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불온한 징조들 (3)
(53/210)
53화 불온한 징조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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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불온한 징조들 (3)
2022.11.25.
보석탑.
좁게는 마법사들이 모여 만든 거대한 구조물을 의미하며, 넓게는 그 탑을 중심으로 한 반경 수백 킬로미터의 넓은 평원 지대를 가리킨다.
남쪽으로는 프리엔 제국, 서쪽으로는 솔레리온 법왕국을 맞대고 있으며, 나라로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는 거의 갖추고 있지 않음에도 나라로 취급받는 기묘한 땅이기도 했다.
그 역사는 최소 수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더 높은 경지의 마법을 원하던 한 무리의 마법사들이 세계수의 숲에 살고 있는 하이엘프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했으나 그들의 규율을 어겨 쫓겨나고, 이후 세계수의 숲 이남을 방랑하다가 정착한 것이 기원이다.
그들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눌러앉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미궁의 존재다. 세계수 이남의 땅 지하에는 규모조차 파악할 수 없는 엄청난 크기의 미궁이 숨어 있었다.
마법사들은 미궁 내에 여러 위험한 마물과 더불어 온갖 종류의 희귀 자원이 잠들어 있음을 알아냈고, 그 미궁을 마법의 발전을 위해 이용하기로 합의했다. 그리하여 세워진 탑이 바로 보석탑.
마법의 연구와 발전을 위한 순수한 의도로 세워진 탑이었지만, 그 순수함을 언제까지고 가지고 있을 수는 없었다. 미궁에서 얻을 수 있는 자원 상당수는 오직 미궁에서만 나는 것이었다.
자원의 독점은 부의 독점으로 이어지고, 이는 자연히 대륙 내에서 보석탑의 영향력이 비대해지는 효과를 낳았다. 날고 긴다 하는 여러 강대국 중에서도 보석탑의 위명은 프리엔 제국, 일리움 왕국에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다만 모든 나라가 보석탑에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앙숙 관계가 바로 동서로 국경을 맞댄 솔레리온 법왕국이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솔레리온은 태양신 솔라티오를 따르는 대륙 유일의 종교 국가다. 전성기에는 대륙 모든 나라가 태양신의 교리를 따르고, 솔레리온은 세계의 심장이라고 불렸다.
대륙 전역에 종교 회의론이 퍼져나가고 종교의 영향력이 크게 쇠퇴한 지금도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문제는 법왕국이 아주 오래전부터 한결같이 마법사를 박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태양신의 교리는 마법사를 악마의 하수인으로, 마법을 바로 그 악마가 인간을 유혹하고 파멸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불경한 금술로 보았다.
이는 마법사 개인의 성향과는 무관계하며, 따라서 모든 마법사는 교리에 따라 불로써 정화해야 한다.
공교롭게도, 마법사들이 보석탑을 세우고 급격히 힘을 키워나감에 따라 법왕국은 반대로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보석탑을 향한 공격이 하이엘프의 심기를 거스를지도 모른다며 법왕국이 우려하는 사이, 역학관계가 역전된 것이다.
권력을 쥔 보석탑은 적극적으로 종교 회의론을 퍼뜨리며 동시에 마법의 유용성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고, 반대로 대대로 이어진 권력에 안주했을 뿐인 법왕국의 대응은 미온적이었다.
일각에서는 그러한 역사의 흐름에 의문을 품기도 했다. 법왕국은 왜 자국의 안위가 달린 상황에서도 미온적으로 대응했고, 반대로 보석탑은 왜 힘을 가진 뒤에도 법왕국을 침공하지 않고 놔두고 있을까?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은 채, 시간은 흘러갈 뿐이었다.
* * *
“이런 젠장. 저 미친 새끼들이 또 시작이군.”
재수 없게 제비뽑기에 걸려 일주일 동안 국경감시 임무를 맡게 된 정교수급 마법사 델로스 로한은 국경선 너머에 진을 친 일단의 무리를 보며 거나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사흘째인데…… 위협 사격이라도 해서 쫓아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정도는 현장 판단으로 처리해도 될 것 같습니다만.”
“뭐 인마? 혀어언장의 판다아아안? 그러다 원로들이 괜히 꼬투리 잡고 지랄하면 네가 책임지고 욕먹을 거야?”
“어…… 헤헤.”
“웃지 마. 그 면상에 위협 사격을 갈겨버리기 전에.”
국경 너머, 솔레리온 법왕국의 영토. 장궁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대놓고 보석탑 쪽을 향해 화살을 쏘고 있었다.
당장 그 자리에서 국지전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강력한 도발 행위였으나, 국경을 맡은 마법사들은 화살 막이 결계를 펼친 채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대외적으로 보석탑과 법왕국은 사이가 나쁘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만도 않다.
마법의 발전에는 여러 시행착오와 노력, 시간이 든다. 미궁에서 얻는 소재만 가지고는 부족한 경우, 보석탑은 주로 법왕국에서 필요한 소재를 얻어왔다.
법왕국은 그만큼 보석탑과 미궁 자원을 거래할 때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서로 견제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손익을 따져 서로를 암묵적으로 이용하는 관계.
어찌 보면 그 어떤 나라보다도 돈독한 관계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보석탑에 사소한 문제가 일어나 자원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 조짐은 얼마 전부터 있어 왔고, 이것이 결국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 바로 지금 상황이다.
“여기서는 미궁 상황이 어떤지 알 수가 없으니…. 별거 아니라고 했으니 빨리 좀 해결됐으면 좋겠구만.”
동쪽, 보석탑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델로스 로한은 온갖 감정을 담아 중얼거렸다. 하루 빨리 평화로운 일상이 돌아오기를 기도하며.
* * *
보석탑의 영토에 진입한 뒤 첫 마을에 들러 휴식을 취하면서, 자이안 일행은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했다.
