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보석탑의 사소한 사고 (4) (58/210)


58화 보석탑의 사소한 사고 (4)
2022.11.30.


며칠에 걸쳐 법왕국의 변경을 순회하며 첩보를 펼친 결과, 소아레스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법왕국은 이권 때문에 무력시위를 하고 있는 게 아냐. 아예 자기 쪽에서 전쟁을 일으킬 셈이야.’

신성기사단을 도적으로 위장해 자국의 변경 마을을 습격한 건, 이를 보석탑의 만행으로 공표해 국민들에게 반감을 심으려는 의도였다.

국경에서 벌이는 무력시위는 국내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보석탑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연막을 치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상해. 왜 주민들을 모두 죽이지 않지?’

단 한 명이라도 생존자가 있으면 이런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단은 습격하는 마을마다 모든 주민을 죽이지 않고 반드시 한두 명은 기절시킨 채로 생포했다.

그렇게 생포 당한 이들 전원이 20~30대의 여성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애초에 왜 이제 와서 전쟁을? 법왕국과 보석탑은 아슬아슬하게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을 터.’

북쪽에 머리를 맞대고 있는 두 앙숙, 법왕국과 보석탑의 정세는 프리엔 제국 입장에서도 최중요 관심사 중 하나였다.

둘의 관계가 파탄 나 정세가 급변하기라도 하면 바로 아래 국경을 대고 있는 제국 역시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한때 제국 수뇌부의 일원이었던 소아레스 역시 두 나라의 관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힘의 균형이 깨졌다. 혹은 제 손으로 균형을 깨뜨려서라도 전쟁을 일으켜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생겼다. 그 이유가 납치당한 여성들과 관련되어 있다?’

법왕국. 여성. 크게 연관이 없어 보이는 두 단어이지만 한 자리에 늘어놓으면 곧바로 연상되는 또 다른 단어가 있었다. 바로 ‘성녀’다.

‘신성자’와 ‘성녀’는 법왕국과 태양신교의 기원에 해당하는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경전에 의하면 둘은 어둠뿐인 세상에 불과 태양을 끌고 지상에 내려와 인간을 구원했으며, 최후에 신성자는 그 육신과 함께 온 땅을 불태워 정화하고, 성녀는 그가 스스로를 불태운 땅에 솔라레온을 건국했다.

어디까지를 사실로, 어디까지를 허구로 봐야 할지는 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았으나 적어도 둘이 실존했다는 증거는 대륙 곳곳에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도 법왕국 내에서 대를 이어 계승되는 성녀라는 지위와 그 힘이야말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확고한 증거였다.

‘성녀의 지위에…… 힘에? 문제가 생긴 걸까? 그래서 일부러 변경을 골라 나이대가 비슷한 여성들을 납치해서……. 잠깐, 이건 너무 과도한 억측이야. 확실한 정보도 없이 속단해서는 안 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소아레스는 성녀에 관한 추측을 머릿속 한구석에 담아두었다. 미궁이 보석탑의 상징이고 변경백이 일리움의 상징인 것처럼, 성녀가 바로 법왕국의 상징이다.

그 상징에 문제가 생기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 태연하게 자국민을 납치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게 법왕국이라는 나라다.

‘좀 더 확실한 정보가 필요해.’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한 채 기사단을 미행하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으나 결정적인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연락이 끊긴 부하, 그리고 무사히 돌아와 달라고 부탁한 자이안을 생각하면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20~30대의 여성. 민간인으로 변장하면, 저들 눈에는 나 역시 납치 대상으로 보이겠지.’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제국의 케케묵은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용을 죽이려면, 때때로 제 발로 용의 입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 * *

수십 명이 둘러앉을 수 있을 만한 거대한 원탁의 한쪽. 자이안은 팔짱을 낀 채 불편한 표정으로 좌중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똑같구만. 지구든 다른 세계든. 그게 마법사든 아니든 간에.」

프레이의 이죽거림에 자이안은 몇 번째인지 세지도 못할 한숨을 또다시 토했다. 그의 눈앞, 원탁의 다른 자리를 채우고 있는 총 33명의 원로교수급 마법사들이 서로를 향해 고성과 폭언을 퍼부으며 싸우고 있었다.

유일하게 안면이 있는 노마법사 졸트 타기온이 상황 확인을 위해 내려오고, 자이안이 정말로 미궁에서 넘친 마물들을 단신으로 쓸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고는 창백한 안색으로 그를 탑의 최상부로 안내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거기서 졸트가 다른 마법사들에게 자이안을 소개하고 상황을 설명한 뒤부터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믿을 수가 없다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얌전한 축이었고, 대놓고 졸트를 비난하는 자, 하필 졸트가 지휘를 맡은 시기에 이런 사고가 일어났다며 그의 능력을 의심하는 자, 이 일을 빌미로 아예 상관없는 다른 일을 끌어와 졸트를 매도하는 자.

처음에는 잠자코 듣고 있던 졸트도 선을 넘은 발언들에 결국 두 팔을 걷어붙이며 전쟁터로 뛰어들었다.

