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반격 시작(1) (64/210)


64화 반격 시작(1)
2022.12.06.


「어제 일은 미안해요, 자이안.」

다음 날 아침. 실로 오랜만에 숙면을 누리고 기분 좋게 일어난 자이안에게 크룩스가 사과를 건넸다. 드물게도 가라앉은 표정이었다.

“삼촌도 그러더니, 형도 사과를 하시네요.”

쓴웃음이 섞인 자이안의 대답에 크룩스도 마찬가지로 웃었다. 그러나 그 얼굴은 어딘지 지쳐 보였다.

「어휴, 말도 말아요. 새벽 내내 여자 둘이 얼마나 저를 볶아댔는지. 아무리 그래도 말이 너무 심했던 거 아니냐, 프레이 형 심정도 이해해줘야 했다, 자이안 보여주기 부끄럽지도 않았냐, 등등……. 특히 유민 양.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제는 좋다고 저하고 합심해서 프레이 형을 쪼아댔으면서 말이에요.」

“아하하…….”

「하지만 전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농담으로 얼버무리는 듯하던 크룩스가 거짓말처럼 분위기를 바꿨다. 자이안도 마음을 다잡고 진지한 표정을 했다.

「물론 너무 성급했고, 자이안에게 보여주긴 부끄러운 광경이었지만, 그 행동 자체를 후회하지는 않아요.」

푹 쉬고 머리가 식은 지금 생각해 보니, 어제 그의 행동은 확실히 부자연스러웠다.

유민은 단순하게 자기 감정대로 프레이와 말싸움을 했을 뿐이지만, 그는 마치 프레이를 도발해 격정적으로 만드는 게 목적인 것 같았다.

「아마 프레이 형은 자이안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겠지만…… 형은 나이아 누나의 죽음에 누구보다도 크게 집착하고 있었어요. 어쩌면 누나의 죽음이 자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고 여기고 있을지도 몰라요. 실제로 누나가 마계에서의 통신을 마지막으로 연락이 두절된 뒤로 형은…….」

낡은 과거를 들춰보듯 흐린 눈빛을 하던 크룩스가 갑자기 말을 얼버무렸다. 정신을 차린 듯 두 눈에 이지적인 빛이 돌아오더니, 이윽고 그는 낭패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이건 제가 해도 될 말이 아닌 것 같네요. 자이안이 직접 프레이 형에게 들을 일이지.」

“삼촌이 쉽게 얘기해 줄까요?”

「쉽지 않겠죠. 그렇다고 포기할 건가요?」

자이안은 놀랄 정도로 자연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나이아가 살아있던 시기의 프레이의 얘기는 자주 들었지만, 나이아가 지구에서 사라진 뒤 지금에 이르기까지 프레이의 행적은 전혀 들은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크룩스의 말을 듣고 보니, 서로를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 지난 16년의 공백기를 들을 필요가 있을 듯했다.

「하하, 나도 나이를 먹긴 했나 봐요. 꼭 어린애한테 필요도 없는 훈계를 하는 것 같네. 너무 부담 가지지 말아요. 방금 제 말은 강요도 부탁도 아니에요. 서둘러서 들으려 하지 말고, 그냥 자이안이 정말 듣고 싶어졌을 때 부담 없이 물어보면 돼요. 어차피 우리, 시간은 얼마든지 있잖아요?」

그랬다. 각성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까마득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당장 시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들도 있었다. 코앞까지 닥친 법왕국과 보석탑의 전쟁이 그랬다.

“그치만 자이안, 네가 전쟁터에 끼어든다면…… 오히려 희생이 더 커질 수도 있지 않을까?”

오랜만에 얼굴을 본 유리아는 평소와 다름없이 건강해 보였다. 다만 곳곳에 피로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간소하게 차려놓은 아침 식사를 먹성 좋게 먹는 것을 보면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최대한 힘을 조절한다고 해도, 사람을 상대로는 불상사가 벌어질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봤어요.”

“다른 방법? 뭔데? 근데 이 수프 맛있다. 혹시 자이안이 직접 만든 거야? 아니지, 여기 마법사들이 준비한 건가?”