웨코스에서 벤야가 사용한 마물을 조종하는 마법은 정황상 보석탑에서 만들어진 것이 확실했다. 목적은 그러한 마법이 만들어지게 된 인과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관련된 모든 연구를 막는 것.
정면으로 찾아가 따진들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우선은 주변을 돌며 정보를 수집하기로 했다.
「마법사도 아닌 단순한 민간인들이 뭘 알 것 같지는 않지만, 손 놓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야 낫겠지.」
「민간에 떠도는 뜬소문도 의외로 도움이 될 때가 있다구요, 형. 정보를 취합하고 분석해서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는 작업이 필요하긴 하지만요.」
「그럴 거면 그냥 관계자 한 명을 잡아다가 불 때까지 족치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요?」
「유민아, 편하게 지내도 된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막 선을 넘으라고 하지는 않았거드은?」
「나이아 언니라면 그랬을 거 같은데…… 보석탑의 마법사들이 나쁜 짓을 한 건 확실하잖아요.」
「……맞는 말이라 반박을 못 하겠네.」
프레이의 말마따나 정보 수집은 순탄치 않았다. 처음 들른 마을은 보석탑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그쪽 사정은 아예 알지도 못했고, 두 번째 들른 마을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럴듯한 정보가 들어온 것은 세 번째, 네 번째를 내리 허탕 치고 다섯 번째 마을에 들렀을 때였다. 다만, 일행이 예상한 내용은 아니었다.
“마물이 넘친다고요?”
“저도 정확히 아는 건 아닙니다만…… 얼마 전 탑 근처 마을에서 온 상인이 그러더랍디다. 마법사들은 별일 아니라며 쉬쉬하고 있지만, 사실은 난리도 아니래요. 근처 사는 사람들은 언제 미궁에서 마물이 쏟아질지 몰라 잠도 제대로 못 잔다 그러더구만요.”
예상한 내용은 아니었으나 큰 도움이 되는 정보였다. 무엇보다도 코르니카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 벤야는 마법으로 마물을 지배하려 했으나, 교만의 등장으로 제어를 잃고, 도시 한복판에 마물들이 날뛰는 재앙을 낳았다.
마법사들 역시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것만 가지고 덥석 믿을 수는 없으니까…… 마을을 몇 개 더 돌아보면서 더 정보를 모아보자. 비슷한 정보가 계속 나오면 사실이라고 봐도 될 것 같아.”
“저도 비슷한 의견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다만 조금 서두르는 게 좋겠어요. 미궁에서 마물이 넘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시간을 끌수록 피해를 입는 분들이 늘어날 거예요.”
마차가 평원을 거세게 달렸다. 이후 일주일에 걸쳐 더 정보를 모은 결과, 소문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됐다.
“자네, 그거 들었나? 국경에서 법왕국 놈들이 또 난리를 친 모양이던데.”
문제는 그 과정에서 흘려들을 수 없는 또 다른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쉬잇! 입 조심하라고! 마법사님들이 쉬쉬하면서 법왕국의 법 소리만 나도 철저하게 단속하는 거 몰라?”
“거 마법사가 무슨 귀신인가? 우리끼리 몰래 얘기하고 있는 걸 지들이 어떻게 알아낼 거야? 게다가 자네 아들놈이 분명 국경 근처 마을에서 목공 일을 하고 있지 않았나? 자넨 걱정도 안 돼?”
“이런 염병할 놈이. 아 그럼 걱정이 되지 당연히 안 되겠어?! 그냥 혹시라도 마법사님들 눈에 띌까 봐 입 다물고 있는 거 아닌가! 지금 시비를 거는 거야 뭐야 대체?”
그날 밤, 숙소에 모인 일행들은 각자가 모은 정보들을 정리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단속이 두려워 다들 말을 아끼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공공연하게 알려질 정도로 오래전부터 시작된 일인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법왕국 쪽에서 시비를 걸고 있고 보석탑은 괜히 마찰이 일어날까 무시하고 있는 상황인가 봐.”
「하긴, 마법사 앞에서 고작 창칼에 활 들고 설쳐봤자 웃기지도 않는 짓이긴 하지.」
「근데 법왕국이라면서요? 소설 같은 거 보면 그런 나라는 보통 백마법을 잘 쓰던데, 저긴 그런 거 없나?」
「나도 몰라. 자이안이 이따 설명해줄 거다.」
각성자들의 실없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자이안도 의견을 냈다.
“전쟁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을까요?”
“없다고는 못할 것 같아. 근데 우리가 직접 본 것도 아니고, 법왕국이랑 보석탑이 얼마나 사이가 안 좋은지 정확히 아는 것도 아니니까…….”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서 정찰한다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겁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 필요하다면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소아레스의 말에 자이안은 잠시 망설였다. 막을 수 있는 전쟁이라면 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당장은 보석탑에서의 일을 해결하는 것이 급했다.
간신히 결론을 내린 자이안이 고개를 저으며 방침을 정했다.
“보석탑에 가서 미궁에서 넘친 마물이나 마물 조종 마법에 대한 진위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정찰은…… 혹시 국경 분쟁이 격화되는 일이 생기면 그때 다시 고려해보죠.”
유리아와 소아레스도 그 말에 동의했다. 전쟁이란 여러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정치의 영역이고, 고작 한 개인이 막을 수도 없을뿐더러, 설령 막아내는 데 성공하더라도 세상에서 전쟁이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것도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존재하고 나라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상 언제든 어디서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오늘까지 다들 고생 많으셨어요. 내일부터는 곧장 보석탑으로 향하기로 해요.”
자이안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정리했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서로 방으로 헤어진 뒤, 일행들은 새벽녘 일찍 보석탑을 향한 여행을 재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