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법왕국의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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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법왕국의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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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법왕국의 정세
2022.12.02.
희미하게 흔들리는 커다란 마차 안. 소아레스는 의식을 잃은 척 눈을 가늘게 뜬 채 끊임없이 주변 상황을 정탐하고 있었다.
소아레스를 포함해 마을에서 납치된 여성들은, 비록 혼수상태를 유발하는 약물에 의해 의식을 잃은 상태였으나 의외로 정중하게 다뤄지고 있었다.
기사들이 꾸준히 물과 죽을 먹였고, 기사단 전원이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불미스러운 일은 일어날 낌새도 없었다.
‘의외는 아닌가?’
아직까지는 추측이었으나, 정말로 성녀에게 문제가 생겨 이를 대체할 여성을 찾고 있는 거라면 정중하게 취급하는 게 당연했다.
결정적인 단서가 아직 없을 뿐, 납치된 이들을 성도로 호송할 거라는 말까지 나온 걸 봐서는 확실하다고 봐도 좋았다.
‘성녀에게 문제가 생겼지만, 대중적으로 공표할 수는 없는 불미스러운 내용이다. 때문에 성녀를 대체할 이를 은밀하게 찾아야 한다. 대대적으로 공표하고 성녀가 될 자격을 가진 사람을 가려낼 수가 없으니, 일단 마구잡이로 납치해서 숫자로 밀어붙인다. 이 정도인가? 그러면 성녀가 되지 못한 여자들은 어떻게 되지? 증거인멸?’
너무 비인도적인 방식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법왕국이라면 그 정도는 할 법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겉으로는 태양신의 교리를 따르며 선과 정의를 부르짖지만, 내실은 대륙 전체를 뒤져도 비견될 나라가 없을 만큼 정치적으로 부패한 나라가 법왕국이다.
귀족과 평민의 구분이 없는, 만인이 태양신의 시종인 평등한 나라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법왕이나 주교들을 비롯한 일부 고위 사제가 권력을 독점한 채 귀족적인 향락을 누리고 있었다.
아니, 다른 나라의 귀족보다도 더 심했다. 귀족은 가진 권력만큼 책임과 의무를 지는 법이건만, 법왕국의 고위 사제는 의무는 저버린 채 권력만을 누리고 있으니까.
사실 다른 나라에도 부패한 귀족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법왕국은 아예 수뇌부 전체가 부패했다는 게 문제다.
성녀라는 살아있는 신성이 없었더라면 일찌감치 썩어 문드러져 사라졌을 나라다.
‘바로 그 성녀에게 문제가 생긴 이상, 이제 정말로 썩어 문드러지기 직전이 된 거지.’
솔직히 말하면 이런 나라가 망해서 없어지든,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이든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자이안의 앞길에 방해가 될 것이 확실시되는 이상 가만히 놔둘 수도 없었다.
‘그 아이도 나와 비슷하게 추측했을 가능성이 높겠네.’
연락이 끊어진 부하의 행적을 떠올려보고 소아레스는 다소 안심했다. 불미스러운 사고를 당한 게 아니라, 지금 소아레스처럼 정세를 확실히 파악하기 위해 자진해서 내부로 침입한 것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편지가 닿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됐다.
성녀의 대체재로 다뤄지고 있는 상태로 몰래 편지를 쓰고 전서구로 이를 보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터다.
‘도망치는 발은 빠른 아이였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믿자. 나도 조만간 성도에 도착할 테고.’
소아레스를 포함한 여성들을 납치한 기사단이 은밀하게 성도로 들어가고, 이와 교대하듯 다른 기사단이 성도를 나왔다. 아마 또 비슷한 작업을 벌이려는 것이리라.
그런 사실들을 냉정히 분석하며 소아레스는 성도의 중심부, 태양궁 알마르솔에 무사히 잠입할 수 있었다.
‘이건, 설마…….’
결론부터 말하면, 소아레스의 추측은 틀렸다.
법왕국의 부패는 그녀의 상상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상태였다.
‘맙소사. 마약이잖아.’
의식을 잃은 척하는 그녀의 앞에 잔이 놓였다. 안에 담긴 음료를 냄새로 분석한 소아레스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각성제, 이완제, 환각제까지 골고루 섞어 놨어. 게다가 배합도 완벽해. 평범한 사람이 이걸 마시면 다른 사람의 명령에 복종하는 인형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될 거야. 세뇌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약물이야.’
다행히 소아레스는 이런 정신성 약물에 대한 면역력이 있었다. 근위부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어렸을 적 받은 훈련과 시술 덕분이었다. 한발 먼저 잠입했을 그녀의 부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아르스의 아티팩트라는 보험도 있었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장신구가 아닌 문신 형태로 몸에 새겼기 때문에 아티팩트가 몰수당할 걱정도 없었다.
