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산 넘어 산 (2)
(6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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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산 넘어 산 (2)
2022.12.04.
“선전포고? 자네 지금 잠꼬대하나?”
원로회의에 참석해 있던 졸트 타기온은 처음에는 자기가 뭘 잘못 들었거나 상대가 말을 잘못한 줄 알았다.
그러나 조금 전 대화 내용을 되새기고 눈앞에 선 준교수의 표정을 살핀 결과, 그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렇다면 남은 결론은 하나였다. 준교수의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다.
“법왕국이? 이제 와서? 우리한테? 그게 그놈들한테 무슨 득이 된다고? 응? 자네가 한 번 대답해보게.”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제 학파에서는 독심술 같은 걸 가르쳐주지는 않더군요.”
준교수의 대답은 어디까지나 당당했다. 반면, 그의 행색은 며칠 동안 물 한 모금 못 먹고 오지를 헤매기라도 한 것 같았다.
준교수부터 지급되는 자랑스러운 로브는 피와 흙먼지로 더러워졌고, 한쪽 다리는 부러진 걸 대충 처치한 듯 부목이 감겨 있었다. 얼굴도 며칠 동안 못 잔 것처럼 지쳐 보였다.
“친애하는 원로 교수님들. 혹시 제가 누군지 기억하십니까?”
“……미안하네만 준교수의 이름 하나하나 기억하기에는 우리가 좀 바빠서 말일세.”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제가 조금 전까지 어디에서 근무했는지는 아셔야 할 겁니다. 국경 감시구역입니다.”
그가 피와 먼지로 지저분한 서한을 내밀었다. 내용을 확인한 원로 교수들은 저마다 신음성을 터뜨렸다. 내용은 짧았다. 태양신의 관용이 한계에 달했으니 이제는 불로써 너희들을 심판하리라.
문제는 그 아래에 새겨진 법왕의 직인이었다.
‘……왜?’
자리에 있는 모든 원로 교수의 머리에 공통된 의문이 떠올랐다. 탑이 미궁 위에 세워지고 미궁 자원을 독점한 뒤로 법왕국과는 줄곧 양호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특히 법왕국이 미궁 자원을 싸게 공급받으며 다른 나라에 비해 챙기는 이득은 천문학적이기까지 했다.
이제 와서 그걸 포기할 셈인가?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걸어가면서?
“그래, 뭐…… 아무튼 수고했네, 자네, 그러니까…… 준교수 군. 많이 피곤해 보이니 숙소에 가서 푹 쉬게. 한동안 자유롭게 쉴 수 있도록 내 언질을 넣어놓겠네.”
“……감사합니다.”
선전포고 서한을 가져온 준교수가 절뚝거리며 회의실을 나갔다. 뒤이어 찾아온 것은 불편한 침묵이었다.
“……이게 다 마물 범람을 제때 해결하지 못해 터진 사달 아닙니까?”
원로 교수 한 명이 좌중의 눈치를 보며 슬쩍 말했다. 이에 과민 반응한 이는 원로 교수 졸트 타기온과 그의 파벌이었다.
“이제 와서 말입니까? 만약 그게 정말로 전쟁을 건 이유라면,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일어났을 일입니다.”
“졸트 원로 교수. 마물 범람 대응반을 자진해서 맡으면서 자신은 다를 거라며 호언장담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럼 업무를 맡으면서 자신감을 보여야지, 뭐 자기는 못 할 거 같다느니 하면서 자신감 없는 모습을 보이란 겁니까?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트집입니까?”
졸트 타기온은 마음 같아서는 그냥 버럭 소리치고 회의실을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탈주한 실험체 K의 수색이 난항을 빚고 있었다. 직접 나서서 회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회의 중에 그런 짓을 했다간 다른 파벌에게 온갖 트집이 잡힐 게 뻔했다. 자칫 파벌 내에서도 입지가 줄어들 우려가 있었다.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자자, 너무 흥분하지 마십시오. 지금 누구 책임인지를 따질 게 아니라, 이 종교쟁이들이 왜 갑자기 전쟁을 일으켰는지 이유를 아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번 원로회의 역시 대책 없이 길어졌다.
과거 미궁의 심층을 탐사한 4인의 장로가 회복을 위해 깊은 잠에 빠지면서 장로회가 사실상 공석이 되고, 원로회가 탑의 실질적인 수장이 되면서부터 일상적으로 보이게 된 광경이었다.
이를 ‘정치적으로 부패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사실 어폐가 있다. 원로 교수들은 정치적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게 아니라, 마법을 연구하는 데 사사건건 방해가 되는 상대 파벌을 치워버리고 싶은 거니까.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정치적으로 부패한 나라의 수뇌부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상대 파벌을 이간질하고, 트집을 잡거나 불필요한 책임을 덮어씌우고, 뒤로는 뇌물 따위를 주고받거나 하며 탑 내의 여론을 조종하는 등.
