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보석탑의 사소한 사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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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보석탑의 사소한 사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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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보석탑의 사소한 사고 (3)
2022.11.29.
불온한 경보음이 시끄럽게 울렸다.
안내역을 맡은 정교수급 마법사 제렌과 함께 ‘마물생태학’ 강의를 듣던 자이안이 깜짝 놀라 주위를 돌아보았다.
고요한 강의실이 웅성거리는 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강단에 서서 지루한 목소리로 강의를 하던 정교수급 마법사는 낭패한 듯 인상을 쓰고 있었다.
“…하, 하하하. 이것 참. 어디 연구실에서 사고라도 낸 모양이군요.”
제렌이 짐짓 별것 아니라는 양 말했으나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탑에 들어온 지 몇 년 되지 않은 연수생들이 불안한 기색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강의는 중지다. 연수생들은 각자 대피 수칙을 준수하며 숙소로 돌아가도록.”
“방문자분께서도 숙소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섣불리 돌아다니면 사고에 휘말릴 수도 있습니다.”
제렌의 말에 자이안은 일단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속내는 반대였다. 고작해야 연구실에서 실험하다가 사고가 난 정도로 이런 소란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탑 전체에 경보를 울리고 연수생들을 대피시켜야 할 만큼 위급한 사태. 예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오래도 기다렸다. 드디어 타이밍이 왔구만.」
프레이의 말에 자이안은 아주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단순히 탑 내부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일행은 우선 미궁에서 마물이 넘칠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방침을 바꾼 상태였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그들이 기다리던 상황일 가능성이 높았다.
“방문자분,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런 사고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나고, 이번에는 운 나쁘게도 근처에서 사고가 벌어졌을 뿐이니까요.”
-마물의 수가 너무 많다! 이대로는 5분 이내로 초동방위선이 뚫린다!
제렌은 연신 별거 아니라는 듯 자이안을 설득했으나 정작 그의 통신기에서는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통신 마법의 내용은 본래는 당사자가 아니면 들을 수 없지만, 자이안은 며칠 전 프레이에게 배운 통신을 감청하는 마법으로 통신 내용을 훔쳐 듣고 있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방문자분께서는 사태가 마무리될 때까지 숙소에서 나오지 마시고 가만히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슬슬 여길 벗어나야겠구만. 준비해라, 자이안. 조금 기다렸다가…… 그래, 지금이다.」
왼손으로 허공에 마법의 발동을 돕는 문장을 그리며, 자이안이 마법을 사용했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 제렌과 자이안 말고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절묘한 상황. 잠깐 동안 오감을 둔하게 만드는 마법이 무방비한 제렌을 덮쳤다.
제렌의 눈빛이 흐리멍덩해졌고, 자이안은 그 틈에 그에게서 벗어나 갈라진 복도의 다른 방향으로 달렸다.
「잘했어! 처음 쓰는 간섭 마법치고는 훌륭했다.」
“실패할까 봐 조마조마했어요.”
「걱정 마라. 여기 마법사들은 MP를 사용하는 마법에는 저항하지 못해. 마족이면 모를까, 기껏해야 인간 마법사 상대로 겁먹을 필요 없다.」
복도를 달리는 자이안의 앞에 한 무리의 마법사가 나타났다. 깜짝 놀란 마법사들이 경계 자세를 취했으나 자이안은 바람처럼 그들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쳇. 얼굴이 알려지겠군.」
“이제 와선 상관없잖아요.”
「뭐, 그건 그렇지.」
지난 3일은 탑의 마법사들이 얼마나 위협이 될지 확인하는 데 든 시간이기도 했다. 최종적인 프레이의 판단은 ‘고블린만큼이나 위협적임’이었다.
굉장히 무례한 표현이었으나 자이안도 딱히 반론하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상대한 적들, 특히 교만이나 색욕 등 마족과 비교하면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미궁이 어디쯤 있는지는 알고 있냐?」
“정확히는 몰라요. 하지만 무작정 지하로 내려가다 보면 어차피 마물과 마주치게 될 거예요.”
미궁에서 넘치는 마물을 마법사들이 미처 처리하지 못 해 주면 마을이 피해를 입을 정도였다. 마물을 찾는 건 전혀 어렵지 않으리라.
