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홀로 걷기 (63/210)


63화 홀로 걷기
2022.12.05.


자이안은 원로회를 다시 찾아가는 일 없이 자기 숙소로 돌아갔다. 그 상태로 원로회의 얼굴을 봤다간 정말로 큰 사고를 낼 것 같았다.

그의 험악한 분위기를 민감하게 알아차린 케이는 시커먼 점액질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 방 한구석에 얌전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겠군.」

프레이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사실은 법왕국에서 이미 선전포고와 함께 선제공격을 벌인 뒤였으나, 줄곧 미궁에만 머물고 있었던 자이안 일행에게는 아직 그 소식이 닿지 않은 상태였다.

“전쟁…….”

자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그 단어를 되풀이했다. 자이안은 직접 전쟁을 겪은 적은 없었다. 일리움은 서쪽 복마전과 닿은 변경백의 영지를 빼면 오랜 시간 평화를 누리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전쟁 문학을 엄청 싫어하셨지.’

일리움에 유행했던 문학이나 연극 일부는 전쟁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는 듯한 내용도 더러 있었다. 그런 것들을 접할 때마다 나이아는 가슴 속 깊이 혐오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어린 자이안에게 전쟁은 어떻게 포장하든 힘없고 무고한 사람들이 무수히 죽어 나가는 참혹한 재앙이며, 죽어간 이들의 목숨을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전쟁을 기억하는 가장 올바른 방법은 두 번 다시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반면교사로 삼는 것뿐이라고.

「그 녀석은 현대 지구에서 자랐으니까…… 기억을 잃어도 가치관은 남아있었겠지. 안 좋은 경험도 있고.」

“……전쟁을 막아야 해요.”

고개를 든 자이안이 한 단어 한 단어 또박또박 말을 꺼냈다. 프레이는 작게 한숨을 토했다. 소아레스의 보고서를 읽고 전쟁이 벌어지리라고 확신한 순간부터 프레이는 그 말을 예상하고 있었다.

「난 반대다.」

프레이의 대답 역시 그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전쟁은 너 혼자서 감당하기엔 너무 크고 복잡한 일이다. 지금까지 네가 개입했던 사건들과는 차원이 달라. 그렇다고 이게 마족이 연관된 일도 아니고.」

프레이와 마찬가지로, 자이안 역시 그가 반대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자이안이 뭔가 결심하면 프레이는 논리나 현실적인 이유 따위를 들어 반대하고, 가벼운 논쟁을 주고받은 뒤 결국에는 프레이가 못이기는 척 자이안을 존중해준다.

이제는 정형화된 루틴이었다. 프레이 역시 정말로 반대를 하는 게 아니라, 한 번이라도 더 신중히 생각해보라고 제동을 걸어 의사 표현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삼촌, 저는…….”

「저는 괜찮은 것 같은데요.」

「크룩스. 끼어들지 마라. 지금 내가 자이안하고 얘기하고 있는 거 안 보이냐?」

그러나 이번에는 평소와 조금 양상이 달랐다.

「막을 수 있는 전쟁이라면 막으려고 노력하는 게 도의적으로도 맞죠. 형은 자이안을 단순한 개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지금 자이안은 지구의 각성자들을 기준으로 봐도 굉장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잖아요? 각성자도 없고 마물도 찾기 힘든 저쪽 세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런 힘을 가진 사람을 단순한 개인이라고 표현하는 건 기만이죠. 자이안의 힘은 중세~근세 수준의 문명을 가진 세계의 전쟁에 충분히 통할 겁니다. 마법사라는 특수한 전력의 존재를 고려해도요.」

「그래서? 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저 어린애를 지금 전쟁터로 등 떠밀자는 거냐?」

「하지만…… 누군가가 나서서 전쟁을 막지 않으면 권력자들의 욕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게 되잖아요. 아저씨는 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생판 남일 뿐이다. 괜히 신경 쓰지만 않으면 없는 거나 다름없는 것들이라고. 아니면 뭐, 눈앞에 일이 얼마나 쌓여있건 지구 반대편에서 전쟁이 터지면 그걸 막으러 당장 달려가야 한다, 그런 소릴 할 셈이냐?」

비아냥거리는 반론에 유민은 분한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결국 주위를 돌아보던 그녀가 아르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으윽…… 미, 미꾸라지처럼 이리저리 빠져나가기는……. 아, 아르스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요?」

「으으응? 이 타이밍에 나를 찾아? 나는…… 아하하. 난 이런 일은 지긋지긋하니까 그냥 빠질게에. 셋이서 알아서 합의 보렴~.」

아르스의 대답은 어디까지나 매정했다. 유민은 상처받은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아, 아르스 언니, 이 배신자……!」

「무의미한 논쟁은 그만두자고. 너희들이 무슨 말을 하든 난 무조건 반대니까.」

프레이는 피곤한 표정으로 논쟁을 정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크룩스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남남일지언정 실제로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이안 성격에 그들이 희생되는 걸 없는 셈 치고, 모른 척 지나칠 수 있을까요?」

「그런 건 일시적인 감정에 불과해.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거다. 하지만 전쟁의 참상을 제 눈으로 본 저 애가 받을 상처는? 마물이 죽는 것과 사람이 죽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자이안이 그 상처를 극복하지 못할 정도로 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이아 누나의 아들이지 않습니까?」

「맞아요. 나이아 언니라면 분명 이럴 때 고민하지 않고 전쟁을 막으려 했을 거예요.」

그 이름이 화두에 오른 순간 프레이의 인상이 사납게 뒤틀렸다. 크룩스는 한편으로는 저질렀다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렇다고 나이아의 이름을 꺼낸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나이아를 잃고 십몇 년. 네 각성자가 한자리에 모인 이상 언젠가는 그녀에 대한 감정을 확실히 정리해야 했다.

