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보석탑의 사소한 사고 (5) (59/210)


59화 보석탑의 사소한 사고 (5)
2022.12.01.


원로교수들의 회의를 빙자한 개싸움은 꼬박 반나절이 지난 뒤에야 간신히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내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자이안은 근심과 걱정을 벗어던진 듯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노마법사들이 펼친 개싸움을 관용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싸우는 동안 각성자들과 교신하며 마법과 무술의 이론에 대해 토론하는 등 충실한 시간을 보낸 덕이었다.

마법사들도 그 긴 시간 동안 자이안을 마냥 방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회의가 길어진 것은 그들이 그만큼 자이안의 대우에 대해 고심했기 때문이었다.

도중부터는 자이안도 간간이 끼어들어 의견을 교류했고, 그렇게 나온 결론이 다음과 같았다.

첫째. 보석탑은 자이안 일행을 단순한 방문객이 아닌 최소 정교수급 마법사와 동등한 귀빈으로서 대우한다.

둘째. 자이안 일행은 어떠한 통제도 없이 언제든지 미궁에 출입할 수 있으며, 마물 범람 사태에 자유롭게 개입할 수 있다.

셋째, 자이안 일행이 미궁에서 습득한 모든 자원 및 부산물은 온전히 그들이 소유다.

「얼핏 보면 파격적인 조건 같지만…… 아마 저 정도 조건은 저들에게 큰 손해가 아닐 겁니다.」

그 외에도 여러 자잘한 권리들이 있었지만, 애초에 자이안이 원한 것은 그런 권리 같은 게 아니었다. 그들이 일부러 마물을 밖으로 흘려보내 불필요한 희생을 확산시켰음을 인정하고, 죗값을 치르고, 두 번 다시 그러지 않을 거라는 확답을 들을 수 있으면 족했다.

그러나 비슷한 화제를 언급하기만 해도 교묘하게 말을 돌리며 변명으로 일관하는 그들을 상대하며, 자이안은 이 자리에서 진상을 밝히려 애쓰는 것은 부질없는 일임을 깨달았다.

「그래도 소득이 없지는 않구만. 마물 범람은 저놈들이 일부러 일으킨 건 아닌 것 같다.」

「저도 형 의견에 동의해요. 만약 그게 저들의 연구와 관련되어 있었다면, 아무리 상황이 급해도 외부인인 자이안한테 처리를 분담하려 하지는 않겠죠. 혹시라도, 만에 하나 여기까지 전부 자이안을 속이기 위한 연기고 지금도 뒤통수를 치기 위해 칼을 갈고 있는 거라면……. 그땐 저희가 한 방 먹은 거죠, 뭐.」

「그 정도로 음습한 잔머리가 돌아가는 것 같지는 않은데에?」

「저도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0이 아닌 이상 염두에는 두고 있어야 하잖아요?」

크룩스의 말을 자이안도 가슴에 새겼다. 명확한 정황증거가 없을 뿐, 지금 눈앞에 있는 33명의 마법사들은 모두 잠정적인 적이었다.

당장은 넘어가겠지만, 자이안은 그들을 용서할 생각이 결코 없었다. 허튼수작을 부리는 걸 보고도 잠자코 묵인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우선…….

「마침 잘 됐다. 이참에 미궁에 박혀서 마물 잡고 렙업이나 잔뜩 해 놓자고.」

「렙업이라니, 아저씨는 표현을 해도 참……」

「뭐? 내 표현이 뭐가 어때서? 요즘 젊은 애들은 다 이렇게 말하더만.」

「그 젊은 애들 유행, 적어도 10년은 지났거든요?」

「……진짜?」

오랜만에 찾아온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충실히 활용할 생각이었다.

즐거운 미궁 공략 시간이 찾아왔다.

* * *

자이안의 동향을 감시하는 부하가 보낸 보고에 졸트 타기온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짚었다.

“벌써 15층을 돌파했다고?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미궁은 5층 단위로 급격하게 난이도가 높아진다.

5층 미만은 연수생들도 조를 짜고 들어가 마물 토벌과 자원 채집 실습을 할 수 있을 정도이지만, 5층을 넘어가는 순간 연수생으로는 어림도 없고 최소 조교급 마법사들이 6인 이상으로 조를 짜고 철저하게 역할을 분담해 계획적으로 공략에 나서야 한다.

