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산 넘어 산 (1) (61/210)


61화 산 넘어 산 (1)
2022.12.03.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자이안과 프레이의 목소리가 절묘하게 겹쳤다. 까만색 점액질 덩어리의 표면에 어린아이의 손과 머리만 불쑥 튀어나온 기괴한 생물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게 자기를 보고 한 말이라는 걸 뒤늦게 깨닫고 천진하게 말했다.

“안녕! 난 실험체 K야!”

“그걸 묻는 게 아니라…….”

“하지만 난 실험체 K인걸? 사실 내 본질은 실험체 K가 아니지만 이 말 말고는 나를 설명할 단어가 없어!”

혼란스러워진 나머지 자이안은 인상을 쓰며 이마를 짚었다. 비슷한 감정에 빠져 있던 프레이가 간신히 한 마디를 꺼냈다.

「마물……인가?」

「인간에게 공격적이지도 않고, 대화가 통하며 이성적이네요. 마물은 아니죠.」

「아니, 하지만…….」

황금빛을 발하는 그의 마안은 갑자기 나타난 이 생물이 마물에 가깝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물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또 애매했다.

마물이 아닌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물인 것도 아닌, 말로 설명하기 참으로 어중간한 존재였다.

「……마족인가?」

‘아뇨. 마족은 아닐 거예요.’

프레이의 말에 자이안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갖은 싸움을 거치며 단련된 자이안의 감각이, 여태까지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적의 정체를 잘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사실 프레이도 자기 말이 맞을 거라고 생각해서 꺼낸 말은 아니었다.

“잠깐. 네 이름이 실험체라고?”

문득, 자이안의 뇌리에 한 가지 싫은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 나는 실험체 K야! 아, 혹시 내가 ‘실험체’라는 단어의 일반적인 정의에 부합하는 존재인지 궁금한 거야? 그럼 맞아! 나는 실험체야!”

“……누구로부터? 무슨 실험을?”

“나를 실험한 건 인간 마법사야! 그런데 무슨 실험이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예상했던, 그러나 듣고 싶지 않았던 대답에 자이안은 현기증을 느꼈다.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은데, 괜찮을까?”

“그게 궁금해? 친구의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어! 여기서 얘기하면 돼?”

“자리를 옮기자. 마물들의 눈에 띄지 않는 안전지대를 알고 있어.”

거침없이 미궁을 나아가기 시작한 자이안의 뒤를 실험체 K가 순순히 쫓았다. 자이안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경계를 늦추지 않았으나, 결국 임시로 마련한 거점에 도착할 때까지 실험체 K는 어떤 돌발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유리아의 활약이 이런 곳에서 빛을 발한 걸까요?」

흥미와 웃음기를 머금은 크룩스의 말에 자이안은 며칠째 만나지 못한 동료의 얼굴을 잠시 떠올렸다. 연락이 끊어지거나 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는 충분한 단서를 모을 때까지 탑의 수색을 계속하겠다며 단독행동을 고수하고 있었다.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은밀행동은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이안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신기하다. 여기는 인간이 아닌 친구들이 다가오지 못하는 장소구나?”

“인간이 아닌 친구…… 마물?”

“마물? 그 친구들을 마물이라고 불러? 그러고 보니 마법사들도 마물이라는 단어를 자주 언급했어. 너희들은 인간이 아닌 생물을 마물이라고 부르는구나!”

“아니, 모든 생물이 그런 건 아닌데…….”

곤혹스러움에 자이안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인간과 마물, 마물이 아닌 생물의 차이를 설명하는 건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데다가 이 천진난만한 미지의 존재가 그걸 제대로 이해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이건 나중에 천천히 설명해줄게. 먼저 네가 어떤 실험을 받았는지 얘기해줘.”

“알았어! 그 정도 부탁은 당연히 들어줘야지!”

자기만 믿으라는 듯 호언장담한 실험체 K가 얘기를 시작했다.