「그래. 나이아라면 분명 그랬겠지. 그래서 뭐? 쟤가 나이아 본인이냐? 나이아가 그럴 거니까 그 아들도 똑같이 행동해야 한다, 뭐 그런 개소리라도 지껄일 셈이냐?」

프레이의 언성이 걷잡을 수 없이 높아졌다. 유민과 크룩스 역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다. 유민이 감정에 호소하고, 크룩스가 논리로 부딪치며 언쟁은 시간이 지날수록 거칠어졌다.

“잠깐만요. 삼촌, 크룩스 형, 유민 누나, 다들 진정하세요.”

「너희들은 대체 저 어린 애한테 뭘 기대하고 있는 거냐? 저 애를 나이아랑 착각하고 있냐? 그래서 쟤가 나이아처럼 행동하길 바라고 있는 거냔 말이다!」

「자이안에게 나이아를 겹쳐 보고 있는 건 저희가 아니라 형인 것 같은데요? 자이안이 누나와 같은 길을 걸어갔다가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할까 봐 그렇게 필사적으로 반대하는 것 아닌가요?」

「애가 뭣도 모르고 전쟁에 끼어들겠다는데 그럼 막아야지 구경만 하고 있으란 거냐!」

「아저씨는 지금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어요. 자이안의 의사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요!」

「넌 애가 제 발로 기찻길로 뛰어드는데 애 의사를 존중한답시고 가만 놔둘 거냐?! 그게 지금 보호자 할 소리야!」

「그러니까, 자이안이 상처받기 전에 저희가 끼어들어서 적절히 케어를 해야……!」

“다들 그만 좀 하세요!”

뜨겁게 달아오르던 프레이의 방에 거짓말처럼 싸늘한 침묵이 끼얹어졌다. 자이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지친 얼굴로 각성자들을 바라보았다. 한 차례 서로를 바라본 뒤, 가장 먼저 프레이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저희가 좀 어른스럽지 못했네요.」

항상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크룩스도 드물게 처진 표정이었다. 유민에 이르러서는 어린아이처럼 시무룩해 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자이안. 자이안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고 그래놓고는 우리가 가장 그러지 못하고 있었어요.」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가라앉았다. 테이블에 앉은 채 침묵을 고수하던 자이안은 힘없이 침대로 향해 쓰러지듯 누웠다.
각성자들이 악의나 이기심 때문에 자이안을 방치하고 싸운 게 아니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서로 방향은 다를지언정, 다 똑같이 자이안을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자이안은, 솔직히 말해서 지금은 모든 게 다 지긋지긋했다.

비단 각성자들의 말싸움뿐만이 아니었다. 사람 같지도 않은 끔찍한 실험을 벌여 놓고는 태연하게 발뺌을 하는 보석탑도. 그리고 그 보석탑이나 별 다를 바 없는 짐승만도 못한 자들임이 밝혀진 법왕국도.

누가 더 나쁜 놈들인지 비교하는 것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거기서 거기인 놈들이 벌이는 전쟁 때문에 죄 없는 주민들이 떠안게 될 피해도.

“방금 전에는 소리쳐서 죄송해요. 그냥, 좀…….”

「……잘못한 것도 없는 놈이 사과하지 마라. 우리야말로 미안하다.」

“저는, 그냥, 지금……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침대에 엎드린 자이안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꾹 눈을 감았다.

“죄송해요. 조금만 쉴게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자이안의 의식은 끝없는 어둠 속에 가라앉았다.

* * *

깊은 밤.

불현듯 눈을 뜬 자이안은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상쾌한 기분이었다. 잠들기 직전 지나친 스트레스 인한 두통이나 현기증도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일어났냐? 아직 새벽이다.」

프레이의 목소리에 자이안은 뇌리에 투영된 지구의 광경에 의식을 집중했다. 넓은 방에 다른 세 명은 없고 프레이 혼자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칠칠치 못한 모습에 자이안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다른 분들은 어디 가셨어요?”

「걔들은, 뭐, 그냥…… 잠깐 자리를 비켜줬다. 나랑 너랑 얘기할 시간을 주겠다면서.」

“무슨 얘기를…… 아.”

기절하듯 잠들기 직전의 기억이 빠르게 되살아났다. 아까 전 프레이의 모습은 확실히 이상했다. 평소라면 그렇게 끈질기게 반대하지도, 격렬하게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처음 만난 날 나이아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그저 쓴웃음 한 번으로 감정을 억누르지 않았던가.