「근데 탑에 살고 있는 마법사들은 연수생까지 포함하면 천 명은 되잖아요. 마법사가 그만큼이나 있는데 미궁에서 넘치는 마물들을 다 처리하지 못해서 밖으로 새어 나가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요?」
「그건…… 글쎄다. 직접 보지 않은 이상 뭐라 할 말이 없는데.」
“크룩스 님, 설마 탑이 일부러 마물들을 방치하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지만, 일부러 방치한다기보다는…… 흐음, 여기 마법사들의 성향을 생각하면 효율적인 일 처리를 위해 마물 일부를 밖으로 흘려보낸 뒤 나중에 처리한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인 것 같네요.」
차마 상상해본 적도 없는 가능성에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터뜨렸다. 바로 그 ‘효율적인 처리’를 위해서 바깥의 죄 없는 민간인들이 희생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전 여기 사람들을 용서하기 힘들 것 같아요.”
「단호하게 그냥 용서 못 한다고 말하지 그러냐.」
“아직,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고, 어쩌면 다른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어쩌면…….”
갈등하던 자이안의 두 눈에 단호한 결의가 어렸다.
“삼촌 말이 맞아요. 그게 사실이라면, 무슨 사정이 있든 간에 저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몇 번이나 마법사들을 지나치며 아래로 향했을까. 날카로워진 청각이 폭발음과 굉음, 그리고 마물의 포효 따위의 소리를 포착했다. 전신의 MP가 들끓고 안 그래도 빨랐던 자이안의 몸이 더욱 가속했다.
충격파를 일으키며, 복도와 계단을 아예 부수다시피 하며 자이안이 전장에 도착했다.
「오우야. 생각보다 많은데?」
「하지만 대다수가 하위 마물이에요. 보석탑이 이 정도도 못 막고 밀렸을 것 같지는 않네요.」
「그러게. 크룩스, 네 추측이 맞는 것 같다. 방위선을 펼친 마법사들의 수가 너무 적어. 게다가 늙은이들…… 원로교수급이랬나? 그 정도 수준의 마법사는 아예 있지도 않은 것 같군.」
“비켜요!”
다급함과 분노가 섞인 일갈이 마법사들의 귓전을 때렸다. 몇몇이 놀라며 뒤를 돌아본 순간 공중으로 뛰어오른 자이안이 몸을 뒤집어 복도의 천장에 발을 붙였다가, 다음 순간 포탄처럼 지상에 내리꽂혔다.
대검으로 변한 스펙트럼의 칼날이 최전방의 마물 세 마리의 몸을 가차 없이 사선으로 갈랐다.
“방문자?! 여긴 위험합니다! 얼른 숙소로 돌아……!”
자이안이 어깨에 걸친 견장을 알아본 마법사 한 명이 다급하게 소리쳤다가, 다음 순간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자이안이 펼친 공격이 순식간에 마물 한 무리를 문자 그대로 분쇄해버렸다.
마법보다도 더 마법 같은 광경이었다.
“거기 당신! 지금까지 몇 마리나 살려 보냈어요!”
“예, 예? 갑자기 무슨…….”
“몇 마리나 일부러 탑 밖으로 내보냈냐고!”
사나운 외침과 함께 마물의 무리 한복판으로 뛰어는 자이안이 재차 거칠게 대검을 휘둘렀다. 감정에 맡긴 그의 움직임은 지금까지처럼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파괴적이었다.
지적당한 마법사는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허튼소리를 했다가는 그대로 저 대검의 희생양이 될 것 같았다.
“당신들,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요! 이따 얘기할 게 있으니까!”
가차 없이 마물의 무리를 베어 넘기며 자이안은 차츰 안쪽으로 향했다. 프레이나 크룩스의 말대로 마물은 숫자만 좀 많을 뿐 대부분 별것 아닌 하위 마물뿐이었다.
가끔 보이는 강한 마물도 오크나 홉고블린, 놀 치프틴 정도였다.
「놀 치프틴은 그래도 나름 중위 2급은 되는 놈인데……. 저런, 흔적도 없이 하반신이 날아가 버렸네. 불쌍해라.」
「지금 농담이나 할 때예요? 아무리 그래도 수가 너무 많잖아요! 저러다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왜? 어차피 우린 여기서 구경하는 거 말곤 할 것도 없는데. 그리고 저 정도 마물로는 쟤한테 생채기 하나 못 낸다. 쟤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수라장을 거쳐 왔는데. 그러니까 최유민 너도 괜한 걱정 말고 팝콘이나 먹어.」
「……그건 또 어디서 가져온 거예요?」
「내가 직접 마법으로 튀긴 거다. 아르스도 아주 호평하더라고.」
안쪽으로 나아갈수록 복도의 모습이 조금씩 변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인공적인 복도가, 어느 순간부터 천연동굴을 지나다니기 불편하지 않게 깎아놓은 모습이 된 것이다. 본격적으로 미궁에 진입했다는 증거였다.