하물며 15층 이후는 정교수급 마법사라도 단신으로는 공략이 어려운 심층으로 취급됐다.

‘차라리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군.’

꿈이나 환각 등 불확실한 미신적 요소를 혐오하는 졸트가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떠올릴 정도로 비정상적이었다. 고작 닷새다.

그 사이에 자이안은 무슨 나들이라도 가듯 5층을 뚫고, 10층을 뚫고, 15층을 뚫더니 잠깐 지상으로 올라와 미궁 자원을 소량만 매각한 뒤 다시 미궁으로 들어갔다. 상처 하나 없는 팔팔한 모습으로.

‘인간이 손에 넣을 수 있는 정상적인 힘의 범주가 아니다. 이걸 진정 우리들이 감당할 수 있는가?’

당초 생각했던 최면과 암시를 통한 회유도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부담과 회의감을 느끼는 한편으로, 졸트는 그 사실에 환희를 부르짖는 또 다른 자신을 발견했다.

자이안의 강함의 근원. 마법과 신성술을 동시에 쓸 수 있게 하는 미지의 힘이 바로 그 근원임이 분명했다.

‘대등한 협력관계. 아니, 상전으로 모시는 한이 있더라도 곁에 두고 자이안이 가진 힘의 비밀을 파헤쳐야 해. 그 힘이야말로 인류의 진화를 이루는 열쇠가 될 거다!’

어느새 불안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광적인 열망만이 남았다. 그는 본래부터 그런 인간이었다. 오랜 염원을 이룰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수단이라도 이용할 것이다. 자신의 인간적인 감정 따위는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그래도 희망이 아주 없지는 않군. 자이안은 미궁의 이변이 완전히 해결되기 전까지 탑에 계속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

시간은 충분히 있다. 그 안에 자이안을 완벽히 회유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순전히 자신의 역량에 달린 셈이었다.

‘아직 어린 소년이다. 제아무리 강대한 힘을 가졌어도 정신 어딘가에는 빈틈이 남아있을 터. 그걸 찾아서 파고들 수만 있으면 된다.’

낙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인간은 애초에 나약한 생물인 탓에, 과한 힘을 가질수록 오히려 정신은 불안정해진다.

채 성인이 되지도 않은 소년이라면 더욱 그럴 터다. 한줄기 광명을 찾아낸 졸트의 입가에 어느덧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조, 졸트 원로교수님.

그 미소가 사라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보, 보보,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자주 사용되지 않는 연구실 내부 비밀회선용 통신기가 작동했다. 통신을 건 상대는 연구실 소속 조교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겁에 질린 것처럼 목소리가 벌벌 떨리고 있었다. 졸트는 갑작스러운 불청객에 인상을 쓰면서도 통신기를 들고 대답했다.

-이봐, 내가 어지간하면 이 회선은 쓰지 말라고 했지 않나.

-죄, 죄죄, 죄송합니다, 교수, 교수님. 하지만 이 회선을 쓰지 않으면 보고할 수가 없는 일이라…….

-무슨 일이냐? 용건만 간결하게 말하도록.

-그, 그것이…….

한참이나 더듬거리던 조교가 마른침을 삼키고는 간신히 용건을 입에 담았다.

-‘실험체 K’가 탈주했습니다.

-응? 실험체 K?

낯선 단어였다. 그렇다고 아예 처음 듣는 단어도 아니었다. 졸트는 조교가 꺼낸 그 단어를 여러 번 되뇌며 기억 속을 뒤적거렸다. 실험체 K, 실험체 K…….

-……이런 빌어먹을! 지금 그걸 보고라고 하고 있어!

마침내 실험체K가 뭔지,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떠올린 졸트가 저도 모르게 책상을 쾅 내리쳤다.

-당장 연구실 소속 모든 교수들에게 연락해! 탑 전체를 샅샅이 뒤져! 다른 파벌 눈에 띄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회수하란 말이다!
 

* * *

‘실험체K’는 점액질처럼 흐물거리는 새까만 몸을 요령 좋게 움직이며 정처도 없이 나아갔다.

