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보석탑의 사소한 사고 (1) (55/210)


55화 보석탑의 사소한 사고 (1)
2022.11.27.


넓은 로비에 많은 마법사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연구에 쓸 자료나 완성된 논문을 들고, 어떤 이는 통신 마법으로 얼굴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하며, 또 어떤 이는 주위의 상황도 개의치 않고 거친 논쟁을 벌이며.

그 가운데 갑자기 탑에 들어온 이방인을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저 일행이군.’

원로교수급 마법사 졸트 타기온만이 유일한 예외였다.

‘제렌이 보낸 인상착의와 똑같다. 그럼 어디 한번…….’

끼고 있는 모노클의 테가 마력을 공급받아 희미한 빛을 발했다. 대상이 마법사인지, 사제인지, 아무것도 아닌 일반인인지 시각화해 보여주는 마도구였다. 그리고 모노클의 렌즈에 비친 결과는…….

‘마법사도, 사제도 아니다. 일반인이야.’

뜻밖의 결과였으나 졸트는 놀라지도, 그렇다고 실망하지도 않았다. 그는 제자인 제렌을 그다지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없는 사실을 착각하고 보고할 정도로 멍청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저 소년이 마법과 신성술을 동시에 썼다고 제렌이 보고한 이상, 그 자체는 분명 사실일 것이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결과였다. 마력과 신성력은 강하게 반발한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마법과 신성술을 동시에 쓰기 위해서는?

‘마력도 신성력도 아닌 미지의 힘을 가지고 있을 터!’

뒤늦게 환희가 찾아왔다. 만약 그 가설이 사실이라면, 그리하여 그 힘의 정체를 분석하고 이용할 수 있게 된다면 인간은, 마법은 지금까지와 비교도 되지 않는 무궁무진한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섣부르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목표가 눈앞에 보인다고 급하게 달리는 건 멍청이들이나 하는 행동이지. 면밀히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야 해.’

졸트의 얼굴에 냉혹한 결의가 아주 잠깐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 차례 눈을 감았다 뜬 뒤, 그는 조금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인자한 미소를 그리며 자이안 일행에게 다가갔다.

“방문자이신 모양이군요. 안내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 * *

「아까부터 우릴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역시 이렇게 되는구만.」

프레이의 이죽거리는 목소리에는 반응하지 않고, 자이안은 귀족의 예법으로 갑자기 다가온 늙은 마법사의 인사에 화답했다. 예법을 알아본 노인의 눈에 짧은 순간 이채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으응? 잠깐, 이 영감탱이…… 저번에 마을에서 널 뚫어져라 보던 마법사랑 마력 패턴이 비슷한데. 가족이라도 되나? 아니…… 사제 관계? 흐음, 대충 그림이 보일 것도 같은데.」

‘마력 패턴? 그런 것도 알 수 있어요?’

「당연하지, 그럼 마안을 가지고 그런 것도 못 볼까 봐?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제 삼촌이요.’

「그래 이 자식아, 네 삼촌이고 나이아의 오빠고 지구 최강의 마법사가 바로 이 몸이시다.」

마을에서 자이안을 발견한 마법사가 모종의 이유로 그에게 관심을 가졌고, 이 사실이 스승에게 전해졌으며, 스승 역시 같은 이유로 자이안에게 관심을 가져 다가왔다. 프레이의 머릿속에 어렵지 않게 상황이 그러졌다.

「근데 저것들이 왜 갑자기 자이안 너한테 관심을 가지냐? 네 호구 짓이 그렇게 인상이 깊었나?」

‘아마 제가 마법과 신성술을 같이 쓰는 걸 본 게 아닐까요?’

「응? 그게 왜?」

잠자코 있던 유민이 끼어들었다. 자이안은 오랜 기억을 들추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저도 이론을 정확히 아는 건 아닌데…… 어릴 때 왕궁 연회에 참석했을 때 들은 적이 있어요. 한 사람이 마법과 신성술을 동시에 사용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뭐 인마?」

프레이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야 이, 너, 이 등신, 진짜…… 그 중요한 걸 왜 이제야 말해!」

‘별로 안 중요한 일이잖아요.’