「마물 한번 더럽게 많군. 이게 다 미궁에서 나오는 거라 이거지? 여기 박혀있으면 MP 모자랄 걱정은 없겠다.」
그러나 끝이 없을 것 같던 마물의 범람도 시간이 지나자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헤일로를 일으키며 무아지경으로 마물들을 쓰러뜨리던 자이안의 감정이 누그러진 것도 그즈음이었다.
“아까 그분들한테 좀 미안해지네요. 그분들도 목숨을 바쳐 싸우고 있었을 텐데.”
마지막 남은 마물을 쓰러뜨리며 자이안이 꺼낸 말에 프레이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유민도 이건 좀 공감하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의외로 크룩스가 그 말에 동조하는 의견을 보냈다.
「그 마법사들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명령대로 움직였을 지도 몰라요. 나라든 회사든, 보통 사람이 모여 만들어진 조직에 문제가 생기면 말단보단 윗선이 원흉이 경우가 많죠.」
그의 말은 누구를 적대해야 할지 확실하게 정해야 한다는 조언이기도 했다. 자이안은 그 말뜻을 새겨들으며 아까 전 마법사들이 방위선을 펼치고 있던 장소로 되돌아갔다.
“책임자를 불러오세요.”
“네, 네?”
“미궁에서 넘치는 마물들은 전부 처리했어요. 한 마리도 빠짐없이 모두, 저 혼자서. 제가 비록 방문객의 입장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책임자와 만날 자격은 되는 것 같은데, 안 그런가요?”
“그거는, 그…… 뭐…… 맞는 말씀이십니다, 예.”
“그러니까 당장 책임자를 데려와요. 만약 못 하겠다면…….”
「좋아, 자이안. 여기서는 어설프게 험악한 표정을 짓지 말고 아예 웃는 거다. 그게 네 성격에도 잘 어울리고, 상대도 오히려 더 겁먹을 거다.」
“제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셨죠?”
방금 전까지 마물을 도살하던 대검을 한 손으로 든 채 환하게 웃는 자이안을 보며, 마법사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기 시작했다.
* * *
말도 없이 맨몸으로 달렸음에도 법왕국까지는 채 3일도 걸리지 않았다. 근위부의 수장을 맡을 정도인 만큼 본래도 체력에는 자신이 있는 편이었으나, 자이안과 여행을 시작한 뒤로는 특히 몸 상태가 좋았다.
‘어쩌면 나도 유리아 님과 같은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일지도.’
본래 일반인이었던 유리아는 자이안과 동행하며 그와 함께 마물을 죽이고 각성자가 되었다고 했다.
자이안과 함께 여행하고 있고, 마물은 아니지만 마인을 직접 죽였으며, 유리아가 훈련 때마다 마시는 자이안 수제 MP 증강제도 딱 한 번이지만 마셔본 적이 있었다.
미각이라는 개념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그 모독적인 액체는 그 이후 두 번 다시 손대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지금부터라도 MP 증강제를 꾸준히 마셔야 하나? 아니야. 그런 걸 계속 먹었다간 미각이 파괴돼 요리에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매번 질리지도 않고 유리아와 자이안이 칭찬을 한 덕분에 소아레스는 나름대로 자기 요리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요리냐, 각성이냐. 답이 나오지 않는 갈등을 뒤로하고 그녀는 법왕국에 침투해 본격적으로 첩보 활동을 시작했다.
장기 체류를 염두에 두고 시작한 활동이었지만, 의외로 하루도 지나지 않아 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소아레스가 느낀 감정은 성취감이 아니라 곤혹과 불길함뿐이었다.
“전부 죽여라! 한 사람도 살려둬서는 안 된다! 마법사들의 소행으로 보이도록 건물을 모두 파괴하고 불태우는 것도 잊지 마라!”
‘신성기사단이 민간인 마을을 습격하고 있어……?’
소아레스는 저도 모르게 눈을 비비며 현실을 의심했지만, 눈앞의 광경은 변하지 않았다.
도적인 척 위장했지만, 신성기사단의 문장이 새겨진 검을 들고는 법왕국 변경의 마을을 습격하고, 주민들을 죽이고, 불태우고 있었다.
법왕국의 상황은 예상한 것보다도 훨씬 더 난장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