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보석탑의 사소한 사고 (2) (56/210)


56화 보석탑의 사소한 사고 (2)
2022.11.28.


프레이는 생각했다. 어째서 자이안의 세계에서는 마법과 신성술, 즉 흑마법과 백마법을 동시에 쓸 수 없을까?

“대충 알겠군. 여기 사람들이 말하는 마력과 신성력이라는 건, 지구 기준으로 보면 독성을 제거한 대신 성능이 열화된 MP다.”

자이안 일행이 나가고 홀로 남은 객실. 보석탑에 머문 지 약 30분 만에 프레이는 결론을 냈다.

「MP가 그냥 물을 좀 타서 희석시킨 독극물이라면, 마력이나 신성력은 아예 화학적으로 독성을 제거한 대신 그만큼 효능이 떨어졌다……. 대충 그런 식이네요?」

“별로 좋은 비유는 아니지만, 얼추 맞는 말이긴 하다. 아무튼 덕분에 여기 사람들은 따로 각성하지 않아도 마법이나 신성술을 쓸 수 있는 거다. 두 힘이 강하게 반발하는 부작용도 생겼고, 성능이 떨어진 만큼 재능도 크게 가리기도 하지만 말이야.”

이 사실을 빠르게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은 보석탑이라는 구조물이 지닌 특수성 때문이기도 했다. 이 거대한 구조물은 강력한 마력 증폭기이기도 해서, 증폭된 마력의 흐름을 마안을 통해 읽고 분석하기 수월했다.

「사실 각성이란 것도 재능을 꽤나 가리는데 말이지. 그것보다도 더 심한 건 좀 싫다아.」

「누가 들으면 지구 최강급 재능충이 기만한다고 욕하겠는데요. 하하하.」

각성자가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 재능도 재능이지만, 그보다는 많은 전장을 거치며 마물들을 쓰러뜨리고 오래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다.

같은 경험을 거친 사람끼리 비교하면 물론 재능에 따른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겠지만, 적어도 처음부터 천장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자이안의 세계의 마법과 신성술은 지구의 각성자들과는 사정이 달랐다. 재능이 없으면 아예 배울 수가 없고, 어찌어찌 입문하더라도 재능에 따라 처음부터 천장이 정해져 있다.

바로 그런 사실 탓에 법왕국과 보석탑, 두 나라에는 은연중에 선민의식이 만연해 있다.

“흥미롭구만. 이런 현상이 우연히 일어났을 리가 없어. 원인이 되는 무언가…… MP 정제? 정수? 정화? 그래, MP 정화기로서 작용하는 무언가가 어딘가에 있을 거다. 그게 생물이든, 다른 무언가든.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든, 작위적인 것이든.”

고개를 든 프레이의 시선이 북쪽으로 향했다.

보석탑보다 더 북쪽에 있는 것. 자이안의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인 세계수의 숲이었다.

* * *

첫날의 목적은 가벼운 탐색이었다. 각자 흩어져 조심스럽게 정보를 모으면서도 곧바로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고, 실제로도 큰 소득 없이 밤이 깊었다.

‘법왕국과 보석탑 사이의 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격화되고 있음. 당장 전면전으로 번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늦은 밤. 소아레스는 손에 든 편지의 내용을 곱씹으며 희미하게 인상을 썼다.

‘마지막으로 편지가 닿은 것이 6일 전. 3일마다 정기 연락이 와야 하지만 그 이후로 오지 않고 있어.’

편지의 발신인은 법왕국에 잠입해 있는 그녀의 자매 중 한 명이었다. 실제로 피가 이어진 가족이 아니라, 근위부의 일원이며 법왕국의 첩보를 맡고 있는 그녀의 부하 중 한 명이었다.

‘분위기를 봐서는 아직 전쟁이 일어난 것 같지는 않아. 이 아이가 전쟁 속에서 자기 몸 하나 못 지킬 정도로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야.’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르려 할수록 반대로 불안은 더욱 깊어졌다. 저도 모르는 사이 소아레스는 자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연락이 끊긴 부하도 걱정이었고, 전쟁이 발발했을 경우 자이안 일행에게 미칠 악영향도 걱정이었다.

‘직접 가서 내 눈으로 확인하는 게 가장 정확해.’