거기서부터는 손쓸 도리가 없는 난장판이었다. 졸트에게만 향해지던 십자 포화의 불똥이 다른 마법사에게 튀고, 그 마법사가 격앙하며 반론하고, 그걸 빌미로 다른 마법사가 또 신선한 먹잇감을 찾아내 물어뜯고.

점잖게 표현하면 권력가들의 암투의 현장이었고, 나쁘게 표현하면 개싸움이었다.

「저분들은 애초에 자이안이 혼자서 마물들을 처리한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나 봐요. 그냥 이번 일을 빌미로 서로의 권력을 견제하려고 작정한 모양입니다.」

「우와……. 국회의원 같다.」

「하하, 그러게요. 마법사라기보다는 꼭 정치인 같네요.」

「내가 저기 있었으면 다 같이 공평하게 고중력 찜질로 아가리를 닥치게 만들어줬을 텐데. 그렇지. 자이안, 나 잠깐만 소환해봐라.」

‘그런 식으로 눈에 띄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삼촌.’

잠자코 보고 있기 힘든 것은 자이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탑의 고위 인사인 원로교수들이 이런 식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바라던 상황이었다.

“당신이 그 엉터리 논문을 가지고 공로를 인정받아 원로교수로 임명된 거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고! 당신 그거지! 장로한테 뇌물을 준 거잖아!”

“엉터리 논문?! 할 줄 아는 거라곤 약물을 깨작거리는 것뿐인 환각쟁이가 감히 그런 말을 해! 하! 제대로 된 식견도 없는 환각쟁이니까 내 논문의 가치도 알아보지 못하는 거지!”

“최근 당신네 연구실의 자금량과 미궁 자원의 흐름은 누가 봐도 이상하다 이겁니다. 당신네 연구실 소속 연수생들이나 모른 척하지, 지나다니는 아무 연수생이나 하나 붙잡고 물어봐도 다들 이상하다고 그런다 이거요. 당신, 자원을 횡령하고 있는 거 아니오?”

“허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남 모함하는 실력 하나는 원로, 아니, 장로급이군그래. 우리 연구실의 자금 상황과 자원의 흐름은 내가 매주 올리는 보고서에 한 치의 거짓도 없이 깨끗하게 기록되어 있네. 횡령? 자네는 보고서 읽을 줄도 모르나? 아참, 자네 장님이었지? 내가 깜빡했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흐음……. 이거 보다 보니 나름대로 재밌네요.」

노마법사들의 개싸움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크룩스가 눈을 빛내며 말을 꺼냈다.

「여기 있는 마법사들, 아무한테나 시비를 거는 게 아니라 파벌이 네 개로 나뉘어있는 모양이에요. 머릿수를 보면 각 파벌 간 힘의 균형은 비슷비슷해 보이고요. 아, 그러고 보니까 원로교수급 위에 장로급 마법사가 4명이라고 그랬던 거 같은데.」

「넌 저 난장판을 구경하면서 그걸 또 분석하고 있냐?」

「하하, 제 취미가 이런 건데 어쩌겠어요.」

「알아낸 건 그게 다예요? 당신 머리 좋잖아요.」

「분위기가 어수선해서 그런지 이거다 싶은 단서가 잘 안 나오네요. 아니지, 어쩌면 자이안을 의식하고 민감한 정보는 일부러 숨기는 것일 수도 있겠는데요?」

별 관심 없어 보이던 아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끼어들었다.

「으으응~? 지금 저 마법사들이 진짜 싸우는 게 아니라 연기를 하고 있다는 소리야?」

「연기를 하고 있다기보다는…… 이게 워낙 일상적인 광경이라서 싸우는 와중에도 외부 요소를 신경 쓸 여유가 있는 게 아닐까요?」

「얼마나 자주 싸워대는 거예요, 대체…….」

유민이 한심해하며 탄식했다. 반면 프레이는 흥미가 동한다는 듯 웃었다.

「저 나이 먹도록 인생을 아주 헛살지는 않았다 이거구만. 그래, 그 정도 머리는 돌아가야 우리도 상대하는 재미가 있지.」

‘이 사람들 직접 상대하는 건 전데요?’

「우리도 너한테 조언 많이 해주잖냐. 네가 도와달라면 언제든 도와줄 준비도 돼 있고.」

자이안은 황망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심함과 분노로 끓어오르고 있던 감정이 어느새 잠잠해졌음을 깨달았다. 각성자들과의 대화가 심신 안정에 도움을 준 것이다.

다시금 눈앞의 마법사들에게 시선을 항하며, 자이안은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억지로 다른 생각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유리아는 잘하고 있으려나.’

체류 중에 미궁의 마물 범람 사태가 터지면, 자이안은 일부러 힘을 과시해 마물들을 쓰러뜨리며 마법사들의 주목을 모은다. 반대로 감시가 허술해진 유리아는 방문자의 출입이 금지된 통제구역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탑 내부를 정탐한다.

소아레스가 떠난 뒤 둘이 머리를 모아 새로 세운 계획이었다.

지금 이 상황은 바로 유리아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 * *

주위에 사람의 시선이 없음을 확인하고, 유리아는 그림자에 녹아드는 듯한 움직임으로 열두 번째 통제구역을 벗어났다.