“나는, 음…… 아마도 인간의 태아와 ‘나의 심장’을 뒤섞어서 만들어졌어.”

“…….”

상상을 뛰어넘는 첫 마디에 자이안과 각성자들은 말문을 잃었다.

“인간의…… 태아?”

“응. 생후 3개월 정도의 어미를 잃은 인간 태아에 ‘나의 심장’을 이식한 다음 존재를 뒤섞어서 만들어진 게 실험체 K야.”

잘못 들은 것도, 실험체K가 잘못 말한 것도 아니었다.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속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한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인간 태아에 나의 심장을 이식한 다음 존재를 뒤섞어서 만들어진 게 실험체 K, 라…… 의미심장한 표현을 하네요, 저 친구. 아니, 저 아이?」

한편 크룩스는 실험체K의 말을 흥미롭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상한 표현이긴 하구만. 인간 태아, 심장의 주인, 그리고 실험체K가 각각 별개의 존재라는 것처럼 말하고 있어.」

「오, 프레이 형, 역시 날카로운 안목. 아마 그게 가장 정확한 분석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나저나 태아에게 이식했다는 심장의 주인이라는 건 누굴까요?」

「글쎄에. 아마 마물이겠지이?」

「자, 잠깐만요. 당신들은…… 저런 말을 듣고도 그런 냉정한 소리가 나와요?!」

각성자들이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하려는 가운데 넷 중 가장 어린 유민이 셋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며 빽 외쳤다. 자이안 역시 그녀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유민 누나 말씀이 맞아요. 삼촌들은 화가 나지도 않으세요?’

세 각성자들은 새총이라도 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쓴웃음을 삼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화가 안 나냐고 하면 그건 아닌데에…….」

「하하, 우린 이런 일은 이미 익숙해져 버렸거든요. 한두 번 겪은 게 아니라서.」

「지금 네가 느끼고 있는 그 감정이 옳다, 자이안. 우리는, 뭐, 그냥…… 크룩스 놈 말대로, 그런 일 하나하나에 감정을 터뜨리기엔 지나치게 닳아버렸을 뿐이야.」

「전 아니거든요! 은근슬쩍 저까지 끼워 넣지 마세요!」

「아, 그래, 알았다 알았어. 유민이 저것도 빼고. 속도 여린 놈이 하여간 겉으로만 빽빽 시끄럽다니까.」

‘…….’

뭐라 말하려 했지만, 결국 자이안은 아무런 말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화를 내야 당연한 상황에서 목소리 한 번 안 높이고 냉정을 유지하는 그들이 매몰차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주제넘을지도 모르지만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지금 누구랑 얘기하고 있는 거야?”

갑자기 입을 다문 자이안을 의아해하며 빤히 보던 실험체 K가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겨우 의식을 되돌린 자이안은 그 물음에 흠칫 놀랐다. 실험체 K의 시선은 자이안의 목에 걸린 펜던트에 고정되어 있었다.

“친구는 신기한 걸 가지고 있구나.”

「저놈…… 설마 펜던트의 통신 기능에 간섭할 수 있는 건가?」

「그게 가능했다면 조금 전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을걸? 그보다는 펜던트 내부의 MP 작용을 분석한 게 아닐까 싶은데에.」

「……어느 쪽이든 평범한 생물은 아니네요.」

자이안이 저도 모르게 펜던트를 손으로 숨겼다. 정작 실험체 K는 그다지 관심 없다는 듯 해맑게 다시 자이안의 눈을 마주 볼 뿐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반응에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실험체 K라는 미지의 존재를 적이라고 여겨야 할지 아군이라 여겨야 할지 도저히 판단이 서지 않았다.

“미, 미안해 친구. 기분 나빴어? 난 그냥 신기해서 그랬어.”