촉수처럼 사방으로 뻗은 감각에 닿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실험체K의 세계는 유리관을 가득 채운 배양액, 그 바깥의 좁은 연구실과 가끔씩 찾아오는 소수의 마법사가 전부였다.

정작 실험체K는 그런 처지를 조금도 비관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밖으로 나오고 보니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불합리한 처우를 당하고 있었는지 자각하게 됐다.

마법사들이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원망을 품기에 그들은 너무나 작고 연약하고 애틋한 생물이었으므로. 그저 바깥 세계가 이렇게나 넓고 신기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에 솔직하게 감격했다.

‘이제 어디로 갈까?’

마법사들이 자행한 과격한 실험의 여파로 실험체K의 기억은 온전치 않았다. 그러나 실험체K는 잃어버린 기억이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기억 같은 불안정한 요소에 의존하지 않아도 자신은 자신이 분명했으므로. 정작 자기 이름이 뭔지도 지금은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히히. 재밌다.’

그래도 확실한 게 하나는 있었다. 바로 실험체K의 이름은 실험체K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험체K는 실험체K가 아니다! 히히, 히히히!’

스스로의 사고에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즐거워하면서도, 실험체K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몸에 새겨진 귀소본능은 잃어버린 기억을 대신해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본질이 변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제아무리 마법사들이 그의 몸을 자르고, 떼어내고, 주무르고, 심지어 다른 것들과 뒤섞어도 결코 변하지 않는 것. 때문에 실험체K는 마법사들의 실험을 아무 불만 없이 얌전히 받아들였다.

‘저 친구는 되게 신기하게 생겼다. 인간이 아닌가 봐. 말이 통하나? 인사를 해볼까? 인사를 받아주면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실험체K의 본질이 정말로 변하지 않은 것인지, 자신의 본질이 변하지 않았다고 믿는 어린아이가 되고 만 것인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였지만 말이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기억이 점점 되살아나는 것 같아! 사실 아무것도 안 떠오르고 있지만! 헤헤.’

호기심을 못 이겨 여러 번 한눈을 팔면서도 실험체K는 꾸준히 더 깊은 지하를 향해 내려갔다. 어느새 중반부를 지나 심층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법사들의 표현으로는 17층이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오? 어? 와아아!’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멀쩡하게 살아 움직이던 생물이 숨을 거두며 쓰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생물의 힘이 가차 없이 다른 생물에게 빨려 들어가는 것도 느껴졌다.

여태까지 겪은 적 없는 새로운 경험이 코앞에 닥쳤음을 예감하고 실험체K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몸을 움직이던 귀소본능마저도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그만큼 강렬한 호기심이었다. 실험체K는 홀린 듯이 나아갔다.

‘인간이다! 어? 아닌가?’

그 생물은 물리적으로는 인간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면에 자리 잡은 본질은 다소 이질적이었다. 인간인 부분도 있었고,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부분도 있었다.

그리고 실험체K는 바로 그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부분’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뭐더라? 까먹었다!’

그러니까, 그게 뭔지 알고 있던 때도 있었다는 뜻이다.

“거기 누구 있어요? ……마물?”

인간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는 생물이 말했다. 실험체K는 처음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시한 게 아니라, 자기한테 하는 말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지금까지 지하로 내려오면서 지나친 어떤 생물도 그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으니까.

“대답하지 않으면 마물로 간주하겠습니다. 어서 모습을 드러내세요.”

두 번째로 목소리를 들은 뒤에야 실험체K는 화들짝 놀랐다. 저 생물은 자기가 여기 있다는 걸 똑똑히 알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실험체K는 기쁜 나머지 허둥지둥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다음에야 자기가 낭패했음을 알아차렸다. 일반적으로 생물은 물리적인 발성기관을 통해 의사소통을 한다.

흐르는 듯한 육신은 돌아다니기에는 편했지만 다른 생물과 대화를 나눌 때는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손을 만들고, 목이랑 입이랑…… 그냥 머리를 하나 새로 만들자!’

말캉거리는 표면에서 조막만 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어 표면이 부글거리더니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남자아이의 얼굴이 마찬가지로 솟아올랐다.

“안녕! 난 실험체K야! 사실 실험체K는 이름이 아닌데 나도 내 이름이 뭔지 잘 몰라! 나랑 친구가 되어줘!”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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