오랜 시간 고민했지만, 사실 결론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마침내 그 사실을 받아들인 소아레스는 가벼운 수면을 취하고 날이 밝자마자 자이안을 찾아갔다.

“혼자서 법왕국에 정찰을요?”

소아레스의 조심스러운 요청에 자이안은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소아레스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가볍게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내용임을 깨달았다.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싫다는 게 아니라, 정세가 불안정한 법왕국에 가려는 소아레스가 걱정돼서 그래요.”

짧은 순간 소아레스는 어디까지 얘기해야 할지 고민했고, 곧 그런 고민 자체가 새로 모시게 된 주인에 대한 모욕임을 깨달았다. 자이안이라면, 이 선량한 소년이라면 분명 자신의 걱정을 이해해주리라.

“자매…… 부하 중 한 명이 연락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정을 설명하자 자이안의 표정에 그늘이 졌다. 소아레스는 문득 그가 이다음에 하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모두 다 같이 법왕국으로…….”

「거기까지다, 자이안.」

프레이가 재빠르게 자이안의 말을 가로막았다. 말이 끊긴 자이안이 어린애처럼 불만스러운 표정을 했다.

「애처럼 굴지 말고……. 아, 이 녀석 애지. 아무튼, 소아레스의 마음도 이해해줘라.」

「그렇지, 그렇지이. 자이안이 저 아이를 걱정하는 것처럼, 저 아이도 자이안을 걱정하고 있는 거란다?」

「자이안, 목적을 잃어서는 안 돼요. 자이안의 목적은 탑에서 벌어지는 마물을 이용한 비인도적인 연구를 막는 거잖아요?」

「어…… 어? 나, 나도 뭔가 한 마디 해야 돼? 이거 그런 분위기야……? 으음, 으으으음…… 자, 자이안 걱정하지 마! 혹시 불안하면 프레이 아저씨나 아르스 언니한테 대충 떠맡기면 어떻게든 될 거야!」

유민이 고민 끝에 아무렇게나 던진 조언에 자이안의 머릿속이 번뜩였다. 펜던트를 쥔 자이안이 곧바로 각성자 중 한 명을 소환했다.

“데우스 마키나.”

그렇다. 직접 가지 못하면 아티팩트라도 잔뜩 들려주면 되는 것이다.

“지금 재료로 쓸 만한 게 없는데?”

“아르스 님, 간단한 아티팩트는 재료가 없어도 MP를 소모해 만들 수 있죠? 지금 일시적으로 아바타의 제한을 해제할게요.”

자이안이 펜던트를 쥔 채 눈을 감고 잠시 뒤, 아르스는 전신을 칭칭 묶고 있던 쇠사슬이 벗겨지는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표정은 걱정으로 가득했다.

“자이안, 괜찮겠어?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저는 괜찮아요. 아직 버틸 만하니까, 그러니까 빨리 작업에 들어가 주세요.”

자이안의 목소리에서 확고한 의지를 느낀 아르스는 더 이상 반론하지 않았다. 다만 조금이라도 그의 부담을 덜기 위해 빠르게 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저희하고 연락할 수 있는 통신용 아티팩트. 그리고 탈출용 아티팩트를 여러 개. 아, 혹시 모르니까 세뇌 같은 정신간섭을 막을 수 있는 아티팩트도 몇 개 있는 게 좋겠어요. 부상을 회복할 수 있는 아티팩트도 필요하겠죠.”

“자, 잠깐 자이안? 생각보다 주문이 많은데에?”

“아르스 님, 할 수 있으시죠?”

“그거야 할 수는 있지만?! 자이안이 공순이를 사정없이 부려 먹는 의뢰주처럼 굴고 있어! 으앙!”

20분가량 이어진 작업을 모두 마쳤을 때는 자이안과 아르스 모두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나마 아르스는 오랜만에 바쁜 작업을 하다 보니 정신적으로 조금 지쳤을 뿐이지만, MP를 극단적으로 소모한 자이안은 금방이라도 졸도할 듯 창백한 안색이었다.

유리아가 허둥지둥 그를 부축해 침대에 눕혔다.

“어휴, 이 바보. 또 무리하면 어떡해.”

“이 정도는 괜찮아요. 잠깐 쉬면 금방 괜찮아져요.”

“그럼 다행이지만…….”

