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불온한 징조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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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불온한 징조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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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불온한 징조들 (4)
2022.11.26.
멀리 떨어진 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보석탑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마부석에 앉은 자이안은 속도를 늦추며 일행들에게 상황을 전했다.
“지도상으로는 다음 마을에 들른 뒤 반나절 정도 더 가면 보석탑인데…….”
“저 연기가 바로 그 마을에서 나는 것일 수도 있겠군요.”
소아레스와 유리아가 분석을 마치자, 자이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을에 무슨 사고라도 일어난 걸까요?”
「미궁에서 넘친 마물의 짓일 가능성도 있지.」
프레이의 추측에 자이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유리아가 허둥지둥하며 자이안을 위로했다.
“아,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잖아? 무슨 축제 같은 걸 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애써 건넨 위로도 무색하게, 검은 연기를 향해 나아가는 길목마다 참상이 이어졌다.
태풍이라도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여기저기 파헤쳐진 땅, 부서진 채 아무렇게나 방치된 무기들, 오래되어 말라붙은 핏자국 등. 마치 전쟁터를 보는 듯했다.
「무기들이 굉장히 질이 낮네요. 저쪽 세계의 문명 수준을 감안해도, 제대로 훈련받고 봉급을 받는 군대가 쓸 만한 수준은 절대 아니에요.」
「즉, 제대로 훈련도 안 받은 민간인과 마물 사이에 전투가 있었단 뜻이구만.」
「지금 한가하게 분석이나 할 때예요? 그럴 여유가 있으면 생존자가 있는지 찾아봐야죠! 아, 이건 자이안한테 한 말 아니에요! 여기 나잇값 못하는 어른들한테 한 말이지.」
「생존자는 없을 거다. 애초에 전투가 일어난 지 시간도 꽤 지난 것 같은데.」
‘삼촌 말씀이 맞아요. 하지만 혹시 모르니 마을로 가봐야겠어요.’
참상을 추모하듯 멈춰 있던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을까지는 그다지 거리가 멀지 않았다. 아마도 북쪽, 보석탑 방향에서 몰려온 마물들을 상대로 남쪽으로 도망치다가 결국 전투가 벌어진 것 같았다.
마을 역시 조금 전 지나친 전장에 비해 상황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인 점이라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은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부산스럽게 마을 재건 작업을 펼치는 생존자들을 보고 속으로 안도하며, 자이안은 조심스럽게 터만 남은 마을 입구에 마차를 접근시켰다.
“여행자들인가? 미안하네만 마을 상황이 보는 대로네. 멋대로 머물다가는 거야 상관없네만, 혹시라도 문제를 일으킨다면 좋은 꼴은 보기 힘들 걸세.”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태풍이라도 지나갔나요?”
“그건…… 그게…… 그런 걸 자네들이 알아서 뭐 하러 그러나?”
짐짓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유리아의 질문에 마을의 지도자인 듯 보이는 남자는 곤혹스러워하며 대답을 피했다. 일행은 추측을 확인하기 위해 한 차례 시선을 맞추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촌장! 마법사님께서 찾아왔소!”
“뭐?! 그, 금방 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전해주시게!”
멀리서 들린 목소리에 촌장의 표정이 눈에 띄게 초조해졌다. 그가 자이안 일행을 홱 돌아보고는 험한 목소리로 재차 당부했다.
“아무튼, 내가 한 말 잊지들 마시게! 머물다 갈 거면 소란 피우지 말고 얌전히 지내라고!”
“잠깐만요. 일손이 필요하시면 도와드릴게요.”
“필요 없네! 외지인이 멋대로 끼어들지 말게!”
자이안의 호의를 매정하게 뿌리친 촌장이 급하게 마을 안쪽으로 뛰어갔다. 충격을 받은 자이안은 잠시 그 자리에 굳어 있었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결연한 표정으로 일행을 돌아보았다.
“쫓아가죠. 말은 저렇게 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분들이 분명 있을 거예요.”
「너 또 호구 짓 하면서 여기서 시간 낭비할 셈이냐?」
“힘든 사람들을 도와주는 건 시간 낭비가 아니에요, 삼촌.”
「맞아요! 아저씨는 어떻게 그런 매정한 소리를 할 수 있어요? 자이안 좀 본받으세요!」
대뜸 끼어든 유민의 잔소리에 프레이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모인 넷 중 가장 나이아와 성향이 비슷한 게 바로 유민이었다.