‘법왕국의 상황이 예상보다 더 심각하다. 이걸 방치했다간 분명 화근이 될 거야. 대체 무슨 음모를 벌이고 있는지 확실히 알아야 해.’
결심을 마친 소아레스가 마치 의식이 돌아오려는 것처럼 희미하게 몸을 뒤척거렸다. 그녀의 곁에서 상태를 감시하고 있던 사제가 흠칫 놀라더니 고위 사제에게 급히 보고했다.
조금 뒤 다시 돌아온 그가 떨리는 손으로 소아레스의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그리고 소아레스의 입을 조금 벌려 아주 천천히 약물을 흘려 넣었다.
약물을 삼키고 잠시 뒤 강렬한 현기증이 엄습했다. 다행히 현기증은 오래지 않아 잦아들었고, 그 뒤로 다른 이상도 느껴지지 않았다. 소아레스는 자신의 판단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소아레스의 ‘성녀 후보’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소아레스의 연기는 완벽했다. 그녀는 완전히 약에 중독되어 이지를 잃은 꼭두각시처럼 행동했고, 그녀의 수발을 맡은 수도사제는 물론 가끔 만나는 고위 사제들도 그녀가 사실은 멀쩡한 상태라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듯했다.
사제들은 그녀를 앞에 두고 온갖 중요한 정보들을 거리낌 없이 발설했다.
“이번 달에 계약된 미궁 자원의 수량이 아직 절반도 수입되지 않았다고 그러던데, 사실입니까?”
“허허, 그 야만적인 마법사 놈들이 제대로 약속을 지킬 리가 없지요. 우리가 자비심으로 저들을 놔두고 있는 것도 모르고……. 변명하기로는, 미궁에 이상 사태가 벌어져 자원 채취에 차질을 빚고 있다더군요.”
“저도 첩자를 통해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보석탑이 미궁의 관리에 실패해 마물들이 지상까지 쏟아져 나오는 사태가 있었다더군요.”
“어허. 틴디아 추기경, 말을 가려 하셔야지요. 첩자가 아니라 순례자이지 않습니까.”
“하하하. 다히트 추기경께서는 항상 그렇지만 걱정이 너무 과하십니다. 여기 사람이 저희 둘 말고 누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사람은 저희 둘뿐이지만 태양께서는 항상 저희를 굽어 살피십니다.”
“하하하! 태양께서는 저희 행동을 자랑스러워하실 텐데 무슨 걱정이십니까?”
“흐음…… 틴디아 추기경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허허, 확실히 제가 노파심이 과했군요.”
예를 들면 보석탑과 법왕국이 미궁 자원에 관해 체결한 계약의 자세한 내용.
“그나저나…… 저쪽에서 계약을 준수하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도 계약을 지킬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저 치들이 실험체들을 붙잡아가는 걸 법왕 성하께서는 지켜만 보고 계신답니까?”
“후후후, 염려치 마시지요. 성하께서는 그저 저들을 가련히 여겨 유예를 주고 계실 뿐입니다. 저들이 계약을 준수하지도 못하면서 감히 법왕국의 성도들을 산 채로 잡아 같잖은 연구의 실험체로 쓰는 만행을 멈추지 않는다면…… 정화의 불로써 온몸을 불태운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뼈저리게 알게 될 겁니다.”
“그 말씀은…… 마침내 성전이 머지않았다는 말씀이시군요.”
두 추기경의 밀담에 소아레스는 현기증이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간신히 삼키며 그녀는 간신히 냉정함을 유지한 채 정보를 정리했다.
‘법왕국 변방의 마을을 습격하고 사람들을 납치해가는 건 애초에 보석탑이 먼저였구나. 법왕국이 다른 나라보다 훨씬 싼 값에 미궁자원을 수입할 수 있던 정확한 이유가 바로 이거였어. 국민을 팔아 자원을 수입하고 있었던 거야.’
들을수록 기가 차지만 그만큼 유용한 정보는 그 밖에도 많았다. 왜 이렇게 과격한 방식으로 ‘성녀 후보’를 모아야 했는지 정확한 내막이라든지.
“성녀의 힘이 또 폭주할 조짐을 보였다고 들었습니다.”
“아직 ‘폭주’라고 표현할 정도는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불안정한 것은 사실이지요. 금번 성녀가 자질이 부족하다는 소문은 알음알음 있었습니다만, 이 정도로 힘을 다스리지 못할 줄이야……. 아 참, 성도 근방에 또 마물 떼가 발호했다고 들었습니다. 케인리히 주교께서 지휘를 맡으셨지요? 전황이 어떻습니까?”
“안 그래도 흩어진 잔당을 모두 토벌하고 오는 길입니다. 마물은 전멸했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피해가 좀 큽니다. 신성 제17 기사단은 부대가 재편될 때까지 실전에 투입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하루빨리 새로운 성녀께서 나타나셔야 할 텐데 말입니다.”