“유민 누나가 차려 준 거예요.”

「흐흥. 전 나잇값 못하는 어디 사는 셋과 달리 요리도 특기라구요.」

유민이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펴며 자랑했다. 나잇값 못하는 어디 사는 셋은 그 모습에 어이없어하면서도 흡사 나이 차가 나는 여동생을 대하는 것처럼 웃을 뿐이었다.

“밤에 자면서 생각해봤어요. 가장 적은 희생으로 전쟁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뭘지. 하나 떠오른 게 있었어요. 전쟁의 목적 자체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전쟁의 목적? ……앗, 혹시.”

자이안의 말을 곱씹어본 유리아가 뭔가 알아챈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이안은 깨끗하게 빈 식기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궁의 최심부로 내려가, 미궁의 기능을 완전히 정지시킬 생각이에요.”

목적을 잃은 법왕국은 전의를 잃고 와해될 것이고, 동시에 미궁에서 얻은 부와 권력을 기반으로 비인도적인 실험을 일삼는 보석탑에게도 큰 피해를 줄 수 있으리라. 일석이조의 비책이었다.

「으, 으으으음…….」

「뭐, 나쁘지는 않은 방법이다만.」

「쪼오끔 미적지근한데에.」

「어떻게 보면 자이안다운 수단이네요. 하하핫.」

그러나 각성자들의 반응은 영 좋지 않았다. 결정타는 유리아가 조심스럽게 꺼낸 한 마디였다.

“……정말 그런다고 법왕국이 전쟁을 그만둘까?”

말문이 막혔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당장 전쟁을 그만두는 게 정상이다. 만약 승전한다 하더라도 목적은 얻을 수 없고, 남는 건 전쟁으로 쇠퇴한 국력뿐이니까.

하지만 오랜만에 푹 쉬고 팔팔해진 자이안의 사고력은 법왕국이 전쟁을 그만두지 않을 ‘논리적이지 않은 이유’를 순식간에 몇 가지나 추측해냈다.

가령, 체면 문제. 선전포고까지 해놓고 아무 소득도 없이 맥없이 종전을 선언하면 위정자의 위신은 땅에 떨어진다. 상처뿐인 승전보라도 얻기 전까지는 전쟁을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민심 문제도 있다. 보고서에 의하면, 법왕국이 신성기사단을 통해 자행한 온갖 자작과 날조 탓에 보석탑에 대한 법왕국 국민들의 적개심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다.

너무 이른 시기에 전쟁을 멈추면 들끓는 민심이 엉뚱한 방향으로 폭발할 여지가 있다. 적어도 민심이 가라앉을 때까지는 전쟁을 지속해야만 한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이유가 더 떠올랐고, 어느 하나도 다 그럴듯해 보였다.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판단했음을 깨달은 자이안은 팔짱을 끼며 신음을 뱉었다.

「미적지근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틀린 방법은 아니다.」

갈등에 빠지려는 자이안에게 프레이가 조언했다.

「지금 중요한 건 무엇보다도 빠르게 행동하는 거다. 그걸로 전쟁을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보석탑 때문에라도 해야 할 일인 건 마찬가지지 않냐.」

그의 말이 옳았다. 결단을 내린 자이안이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식사를 마치는 대로 바로 미궁을 공략하도록 하죠.”

“힘내, 자이안! ……그런데 저기, 있잖아.”

“네?”

“……저 구석에 있는 저건 대체 뭐야?”

유리아가 가리킨 방향을 보고 자이안은 화들짝 놀랐다. 젤이나 점액질 같은 시커먼 덩어리, 그러니까 케이가 어젯밤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자세로 거기에 있었다.

“응? 나 이제 말해도 돼?”

“으아아아. 깜빡했다.”

본의 아니게 케이를 한나절 내내 방치한 꼴이 된 자이안이 급하게 그를 달랬다.

“난 괜찮아, 친구! 아니, 자이안! 나는 생각하는 걸 좋아하거든. 정답이 없이 무의미하게 공전하기만 하는 사색은 더 좋아해.”