“걱정 마세요. 전 유리아 상대로는 거짓말 안 해요. 아, 소아레스한테도.”

“……지금 그 말이 제일 거짓말 같은데?”

정곡을 찔린 자이안이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 그는 소아레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말리지 않을게요, 소아레스. 대신 이거 하나는 꼭 기억해 주세요. 무엇보다 자기 목숨을 우선하고, 반드시 무사히 돌아와 주세요.”

소아레스는 입을 꾹 다문 채 깊게 인사했다. 그 모습에 자이안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오직 황족과 왕족에게만 취하는 예를 취한 뒤, 소아레스가 방을 떠났다.

* * *

자이안 일행이 탑에 체류한 지 3일이 지났다.

‘생각보다 쉽게 낌새를 드러내지 않는군.’

자신의 연구실에서, 통신기를 통해 전송된 영상들을 재차 확인하며 원로교수급 마법사 졸트 타기온은 작게 혀를 찼다.

‘어쩌면…… 저쪽에서 이미 눈치를 채고 있는 건가? 어떻게? 그래, 저 소년이 마법과 신성술을 같이 쓰는 걸 제렌 그놈이 봤다 그랬지. 그때 저 소년도 제렌을 알아차린 게 아닌가? 이 멍청한 제자 놈이 또 실수를 저질렀군!’

제렌은 처음부터 저 소년을 강제로 붙잡아 실험체로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자가 폭주할 것을 우려해 그 의견도 일리가 있다고 대답해주기는 했지만, 사실 졸트는 그건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마법과 신성술을 동시에 쓸 수 있는 유일무이한 인재다. 대륙 전체를 샅샅이 뒤져도 아마 저 소년이 유일할 터. 그걸 실험체로 허비해? 멍청한 놈 같으니! 선민사상에 눈이 멀어 가축과 인간의 구분조차도 못 하는 건가!’

제렌은 자신과 스승이 같은 사상을 가졌다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크게 달랐다. 마법의 발전을 통한 인간의 고등화, 그리고 종족적인 진화.

여기까지는 같았지만, 제렌은 오직 마법사만을 인간으로 정의하는 반면 졸트는 마법을 쓰지 못하는 일반인들도 진화의 계단을 밟을 자격이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제렌은 인간을 실험체로 쓸 때도 아무 거리낌이 없는 반면 졸트는 이를 인류 전체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생각하며 짊어졌다. 정작 제삼자의 눈에는 둘 다 거기서 거기라는 자각은 둘 모두에게 없었다.

‘솔직하게 사정을 얘기하고 협력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는 불확실한 요소가 너무 많아. 협력을 구하든 몰래 이용하든, 우선 저 소년을 탑에 계속 붙잡아두는 것이 우선이야. 세뇌…… 최면…… 암시……. 그래. 단계적으로 암시를 걸어야겠어. 탑에서의 생활이 아늑하게 느껴지고, 탑을 떠나는 것이 두려워지도록 암시를 걸고 나면 그 뒤는 편해질 거다. 하지만 그러려면…….’

그의 전공은 어디까지나 육체의 변이와 재구성이었다. 정신간섭 마법에 대해서는 교양 수준의 지식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간단한 암시나 인식 저해 정도는 쓸 수 있지만, 마법과 신성술을 함께 다루며 미지의 힘을 가진 존재에게도 통할 거라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다른 원로들의 조력이 불가피했다.

‘솔직히 말하면, 저 소년의 힘을 독점하고 싶지만……. 지금은 합리적인 판단을 내려야 할 때로군.’

한숨을 삼킨 그가 원로 교수들 간의 전용 통신기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책상 한쪽에 놓여있던 공용 통신기가 불길한 붉은빛을 내며 떨리기 시작했다.

뜻밖의 사태에 졸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긴급 사태! 긴급 사태!

졸트가 허가하지도 않았는데 통신이 멋대로 연결되고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위기 상황에서만 켤 수 있는 긴급 통신 기능이었다.

그리고 현재 탑에서 긴급 통신 기능을 켜야만 하는 사태는 단 하나였다.

-지하 미궁에서 마물 범람 발생! 당일 요격 담당자는 시급히 요격을 준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빌어먹을! 하필 이런 시기에!”

졸트는 참지 못하고 책상을 거세게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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