볼 수는 있었다. 이전, 케이는 자신의 처지를 설명할 때 태아에게 이식한 마물의 심장을 ‘나의 심장’이라고 표현했다. 즉, 지금 케이의 의식은 근본적으로는 마물의 것이다.
그리고 그 심장의 주인이 되는 마물은 아마 미궁 깊은 곳에 서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단순한 마물이 아니라, 미궁의 온갖 지름길과 숨겨진 통로를 제집 정원 보듯 속속들이 알고 있을 정도로 기능 중추와 깊이 연관된 마물일 가능성이 높다.
‘만약 무언가를 계기로 케이가 마물의 본성을 되찾고 돌변한다면, 그때 나는…….’
과연 이 ‘친구’를 죽일 수 있을까?
“여기는 마물이 안 와. 그렇게 만들어진 곳이거든. 그러니까 22층에서는 여기서 쉬는 게 좋아!”
불안감을 감추며, 자이안은 짐을 내려놓고 휴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