법왕국의 선전포고는 원로회에게 사실 크게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국경 임무를 맡은 마법사 몇 명이 좀 죽거나 다친 모양이지만 대신할 마법사들은 얼마든지 있는 데다가, 애초에 법왕국의 전력은 보석탑과는 비교할 가치도 없이 약할 거라고 얕보고 있었으니까.
때문에 회의 초반에만 잠깐 다뤄지고 곧바로 방치되고 말았다.
회의를 빙자한 권력다툼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누군가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였다. 원로 교수들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며 방문자를 들여보냈다.
단 한 명, 졸트 타기온만이 마음속으로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아, 알코스…… 자이안 알코스 님이 당장 원로 교수님들을 만나야겠다고 하십니다.”
이번 불청객은 법왕국의 선전포고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폭탄이었다.
* * *
미궁으로 통하는 복도를 지키고 있던 준교수가 문득 인기척을 느꼈다. 발소리를 전혀 숨기지 않고, 자이안이 미궁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미궁을 오가는 자이안을 상대한 준교수는 나름 친근함을 드러내며 그에게 다가갔다.
“자이안 알코스 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미궁 탐사 현황 보고를 부탁드립…….”
“비켜요!”
사나운 일갈에 준교수는 저도 모르게 벽에 바짝 붙어 비켜섰다. 사실 이 행동은 업무 규정 위반이었다.
미궁 입구를 지키는 업무를 맡은 마법사는 미궁을 출입하는 모든 인원을 관리하고 그들이 몇 시간 동안 미궁의 어디까지 탐색했는지 기록해야 했으니까.
그러나 차마 지금의 자이안을 붙잡고 그런 걸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준교수는 지난번 마물 범람 사태 때 방위 부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자이안이 난입했던 바로 그때였다. 그리고 지금 자이안은 가차 없이 마물을 도살하던 그때와 똑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자이안이 지금 화가 많이 났거든요.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뒤이어 나타난 처음 보는 어린 남자아이의 모습에 두 준교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장 붙잡고 신원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런 짓을 했다가는 목숨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둘은 서로 시선을 맞춘 다음 아무것도 못 본 척 합의하기로 했다.
「자이안, 너 지금 너무 흥분했다.」
“지금 흥분 안 하게 생겼어요?!”
감정에 맡겨 버럭 소리치는 자이안을 보고, 프레이는 그저 어깨만 으쓱했다. 자이안이 화를 내는 건 각성자들도 충분히 이해했다.
완전히 감정에 휘둘려 주위의 말이 들리지도 않을 정도라면 문제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자이안은 감정을 아주 잘 절제하고 있는 축이었다.
미궁에서 케이에게 들은 실험의 내용은 어찌 보면 예상 그대로였고 어찌 보면 예상을 한참이나 뛰어넘는 참혹한 것이었다.
실험의 주체는 원로 교수 졸트 타기온과 그를 중심으로 한 파벌이었다.
케이가 보고 들은 바에 의하면 그들의 목적은 인간의 종족 단위의 진화. 이를 위해 여러 수단을 실험했으며, 마물 역시 그 수단 중 하나였다.
졸트와 그 파벌들이 보기에 마물은 인간에 비해 육체적으로 명백히 고등한 생물이었다. 그런 마물의 신체를 일부분이라도 인간에게 성공적으로 이식할 수 있다면 진화로의 계단을 한 단계 오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들이 실험체로 쓸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하기는커녕 강제로 납치했다는 사실이다. 차라리 실험이 성공적이었으면 모를까, 모든 실험이 실패로 끝났다.
마물의 신체 조직이 이식된 인간은 예외 없이 이성을 잃고 야생동물이나 다름없는 수준의 지적 퇴행을 보였다.
「실험 참 무식하게도 하네. 각성자도 MP에 과하게 중독되면 마인이 되는데, 일반인한테 강제로 마물의 신체를 이식하면 잘도 버티겠다!」
「원래 과학이라는 게 시행착오를 거쳐 발전하는 법이기는 한데…… 하하, 윤리를 저버린 과학자는 악마나 다를 바 없는 존재죠.」
졸트의 파벌 역시 무식하게 같은 실험방식을 고수하지는 않았다. 이식 부위를 바꿔보기도 하고, 이식하려는 신체의 비율을 세심하게 조절하는 등 여러 시행착오를 거쳤다.
그러나 마물의 신체를 강제로 사람에게 이식한다는 전제가 바뀌지 않는 이상 똑같은 실패작이 양산될 뿐이었다.
“파르곤에서 만났던 그 마물도 분명……!”
차라리 몰랐기를 바란 진실이었다. 그러나 알아버린 이상 외면할 수는 없었다. 알지도 못한 채 자신이 무참하게 죽여 버리고 만 그 마물의 몫까지 포함해, 보석탑은 죗값을 치러야 했다.
게다가 인간을 실험체로 쓰는 실험은 비단 졸트의 파벌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마물과 더불어, 인간은 마법사에게 있어 다른 동식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주 매력적이고 효율적인 실험체였으니까.