“주여, 정화의 불로써 악을 불태우시고 찬란한 태양 빛으로 저희를 이끄소서…….”
‘성녀의 힘이 불안정해졌고 그 결과 법왕국 각지에 마물이 나타났다? 그 반대인가? 법왕국 각지에 마물이 나타났으나 성녀의 힘이 불안정해 이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어느 쪽이든, 급하게 성녀 후보를 모은 이유는 알겠어.’
그러는 와중에 한발 먼저 잠입했으리라 생각되던 소아레스의 부하도 만날 수 있었다. 예상대로 그녀 역시 소아레스처럼 약물에 중독된 척하며 은밀하게 첩보를 벌이고 있었다.
“라, 란키리오 근위부장 각하?! 어떻게 이곳에……!”
“올소라. 역시 여기 잠입해 있었군요.”
인원이 두 배가 되자 효율은 배 이상으로 뛰었다. 둘은 사제들의 눈을 피해 틈틈이 정보를 교환하며 법왕국의 민낯을 그야말로 낱낱이 파헤치기 시작했다.
며칠에 걸쳐 정보를 모으고, 취합하며 불필요한 내용을 자르고, 교차 검증을 통해 신빙성을 따지고, 이를 간결하게 정리하는 과정을 여러 번 거듭한 끝에 마침내 둘은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폭주하려는 힘을 억지로 주입해 불안정한 성녀를 양산한다니…… 이건,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아니오, 올소라. 사람이 아니면 이런 발상은 도저히 떠올리지 못하겠지요. 불필요한 감정은 접어두세요. 최종 정리를 시작하죠.”
“……알겠습니다, 각하.”
차기 성녀를 예언하고 그렇게 선택된 이에게 힘을 부여하는 고대의 유물, ‘성유물’이 힘을 잃기 시작한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성유물의 힘이 약해지면서 법왕국 전체를 수호하는 가호에 이상이 생겼다. 마물이 발호하기 시작하고, 성녀가 힘을 제어할 수 없게 됐다.
법왕을 비롯한 고위 사제들은 성유물을 수복하려 시도했으나 수복으로 어떻게 해 볼 단계가 아니었다.
그들은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성유물은 근시일 내에 모든 힘을 잃을 것이다. 이는 법왕국의 체제가 근간부터 무너짐을 의미한다. 그 전에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다른 대체재를 찾아야 한다.
마침 적합한 것이 근처에 있었다. 미궁이다.
‘법왕국은 보석탑을 무너뜨리고 미궁을 점령할 생각이었어. 변경에서 납치한 성녀 후보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무기에 불과해.’
성녀로서 적합한 이가 아니더라도, 여성이라면 짧게나마 성유물의 힘을 나눠 받을 수 있다. 문제는 안 그래도 불안정한 힘을 자질도 없는 이가 받아들였다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
법왕국은 바로 그 인간 시한폭탄을 전장에 보내 보석탑의 전력을 깎고, 동시에 그녀들의 자폭을 보석탑의 만행이라 날조해 흔들리는 민심을 잡아두려는 것이다.
‘올소라의 기분도 이해가 돼.’
이런 일의 원흉이 마족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으리라. 그러나 인간 역시 때로는 마족이나 다름없는 사악한 존재가 될 수가 있음을 소아레스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혐오감에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이제 이걸 자이안 님께도 전해야 하는데…….’
통신용 아티팩트는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이런 혐오스러운 내용을 그에게 직접 전달하기가 죄스러웠다.
그렇다고 거짓 보고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전쟁은 조만간 벌어질 테고, 그때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될 자이안이 느낄 배신감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보고서…… 보고서를 쓰자. 말로 직접 얘기할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보고서라면…….’
소아레스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담백하게 정리한 보고서를 부하인 올소라에게 건넸다. 당연히 올소라는 기겁하며 반발했다.
“각하를 사지에 두고 저 혼자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란 말씀이십니까?!”
“탈출의 기본은 산개라는 걸 잊었나요, 올소라? 당신이 먼저 탈출하면, 저 역시 틈을 봐서 다른 방향으로 탈출할 겁니다.”
“싫습니다. 저도 돕겠습니다!”
“올소라, 오랫동안 못 봤더니 제법 거만해졌군요. 제가 당신의 도움을 받아야만 탈출할 수 있을 정도로 얕잡아보이다니.”
결국 부하인 올소라가 꺾였다. 깊은 밤, 감시가 소홀해진 잠깐의 틈을 타 성도를 탈출한 올소라를 배웅한 뒤 소아레스는 결연한 표정으로 태양궁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탈출하겠다고는 했지만, 그 사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거라고는 안 했으니까.’
홀로 남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래도 법왕국의 음모를 방해하고 전쟁을 조금이라도 늦추는 것 정도는 가능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