「그게 왜 안 중요해?! 괜히 눈에 띄어서 쓸데없이 파리들이 꼬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리고 지금이 바로 정확히 그런 상황이었다.

‘하지만 삼촌. 제가 어제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마법이나 신성술 중 하나를 숨겼더라면 거기 있던 사람들을 반도 구하지 못했을 거예요.’

정곡을 찌르는 반론에 프레이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결국 그 역시 자이안의 내심을 이해했다.

힘이 모자라서, 도저히 상황이 따라주지 않아서 구하지 못하는 사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그건 냉정하게 포기할 수 있다.

그러나 눈앞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고, 자신에게 그를 구할 힘이 있는데도 자기 안위를 위해 시선을 돌리는 일은 제아무리 프레이라도 할 수 없었다.

‘삼촌, 제가 강해지고자 했던 건 바로 이런 일 때문이었어요. 삼촌도 아시고 말씀하셨던 거잖아요?’

그 말이 맞았다. 여행 초기, 나이아와 놀라우리만치 닮은 자이안에게 힘을 기르라고 조언한 것은 바로 이런 때에 언제든 자기 주관대로 행동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이런 젠장. 그래, 알겠다. 알겠는데…….」

다만 하나 아쉬운 점은.

「나하고 상담이라도 좀 하면 어디 덧나냐?」

그 모든 판단을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자이안 혼자서 내렸다는 사실이리라.

「세상에, 아저씨 토라진 거예요? 진짜 덩치만 큰 어린애네.」

「시끄럽다, 최유민. 토라진 게 아니라, 이건, 그냥…… 하아. 너 좋을 대로 생각하든가.」

「헐…… 진짜 상처받았나 봐.」

슬금슬금 멀어진 유민이 아르스와 붙어서 뭐라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프레이는 인상을 쓴 채 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척 자이안을 노려볼 뿐이었다.

‘죄송해요, 삼촌.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있을 때 미리 상담할게요.’

결국 자이안이 사과의 말을 꺼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프레이는 이내 한숨을 토하며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됐다. 사과는 무슨.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네 말이 맞다. 충분한 힘을 가지면, 주변에 날파리가 얼마나 꼬이든 무시하고 자기 주관을 관철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다.」

「그렇다고 방심해도 된다는 건 아니지만요. 큰 힘을 가질수록 자기 발밑을 보기 어려워지기 마련이잖아요? 자칫하면 어이없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죠.」

「나도 안다, 크룩스. 자이안이 그런 성격이 아닌 것도 알고 있고. 거기다, 수틀리면 우리가 개입하면 그만이지 않냐.」

「하하하. 그건 또 너무 극단적인 생각인 것 같은데요.」

「극단적이라니?」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 건 최후의 수단 정도로만 염두에 두는 게 좋다는 뜻이죠.」

각성자들의 대화를 경청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이안의 의식 일부는 탑을 안내하는 노마법사 졸트 타기온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마법사는 아직까지는 온화하고 친절한 언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 당장 본색을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일을 벌인다면 이쪽이 가장 마음을 놓고 있는 때를 노릴 터.

“이쪽이 방문자 전용 숙소 구역입니다. 기본적으로는 구역 내에서 생활하시되, 구역 밖으로 나오고 싶으실 때는 반드시 제게 통신기로 연락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금 전에 드린, 방문자임을 증명하는 견장을 착용하는 것도 결코 잊으시면 안 됩니다. 탑에는 수없이 많은 마법의 비술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신분이 증명되지 않으면…… 다소 험한 일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탑의 구조와 방문자의 행동 방침 등을 간단히 설명한 그가 마지막으로 일행을 안내한 곳은 숙소였다.