자이안이 인상을 쓴 걸 알아보고는 실험체 K가 시무룩해져서 사과했다. 그 모습에 자이안은 문득 자기가 굉장히 부질없는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을 대할 때 선악이나 적아 따위가 명확히 구분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물론 이 아이는 엄밀히 말하면 사람이 아니지만…….’

말이 통하고, 공감을 나눌 수 있다. 겉모습이 다소 사람과 동떨어졌다고 하더라도 무작정 배척하거나 언제 적으로 돌변할까 두려워 경계하는 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자이안이에요. 자이안 알코스.”

실험체 K를 똑바로 바라보며 자이안이 말했다.

“‘친구’라고 부르는 건 어색하니까, 앞으로는 그냥 편하게 자이안이라고 불러요. 저도 당신을…… 음…… 실험체 K는 너무 이상하니까, 케이라고 부를게요. 어때요?”

“자이안……이라고…… 불러도 돼?”

“친구라고 했잖아요? 친구끼리는 편하게 이름으로 부르는 거예요.”

“……응, 그러면…… 자이안.”

조심조심 이름을 부른 실험체 K, 아니 케이의 얼굴에 곧이어 환한 웃음이 번졌다. 어느새, 자이안도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적지 한복판에서 지내고 있었던 셈이다.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거야.’

그 모습을 지켜보며 프레이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보석탑에 머문 뒤로, 유리아와 소아레스를 제외하면 오가며 만난 모든 이들이 속에 적의를 품었거나 흑심을 품었거나 둘 중 하나뿐이었다.

타인의 속내, 특히 악한 마음에 민감한 자이안이다.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주위에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태연한 척 굴었을 뿐.

그나마도 소아레스가 법왕국으로 떠나고 유리아가 단독행동을 시작한 뒤로는 한시도 마음을 편히 놓을 여유가 없었으리라.

‘모처럼 찾아낸 마음의 오아시스가 저런 마물인지 사람인지도 모를 이상한 놈이라는 것도 웃기지만…… 자이안한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겠지.’

프레이도 케이를 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마물의 신체를 재료로 써서 만들어진 실험체인 이상 완전히 경계심을 버리지 못할 뿐.

수십 년간 각성자로서 마물과 싸우며 생긴 일종의 직업병인 셈이다.

‘어차피 위로 올라가면 또 스트레스만 잔뜩 받을 테고. 지금이라도 푹 쉬어라, 자이안.’

프레이는 가슴 깊이 바라며 이제 막 친구가 된 둘의 모습을 따뜻하게 지켜보았다.

……여담으로, 이 훈훈한 광경이 박살 나기까지는 채 수십 분도 남지 않았다.

* * *

정교수급 마법사 델로스 로한은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상태였다. 본래 3일 전에 끝나야 했을 국경 감시 임무가 불합리한 이유로 7일이나 더 연장됐기 때문이다.

‘저 새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국경까지 기어 나와서 지랄하는 게 내 잘못이냐고!’

델로스는 이를 갈며 손에 든 임무 연장 지시서를 북북 찢어버렸다. 쓸데없이 정교한 수복 마법이 걸린 지시서는 수십 조각으로 찢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공중에서 짜 맞춰져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최근 들어 델로스 로한은 스트레스를 참을 수 없게 될 때마다 지시 서한을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찢어버리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었다.

“정교수님. 잠깐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야! 아까 내가 한 말 귓등으로 들었어?!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나 찾지 말랬잖아!”

“로한 정교수님. 지금 국경 상황이 조금…… 아니, 많이 심각합니다.”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목소리에 델로스 로한은 찬물을 끼얹어진 것만 같았다. 국경 상황에 문제가 생긴다? 그것도 자기 연장 근무 기간에?

자칫 잘못했다간 욕이란 욕은 잔뜩 얻어먹고 온갖 책임을 덤터기로 진 다음 폐기물 처리반으로 좌천될 가능성도 있었다.

“자, 잠깐 기다려. 금방 나간다!”