「미안하다, 자이안. 내가 어른스럽지 못했다.」

“‘어른스럽다’는 건 어떤 뜻일까요?”

「뭐?」

“하나뿐인 가족이 상처를 받을까 봐 걱정돼서 감정을 드러내며 싸우는 건 어른스럽지 못한 건가요? 감정을 죽이고 상대를 존중하는 것만이 어른스러운 행동인가요?”

「그건…… 글쎄다.」

“전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까 전에는 저도 너무 지친 나머지 퉁명스럽게 말하고 말았지만……. 저를 위해 반대해주고, 한 번이라도 더 숙고할 여지를 주는 삼촌의 행동은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예전부터 계속 그랬어요.”

그 기분은 한 번도 변치 않았다. 가장 처음 만난 날, 다른 사람은 다 죽었는데 왜 자기만 구했냐고 엉뚱한 원망을 쏟아내는 자신을 윽박질렀던 그때에도.

국경을 넘는 와중에도 국경 요새를 신경 쓰거나 사실은 내버려 둬도 전혀 상관없는 이들이었던 화전민 마을을 구하고자 했을 때에도.

코카트리스를 비롯해 감당하기 어려운 강적들과 목숨을 걸고 싸웠을 때에도.

「하. 말은 잘해요. 너 이 녀석, 결국 한 번도 내가 하란 대로 한 적 없잖아.」

“한 번도 없긴요? 있긴 있었어요. 웨코스에 밀입국할 때 삼촌이 시키는 대로 여장까지 하고 국경 검문소의 사람들을 속였잖아요. 제가 그때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알기나 하세요?”

「아…… 어…… 이런 젠장. 생각해보니 그러네.」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난 자이안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펜던트의 투박한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지난날의 판단들을 돌이켜보며, 자이안은 흔들림 없이 말했다.

“전 전쟁을 막을 거예요. 삼촌께서 아무리 반대하셔도 그 마음엔 변화가 없어요. 제 마음에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다짐했으니까요.”

「나도 안다.」

프레이는 한숨을 뱉듯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이안의 모습에 문득 나이아가 겹쳐 보였다.

한창 젊은 영웅으로 활동하던 당시, 나이아는 중동 지역에서 일어난 내전에 파견된 적이 있었다. 각성자는 전쟁에 동원해서는 안 된다는 국제 수칙이 있었으나 구호를 위한 지원은 예외였다.

나이아는 고통 받는 민간인들을 구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전쟁터에 뛰어들었고, 사람과 사람이 군대를 조직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겉으로는 그 정도는 별것도 아니라는 양 태연하게 굴었지만…… 흥, 그런 어설픈 연기로 오빠인 내 눈을 속인다니 가당키나 하겠냐? 그 단 한 번의 파견 때문에 나이아는 몇 년이 넘게 PTSD에 시달리며 고생했다. 그나마 그 녀석이니까 몇 년 만에 회복한 거지, 평범한 사람은 평생을 악몽과 정신질환에 시달려도 이상하지 않은 게 전쟁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지금 같은 상황일 때 분명 망설임 없이 전쟁을 막으려 하셨겠죠.”

정확한 예측에 프레이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그 녀석이라면 분명 그랬겠지. 내가 아무리 뜯어말려도 들은 척도 안 하고.」

“만약, 혹시라도 만약에 어머니께서 살아계셨다면, 그리고 어머니께서 그 기억 때문에 제가 전쟁을 막는 걸 반대하신다면. 제게 그런 일에 개입해서 희생을 자초할 필요가 없다고 충고하신다면……. 전 분명 어머니께 크게 화를 낼 거예요. 그리고 혼자서 전쟁을 막으러 갈 거고요.”

「……그래. 나도 안다.」

한때, 나이아를 존경하며 무작정 나이아처럼 행동하려 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기어 다니지도 못하는 아이가 어느새 걸음마를 떼고 혼자 걷듯, 자이안 역시 오직 자신의 마음의 목소리를 따라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이상 자이안을 나이아와 겹쳐 보는 건, 이 아이에 대한 모욕일지도 모르겠군.’

깊은 한숨을 삼키며 프레이는 마지막으로 충고했다.

「많이 힘들 거다. 아마 지금 네가 상상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괜찮아요. 아니, 괜찮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결코 꺾이거나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얼마나 큰 상처를 받더라도.”

「그렇다면 나는 네가 그 어떤 상처도 받지 않도록 철저하게 지켜주마.」

“아하하. 든든하네요. 삼촌만 믿고 있을게요.”

자이안은 가볍게 받아들였지만, 손 그늘로 얼굴을 감춘 프레이는 무서우리만치 진지한 표정이었다.

나이아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나이아와 비교해도 모자람 없이 훌륭하게 성장한 조카를 위해. 자이안이 원한다면, 아니, 설령 원하지 않더라도 가진 모든 것을 내걸고.

‘만약 모든 것을 걸어도 부족하다면…….’

그땐 목숨을 바쳐서라도.

‘자이안, 너는 안심하고 네가 믿는 길을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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