시험관에 갇힌 동안 의식은 있으나 의사소통은 일절 불가능한 상태였던 케이는 자기 앞에서 마법사들이 무방비하게 흘린 비밀들을 아주 많이 알고 있었다.
그걸 다 말해줬다간 자이안이 얼마나 화를 낼까 무서워서 일부분은 숨겼을 정도다.
“자이안 알코스가 원로회를 찾는다고 전해요. 지금 당장!”
탑의 최상부, 원로회의 문 앞으로 전이된 자이안은 가차 없이 고급스러운 문을 열어젖혔다. 경첩이 부서지고 문 한 짝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 너머, 33명의 원로교수급 마법사들은 저마다 불안해하거나, 불편해하거나, 흥미로워하거나, 유쾌해 하며 가지각색의 반응이었다.
자이안은 이를 악물고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무리였다. 저들의 얼굴만 봐도, 그 눈 깊은 곳에 숨겨진 추악한 본성을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자이안은 등 뒤에 숨겨둔 케이를 앞으로 내밀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이 아이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여기 분명 있을 거예요.”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누군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자이안은 한 단어 한 단어 씹어뱉듯 다시 말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실험체 K예요.”
“……!”
의자에 앉아있던 졸트 타기온이 경기를 일으키며 뒤집어졌다. 자이안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아는 분이 있는 것 같네요.”
“실험체…… K? 그게 뭡니까?”
원로 교수 중 한 명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얼핏 보면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것 같지만, 사실 그는 졸트의 파벌과 적대하는 파벌 소속이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졸트가 반응한 것을 보고 그를 견제하는 데 이용할 수 있겠다 싶어 나선 것이다.
“졸트 타기온 교수.”
탑 내에서, 준교수나 정교수 등 교수급 이상의 직위를 가진 마법사를 단순히 교수라고만 부르는 건 굉장히 큰 무례였다. 당연히 자이안도 알면서 한 말이었다.
졸트는 반발하려는 듯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으나, 사납게 노려보는 자이안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고는 다시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당신 입으로 직접 말할래요? 아니면 제가 케이에게 들은 모든 사실을 하나하나 말할까요?”
“그건…… 그게…… 저는 자이안 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실험체 K라뇨?”
“……!”
한순간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자이안은 피가 새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세게 깨물고 간신히 감정을 억눌렀다. 프레이가 솔직하게 감탄했다.
「잘 참았다, 자이안. 여기서 감정을 드러내 봤자 저놈들에게 빠져나갈 기회를 줄 뿐이야.」
‘삼촌, 저 지금 너무 힘들어요.’
「이해한다. 정 못하겠다면 우리 중 아무나 불러라. 네가 원하는 대로 해결해줄 테니.」
자이안은 꾹 참고 고개를 저었다. 프레이도 그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다.
“자이안 알코스 님! 여기 계십니까?”
갑자기 불청객이 찾아왔다. 다급히 회의실 앞으로 뛰어온 준교수급 마법사가 자이안을 발견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이안은 한 차례 원로 교수들을 노려보고는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인가요?”
“자이안 님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소아레스의 부하’라고 하면 알 거라고 하셨습니다만.”
생각지 못한 이름에 자이안은 눈을 부릅떴다. 프레이가 저도 모르게 손뼉을 짝 쳤다.
「와, 미치겠네. 이 타이밍에?」
“……안내해 주세요.”
원로 교수들을 놔두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뼈아팠지만, 소아레스의 노력을 뒷전으로 할 수도 없었다. 자이안은 케이를 데리고 다시 탑 1층으로 내려왔다.
탑의 입구 바깥, 마법사들이 삼엄하고 지키고 있는 너머에 며칠 동안 고생한 듯 보이는 여성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땀과 먼지로 지저분한 머리는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고, 눈 밑은 며칠째 제대로 못 잔 것처럼 시커멨다.
자이안이 다가가자, 잠시 그를 빤히 보더니 이내 반색을 했다.
“혹시 자이안 알코스 님이십니까?”
자이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신이 나서 자이안에게 다가가려다가 마법사들에게 가로막히고는 멋쩍게 웃으며 다시 몇 걸음 물러났다. 밖으로 나간 자이안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소아레스의 부하라고요?”
“예! 올소라 데이톨이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자이안 님.”
마치 군인처럼 깍듯하게 경례한 올소라가 자이안에게 서한을 한 장 내밀었다.
“소아레스 각하가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자이안 님께 필요한 정보’라고 하셨습니다.”
자이안이 서한을 받아들었다. 정말로 필요한 내용을 담백하게 썼을 뿐인 보고서 그 자체였다. 그러나 정작 내용은 조금도 담백하지 않았다.
「……오우야.」
「와, 이건 내가 봐도 조그음…….」
「하하, 금상첨화네요. 아, 이건 설상가상이라고 그러던가요?」
「자, 자이안. 괜찮아요? 너무 흥분하면 몸에 안 좋아요! 시, 심호흡! 심호흡을 해요!」
“…….”
자이안은 무표정하게 보고서를 갈가리 찢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