옷매무새를 정리한 델로스 로한이 완드조차 챙기지 않고 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부하는 공황 상태에 빠진 듯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심각한 상황이 터졌음이 확실했다.

“뭐야, 무슨 일인데! 제대로 설명을 해 봐!”

“국경에 평소랑 똑같이 놈들이 왔습니다. 왔는데…… 수가 너무 많습니다. 그,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또 뭐!”

“신성기사단이 썩어 있는 것 같습니다.”

벼락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신성기사단, 단원 전원이 강력한 신성술사로 이뤄진 법왕국 최대 전력이었다. 그런 병력을 꺼냈다는 건, 법왕국이 본격적으로 ‘무력 시위’를 펼칠 것이라는 뜻이었다.

“이런 염병…… 혹시 탑에서 소식 온 건 없냐? 자원 공급이 정상화됐다든가, 미궁의 사고가 다 해결됐다든가.”

“그런 소식은 저보다 정교수님이 먼저 알아야 정상이지 않습니까.”

“썅, 그것도 그러네.”

요새라기보다는 망루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건물에 올라선 델로스 로한이 망원 마법을 사용해 국경을 살폈다. 부하가 보고한 그대로였다.

병사로 보이는 게 최소 300명. 신성기사단으로 보이는 집단이 50명. 무력 시위가 아니라 당장 국지전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병력이었다.

‘국지전? 이런 썅, 잠깐, 설마?’

“사악한 마법사들은 들어라!”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친 순간 국경 너머 법왕국 쪽에서 마도구로 증폭된 듯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병사들이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시위에 매겨진 화살촉에 찬란한 흰 빛이 어렸다.

‘화살에 신성술을!’

“전원, 당장 결계를 펼쳐라! 적들이 신성술 사격을 준비하고 있다!”

델로스 로한의 지시에 따라 휘하의 마법사 5명이 급히 결계를 준비했다. 일견 압도적이기까지 한 수적 차이. 사실 평시에는 그래도 괜찮았다. 마법사라는 것 자체가 창칼로 무장한 일반 병사 따위는 범접할 수도 없는 강력한 비대칭 전력이니까.

그러나 상대가 신성술로 무장하고 신성기사단을 앞세워 작정하고 공격을 시작한다면?

“태양신께서는 그동안 관용의 정신으로 네놈들을 포용했으나, 너희 사악한 악마의 하수인들은 이에 감복하고 굴종하기는커녕 감히 법왕국의 마을을 습격하고, 사람들을 죽이고 납치하는 등 잔악무도한 악행을 저질렀다!”

“미친놈들이! 자기들도 미궁 자원으로 꿀 빨고 있었으면서 그걸 들먹인다고?! 정말로 우리랑 척을 질 생각인가!”

“이제 태양신께서는…… 더 이상 네놈들을 용서치 않기로 하셨다!”

새하얀 빛의 꼬리를 그리며 화살의 비가 무수히 쏟아졌다.

마력과 신성력이 반발하듯, 마법과 신성술 역시 반발한다. 두 기술이 정면으로 부딪치면 아주 단순하게도 힘이 더 강한 쪽이 이긴다.

신성술이 부여된 100개의 화살과 5명의 마법사가 사력을 다해 펼친 결계가 맞부딪쳤다. 대치는 길지 않았다. 결계가 산산이 부서지고 마력의 잔해가 빛으로 변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런 제길……!”

욕지거리를 내뱉은 순간, 델로스 로한은 별안간 오른쪽 눈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그도 잠시 갑자기 팔다리의 힘이 쭉 빠져나가더니 몸이 멋대로 앞으로 기울었다.

‘아? 힘이. 아파? 서 있을. 나는?’

사고가 뚝뚝 끊어졌다. 화살 한 발이 오른쪽 눈을 뚫고 뇌를 관통했음을 델로스 로한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이해했다.

“태양신의 불의 심판이 네놈들의 악행을 정화하리라!”

그것이 그가 숨을 거두기 직전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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