“좀 더 이곳저곳을 안내해드리고 싶습니다만…… 저 역시 맡고 있는 연구 탓에 시간을 내기 어렵군요. 더 안내해드리지 못해 미안할 따름입니다. 필요하시다면 제 제자 녀석을 안내역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거절해라, 자이안. 오랜 여행 때문에 피곤하니 어쩌니 하면서 대충 얼버무려.」

프레이의 조언대로 자이안이 거절하자 졸트는 의외로 깔끔하게 물러났다. 각자 배정된 방에 짐을 푼 뒤, 일행은 주변의 시선에 주의하며 다시 자이안의 방에 모였다.

현재 상황을 확인하고 앞으로의 행동 방침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감시의 눈은 없습니다만…… 만약 상대가 마법으로 저희를 감시하고 있다면 저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자이안의 방으로 오는 동안 주위를 살핀 유리아와 소아레스가 함께 내린 결론이었다. 자이안 역시 노회한 마법사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상대가 은밀히 사용하는 감시 마법을 꿰뚫어 볼 자신은 없었다.

그렇다고 아예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 누구보다도 적합한 인재가 있었으니까.

“아포칼립스.”

소환의 빛이 넓은 객실을 가득 채우고, 아바타가 소환된 프레이는 곧장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방 한쪽에 놓인 짐으로 향했다.

“자이안, 아까 그 영감한테 받은 통신기 좀 가져와 봐라.”

자이안이 그의 말에 얌전히 따랐다. 표면에 복잡한 기호가 빼곡히 채워진 십육면체 형상의 통신기를 잠시 노려보던 프레이가 곧 코웃음을 쳤다.

“도청 마법이 걸려있다. 통신기 주변의 모든 음성과 영상을 기록해 암호화한 뒤 1시간 주기로 반대쪽 통신기에 전송하는 구조로군.”

재빠르게 설명을 마친 프레이가 검지를 세워 통신기에 가져다 댔다. 자이안은 프레이가 MP를 일으켜 무언가 마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까지는 알았으나,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자이안이 이해하기엔 너무나 복잡하고 정교한 MP 운용이었다.

“도청 기능 자체를 없애 버리면 저쪽에서 의심스럽게 생각할 테고…… 좋아, 이렇게 하면 되겠군.”

금세 통신기의 개조를 마친 프레이가 다시 자이안에게 통신기를 내밀었다. 자이안은 통신기를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폈으나 뭐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도청 마법이 걸려있다는 사실도 프레이가 말하기 전까지는 몰랐으니.

“도청 마법의 구조를 살짝 건드렸다. 암호화한 내용을 복원하는 순간 내용이 변질되어, 오늘 아침 밥 맛있더라, 그 옷 어울리는데 어디서 샀냐, 이따가 운동이나 좀 하러 가자, 뭐 이런 무의미하고 일상적인 내용의 음성과 영상으로 바뀌는 식이지.”

“……그게 살짝 건드린 거예요?”

“그럼 살짝 건드린 거지. 왜, 힘들었다고 생색이라도 내줄까? 아이고오오! 힘들어 죽겠다아아! 조카가 삼촌 막 부려먹는다아아!”

그런 뜻이 아니었다. 어떤 구조인지 상상할 수도 없는 복잡한 마법을 순식간에 사용하고는 ‘살짝 건드렸다’라고 가볍게 표현하는 프레이의 경지에 저도 모르게 압도된 것이다.

“하는 김에 방 주변에 방음 결계도 걸어 놨다. 마음 같아서는 인식 저해도 걸고 싶은데, 이건 잘못하면 누가 위화감을 눈치채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 너희들도 와서 앉아라. 회의를 시작하자고.”

방 중앙 4인용 테이블의 한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으며 프레이가 일행들을 불렀다. 자이안이 남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삼촌 계속 여기 계시게요?”

“네가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그럴 생각이다만. 왜, 불편하냐?”

“하하, 그럴 리가요. 삼촌이 계시면 든든하죠.”

이어 소아레스와 유리아도 자리에 앉았다. 네 명은 보석탑에서의 행동을 위한 본격적인 회의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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