자이안과 둘이서 여행할 때도 고집을 꺾기가 쉽지 않았는데, 아르스와 크룩스는 어지간해선 중립을 지킬 테고 유민은 적극적으로 자이안을 편 들 테니 고생길이 훤히 보였다.
「전 솔직히 말하면 프레이 형 입장에 찬성이긴 한데요.」
고립무원에 처한 프레이에게 구조선을 보낸 이는 크룩스였다.
「크룩스?! 어, 어떻게 그런……!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에요?!」
「하하. 사람 같지 않은 완벽한 육체라는 칭찬은 자주 들어요.」
배신감에 사무친 유민이 그를 매도했으나, 당사자는 태평하게 웃어넘길 뿐이었다.
「눈앞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지나치지 않고 돕는 건 당연히 선한 일이고, 옳은 일이죠. 하지만 자이안, 때로는 시야를 조금 더 넓게, 멀리 볼 필요가 있어요. 아마 자이안이라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은데. 그렇지 않나요?」
그 자리에 서서 고민하던 자이안이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했다. 지금 당장 눈앞의 사람들을 구할 수도 있지만, 미궁에서의 사건을 해결해서도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냉정하게 계산하면 후자가 더 많은 사람을 구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까, 시간제한을 두도록 해요.」
이어진 크룩스의 제안은 자이안의 예상과는 달랐다.
「딱 하루, 내일 아침까지만 여기 머무르면서 사람들을 도와주고, 아침이 지나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 보석탑으로 향하는 거예요. 자기 마음과, 지금 상황과 타협을 보는 거죠.」
또한 이는 자이안과 프레이 사이의 타협이기도 했다. 자이안은 괴로움을 삼키며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선 모든 사람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나 자이안의 두 손은 모두를 돕기엔 아직도 너무 작았다.
「……그래, 뭐. 그렇게 결정했으면 빨리빨리 움직이자고. 일분일초라도 아껴야 할 거 아니냐.」
내심 자이안의 속마음을 이해하고 있는 프레이가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정신을 차린 자이안은 일행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마을을 분주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 * *
정교수급 마법사 제렌이 그들의 존재를 눈치챈 것은 막 마을을 떠나려 했을 즈음이었다. 처음 보는 3인조가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일손을 돕고 있었다.
여자 둘에 어린 소년 하나, 평범한 여행자라기에는 좀 이상한 집단이었다. 주의 깊게 살펴보니 어린 소년이 일행의 중심인 듯했다.
‘여자 한 명은 제국식 시녀복. 남은 여자는 그냥 흔한 여행복이군. 소년도 마찬가지고. 제국의 귀족인가? 남매? 이상한데. 귀족이 호위도 없이 시녀 한 명만 데리고 돌아다녀?’
지켜볼수록 의문은 해소되기는커녕 점점 더 커졌다. 팔다리를 다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환자를 발견한 소년이 그에게 거리낌 없이 신성술을 사용한 것이다.
‘이런 미친. 저 정도 회복력이면 주교급인데? 그런데 왜 저렇게 어리지?’
신성술은 오직 법왕국 내부에서만, 그것도 극소수의 고위 성직자들만이 습득 수단을 독점하고 있는 기적의 비술이다.
문외한이 보기에는 마법과 닮았지만 실제로는 상극이나 다름없다. 신성술은 생물의 회복, 치유, 소생에 관여한다. 공교롭게도 많은 마법사가 오랜 시간 연구했으나 끝내 포기하고 만 ‘치유마법’을 신성술이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마법사는 결코 신성술을 배울 수 없다. 마법의 근원인 마력과 신성술의 근원인 성력이 반발하기 때문이다.
어떤 마법사가 신분을 속이고 법왕국에 숨어들어 신앙을 증명하는 가혹한 시험을 모두 통과한 뒤, 신성술을 하사받는 현장에서 마법사임이 들통 나 처형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최근에 주교가 새로 임명됐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저렇게 어린아이가 주교가 됐으면 신성자의 재림이니 뭐니 하면서 법왕국에서도 사방팔방 광고하고 다녔을 테고.’
그러나 다음 순간, 제렌은 그런 사소한 의문 따위는 어찌 돼도 좋을 정도로 충격적인 장면을 목도했다. 조금 전까지 신성술을 사용하던 소년이 쓸모없는 잔해를 처리하면서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런…… 미친!’