자이안의 소개에 유리아는 처음에는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케이가 마법사들에게 당한 비인도적인 처사를 이해하고, 시커먼 덩어리의 모습인 그를 거리낌 없이 와락 끌어안았다.

“흑흑. 우리 인간이 미안해.”

“인간의 몸은 따뜻하구나. 흉내 낼 때 참고가 될 것 같아. 헤헤.”

낯을 가리지 않고 붙임성이 좋은 유리아였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상대의 성격과 본질을 빠르게 꿰뚫어 보는 눈이 있었다. 케이는 케이대로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고 밝은 성격이었다.

이도 저도 아닌 얘기들을 나누며 둘은 순식간에 친해졌다. 자이안은 테이블 너머에서 그 모습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광경이 평화로운 마지막 한때가 될 수도 있음을 예감하며.

* * *

‘시기’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석관 위에 눕힌 몸이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체를 일으키는 것만 해도 한세월이었다. 온몸의 관절 여기저기에서 갈무리되지 못한 MP의 흔적이 먼지처럼 흩날렸다.

마치 버려진 폐품이 다시 움직이는 듯한 광경이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말라붙은 황야의 모랫바닥처럼 쩍쩍 갈라진 목소리였다. ‘시기’는 약해지고 쇠퇴한 자신의 처지를 돌이켜보며 잠시 인상을 썼지만, 오래지 않아 냉정을 되찾았다.

힘이 약해진 덕분인지, 언제부터인가 막무가내로 감정에 휩쓸리는 일이 없어졌다.

“그래도…….”

그가 손을 내밀자, 어딘가에서 분홍빛을 띤 수정처럼 보이는 보석이 둥실둥실 날아왔다. ‘시기’는 부유하는 보석을 손바닥 위에 두고 세밀하게 살폈다.

상태는 안정적이고, 폭주나 붕괴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뿌려둔 씨앗이 꽃을 피우는 모습은 볼 수 있을 터.”

이날에 이르기까지 그는 아주 많은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거쳤다.

다만 대부분의 계획은 우연에 의존하거나 앞뒤가 맞지 않는 우발적인 것이었다. 그가 ‘시기’인 이상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대신 그에게는 시간이 많이 있었다. 아주 낮은 확률이라도 언젠가는 맞을 터였다.

‘동지들이 이 세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결국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이었지. 시간만 있다면. 그래, 무한한 시간만. 설마 허무하게 죽을 거라고는 예상 못 했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마물을 조종하고 불러내는 마법은 이를 위해 그가 일부러 바깥에 흘려보낸 것이었다. 이윽고 우연과 우연이 여러 번 겹치며 천문학적인 확률을 뚫고, 마침내 동지들을 죽인 이가 바로 위 인간들이 세운 탑까지 왔다.

감회가 깊어진 ‘시기’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케테르크를 자극해 그와 만나게 하고, 그를 미궁으로 유도하고……. 쇠약해진 덕분에 냉정한 사고가 가능해지고, 케테르크의 눈을 빌려 계획을 세밀하게 조정할 수 있게 됐다.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존재구나, 나는. 아니, 우리 모두가 그렇겠지.’

‘시기’는 한 발짝씩 천천히 석관에서 내려왔다. 석관의 표면이 붉게 점등하며 안전을 경고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온몸에 붙어있는 케이블을 모조리 쥐어뜯어 버리고 나니 새로 태어난 것처럼 상쾌한 기분이었다.

실제로는 계속해서 힘이 약해지고 있고, 생명 유지 장치마저 떼어낸 이상 다가오는 죽음을 더는 막을 수 없게 됐음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그런 사소한 건 이제 중요치 않았다. 처음부터 끝을 정해놓은 목숨이었다. 그리고 그 끝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시기’는 갈라진 목소리로 끅끅 웃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머지않았다.”

오랜 시간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책임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를 되찾을 날이.

그리고 증오해 마지않는 동지들에게 비정한 복수를 선물할 날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