‘여기도 별거 없네.’

미궁의 마물 범람 사태를 기점으로 정찰을 시작한 지 꼬박 1일이 지났다. 그사이 식사와 수면 등의 생리현상은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최소한으로 끝마치고, 유리아는 일분일초도 아까워하며 탑을 샅샅이 수색하고 있었다.

아르스와 자이안, 프레이가 힘을 모아 만들어준 아티팩트 덕분에 마법적 탐지에 걸릴 걱정은 없었다. 오히려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게 더 중요했다.

그리고 그동안 꾸준히 소아레스에게 기술을 배운 유리아의 첩보 능력은 이제 달인의 영역에 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첩보활동과는 연이 없는 탑의 마법사들에게 발각당할 리가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어딘가에 마물을 연구하는 구역이 있을 텐데.’

곰곰이 생각하며 유리아는 지상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미궁은 탑의 지하에 있고, 마물은 미궁에서 나타난다.

마물을 연구하는 구역 역시 지하와 가까운 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낮은 층부터 수색했지만, 아직 이렇다 할 단서를 잡지 못했다.

‘2층도 허탕이었네. 설마 더 위에 있나? 그럴 것 같진 않은데. 아니면, 설마…….’

천장 통풍구의 좁은 틈에 몸을 숨긴 채 유리아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난번 탑을 안내했던 졸트 타기온이라는 마법사는 지하 1층에는 연구실 같은 건 없고 오직 미궁과 미궁으로 통하는 통로뿐이라고 설명했다.

‘바보 같긴. 여기서 마물을 가지고 위험한 연구를 하고 있는 게 사실이면, 그 말이 거짓말인 것도 당연한 거잖아?’

유리아가 보기에 졸트는, 코르니카에 살던 시절 만났던 데바인 상회의 상회장 같은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유리아는 자이안이 여러 번 칭찬한 자기 눈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눈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한 졸트를 저도 모르는 새 믿고 있었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거짓말을 안 하는 건 아니지.’

당연한 사실을 되새기며, 유리아는 통풍구에서 나와 마법사들의 시선을 교묘하게 피하며 1층을 지나 지하로 내려갔다.

미궁으로 통하는 복도를 두 명의 마법사가 지키고 있었다. 외모가 젊은 것을 보니 말단 마법사인 듯했다. 상대의 오감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집중시키고 그 사이에 사각으로 우회해 통과하고…… 뭐 그런 정공법을 쓸 수도 있었지만, 쉽게 갈 수 있으면 쉽게 가는 게 좋았다.

유리아는 아르스가 만들어준 일회용 아티팩트를 꺼내 손목과 발목에 감은 뒤 마치 개구리처럼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아르스 언니가 작정하고 도와주니까 엄청 편하다. 으으, 이러다 실력 녹슬면 어쩌지?’

실없는 걱정을 하며 천장을 타고 유유히 마법사들의 머리 위를 지나친 뒤, 유리아는 충분히 거리를 벌린 다음 다시 복도에 안전하게 착지했다.

이제 근처에 사람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대신 시야 일면을 가득 채우는 것이 있었다.

‘마물의 기운이 엄청나게 진하게 보여.’

보랏빛으로 일렁이는 마안이 미궁 안쪽에 얼마나 많은 마물들이 숨어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목표를 찾는 것도 쉬웠다.

미궁으로 향하는 통로의 어느 한 부분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마물의 기운이 보이지 않고 깨끗했다. 벽을 이리저리 살핀 유리아가 금방 결론을 냈다.

‘벽 뒤에 공간 있음!’

마법으로 숨겨져 있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벽 뒤의 공간은 기계장치로 숨겨져 있었다. 아마 마법으로 숨기면 다른 마법사들에게 쉽게 들키니까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다행이다. 소아레스 언니한테 배운 방식이야.’

바로 그 조심스러움이 반대로 이런 불화를 부르고 말았지만.

벽의 일부를 누르고, 솟아오르는 바닥을 옆으로 밀고, 뒤이어 드러난 숫자를 입력하는 계기판을 무시하고 그 아래쪽 벽면을 당기고.

그런 식으로 몇 가지 장치를 돌파하자 벽이 살짝 물러나더니 소리도 없이 좌우로 열렸다. 먼지 하나 일어나지 않는 걸 봐서는 최근에도 자주 벽 뒤의 공간이 이용된 듯했다.

벽 너머의 공간은 불빛 한 점 없이 어두웠다. 그러나 마안으로 강화된 유리아의 시각은 그 안에서도 어렵지 않게 내부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얼핏 보기엔 지금까지 거친 통제구역의 연구실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점이 벽면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거대한 유리관, 유리관을 가득 채운 미지의 용액, 그 안에 시체처럼 둥둥 떠 있는, 인간과 마물을 억지로 이어붙인 듯한 기괴한 형상의 마물들.

‘파르곤에서 본 그 마물과 똑같아!’

유리아는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으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 탓에, 얼핏 그림자처럼 보이는 시커먼 덩어리가 느릿느릿 바닥을 기어 밖으로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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