터무니없는 충격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피가 싸늘하게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었다. 급기야 제렌은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지 않나 의심하기 시작했다.
자기 머리에 마법으로 가벼운 전기 자극을 흘려보낸 다음에야 현실임을 확신했다.
‘저 소년을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
전율에 빠진 그의 내면에서 마법적 탐구심이 걷잡을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어떡하지? 잘 설득해서 회유할까? 그러려면 말주변이 있는 놈들을 데려와야 하는데. 몰래 납치할까? 그러려면 밤까지 기다려야 되잖아! 저런 최고의 실험체를 두고 밤까지 기다리라고?!’
-제렌. 올 때가 지난 것 같은데, 또 어딜 쏘다니는 게냐?
갑자기 들려온 통신 마법 특유의 웅웅거리는 목소리에 들끓었던 제렌의 정신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흥분에서 벗어나 이성을 되찾은 그는 자기가 얼마나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깨닫고 간담이 서늘해졌다.
제아무리 마법사라도 마을 한복판에서 사람을 몰래 납치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들키기라도 했다가는 뒷일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함을 유지하며 면밀하게 계획을 세워야 했다.
안타깝지만, 자기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크고 어려운 일이었다. 믿을 수 있는 협력자를 구해야 했다. 배신할 가능성이 낮으며, 무엇보다 자신과 같은 신념을 가진 마법사.
-스승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등을 돌린 제렌이 다급히 사정을 설명하며 자리에서 멀어졌다.
* * *
“거 외지인이 괜히 끼어들지 말라니까……. 그쪽이 아무리 생색내도 우리가 줄 만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 볼일 다 봤으면 얼른 가게.”
다음 날 아침, 마을을 떠나려는 자이안 일행을 발견한 촌장이 다가와 한 말이었다. 마부석에 앉아있던 자이안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마차 안에서 커튼을 치고 옷을 갈아입던 유리아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되게 솔직하지 못한 아저씨네. 고맙긴 엄청 고마운데 줄 게 없어서 미안해서 저러는 거야.”
창문을 열며 유리아가 한 말에 자이안도 비로소 상황을 이해했다. 자이안은 밝게 웃으며 촌장에게 인사한 뒤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촌장은 마차가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하룻밤 고생한 보람이 있었네요.”
「그만큼 일정은 늦어졌지만 말이다.」
“덕분에 부상자들을 늦기 전에 제때 치료하고, 백마법도 제법 익숙해졌는걸요. 유익한 시간이었어요.”
「……흥.」
얄밉지만 맞는 말이었다. 백마법에 익숙해졌다는 게 특히 컸다. 그전에는 백마법을 쓸 때 짧게나마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이제 간단한 치료 정도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쓸 수 있게 됐다.
「백마법도 백마법이지만, 흑마법도 게을리하지 마라. 애초에 네가 배우고 싶다고 해서 가르쳐 준 거 아니냐.」
「아저씨 지금 저한테 질투하는 거예요? 으이구, 애 같기는.」
「……저거는 근데 하루가 지날수록 기어오르네. 하, 어른인 내가 참는다 참아.」
각성자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를 배경 삼아 마차를 몰다 보니 반나절이란 시간도 금방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거대해 보였던 탑은 지척까지 다가온 지금에 이르러선 시야 일면을 아득하게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거대한 크기에 비하면 마법사 세 명이 지키고 있는 입구는 지나치게 작은 나머지 초라하게 보일 정도였다.
“거기 마차, 소속과 학파를 대라. 이 이상 다가오면 공격하겠다.”
탑 입구는 이상하리만치 험악한 분위기였다. 자이안 일행 말고는 근처에 외부인 방문객처럼 보이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방랑 마법사이고, 탑 소속은 아닙니다. 견학과 체류를 허락받고 싶습니다.”
“지금 탑은 모든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알아들었으면 그대로 마차 돌려서 돌아가도록.”
“프리엔 제국 황제 폐하의 친필 서명 추천서가 있어도 말씀이십니까?”
“…….”
권력자와의 친분이 빛을 발했다.
마법사들은 클라비수스 황자의 추천서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가, 거기 찍힌 옥새가 진품이라는 현실을 마침내 받아들이고는 벌레 씹은 표정으로 마차의 통과를 허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