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불온한 징조들 (1)
(51/210)
51화 불온한 징조들 (1)
(51/210)
51화 불온한 징조들 (1)
2022.11.23.
“아직 해가 지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다시 한번 더 여관들을 돌아보도록 하지요. 운 좋게 빈방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거 괜찮다. 효율을 생각하면 여럿이서 나눠서 찾는 게 좋겠지?”
“한 명은 마차를 지켜야 하니 둘이서 가야겠군요.”
“그럼 자이안이 마차를 지키고 나랑 언니가 찾으러 가면 되겠네.”
“훌륭한 제안입니다, 유리아 님.”
“어? 네?”
핀볼처럼 통통 튀는 대화 사이에서 자이안 혼자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멍한 얼굴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소아레스와 유리아는 서로를 보며 한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거의 동시에 자이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게 됐으니까 자이안은 여기서 푹 쉬…… 마차를 지켜줘.”
“값비싼 물건은 없지만, 도난이라도 당하면 앞으로의 여행에 큰 문제가 생길 겁니다.”
“맞아. 아주 중요한 임무라구?”
“그렇다면 둘 중 한 분은 쉬고 제가 가는 게…….”
“그럼 갔다 올게! 마차 잘 지키고 있어야 돼!”
자이안의 말은 끝까지 듣지도 않고 둘은 서두르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멀어지는 둘을 바라보던 자이안이 황망히 중얼거렸다.
“……가 버렸네요.”
「하, 귀여운 짓을 하는구만. 이왕 이리된 거, 너도 그냥 마음 편히 푹 쉬어라.」
“둘만 고생시키는 것 같아서 좀 그런데…….”
「이런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무례한 짓이다.」
성격상 맘 편히 쉬기는 어려울 것 같았지만, 프레이의 말이 맞았다. 자이안은 불편한 마음을 삭이며 마차의 차체에 몸을 기댔다.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주위의 소란에 눈과 귀가 향했다.
곳곳이 활기로 가득한 도시였다. 보석탑과의 교역을 책임지는 국경도시로서의 규모를 감안해도 이례적이었다. 과거 몇 주간 머물렀던 공화국의 수도 코르니카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마족의 폭정으로부터의 해방, 새로운 황제가 즉위한다는 경사, 이로 인해 북쪽의 타국에서 온갖 목적으로 제도로 향하기 시작한 사람들, 이런 요소가 겹치면서 맞은 호황이었다.
자이안처럼 말이나 마차를 세워놓고 쉬는 여행자, 그 자리에 가판대를 펼치고 조금이라도 수익을 챙기기 위해 호객에 몰두하는 상인, 광장 한쪽에 자리를 잡고 낭랑하게 노래하는 음유시인, 간소한 소품을 가지고 가벼운 길거리 공연을 피로하는 유랑극단, 그를 보며 환호하는 사람들.
곳곳에서 환성과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전하와 함께 나쟈와 음욕을 쓰러뜨리지 못했다면, 이런 광경도 보지 못했겠지.’
어처구니없게도, 한 달이 지난 지금에야 자이안은 자신이 죄 없이 고통 받은 많은 사람들과 제국을 구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자이안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가슴 깊이 안도했다. 도중에 망설이기도 했고, 실패를 두려워하며 불안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선택, 걸어온 길은 틀리지 않았다.
활기찬 도시의 분위기가, 이를 즐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이안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제가 옳은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세요. 삼촌, 그리고 아르스 님, 크룩스 형, 유민 누나.’
「……갑자기 뭔 소리야? 선 채로 잠이라도 잤냐?」
‘하하.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해본 말이에요.」
「네가 굳이 그런 말 안 해도, 조금이라도 이상한 길로 샌다 싶으면 거리낌 없이 쌍욕 박아줄 거니까 걱정할 거 없다.」
「어어? 프레이 형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와, 나 이 형 이러는 거 얼마 만에 보는 건지 모르겠네. 3년 넘게 못 봤더니 성격이 좀 바뀌긴 했나 봐요.」
「뭐라고? 오랜만에 10억 볼트 번개 찜질이 그리워졌다고? 나도 마침 손이 근질근질했는데 잘 됐다. 자, 사양하지 말고 얼른 침대에 누워라. 내가 손수 때려눕혀 주기 전에.」
「형, 그거 맞으면 단백질 상해서 근손실 온다고 그랬잖습니까. 그거 말고 지옥불 찜질 갑시다.」
「두 분, 싸울 거면 좁은 방에서 그러지 말고 밖으로 나가세요. 애도 아니고 무슨 짓이에요? 진짜 애가 보고 있는데 부끄럽지도 않아요?」
「유민아, 원래 남자는 나이를 먹을수록 유치해지는 법이래.」
머릿속에 펼쳐지는 유치하지만 훈훈한 광경에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근처에서 쉬던 여행자가 혼자 웃기 시작한 자이안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으나 개의치 않았다.
이대로 계속되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자이안은 갑자기 끼어들어 평화를 어지럽히는 불온한 느낌을 놀라울 정도로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동요를 드러내지 않도록 마차에 기댄 자세를 유지한 채, 자이안은 눈만 가늘게 뜨며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눈으로 보기에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그러나 반복되는 싸움 속에서 갈고닦은 후각은 공기 중에 희미하게 남은 실낱같은 위화감마저 알아차리고 쉴 새 없이 경고 신호를 보냈다.
‘도시 한 복판에서 마물의 냄새라니.’
코르니카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 * *
“……여기가 마지막이지?”
“그렇습니다.”
“사람 진짜 많네.”
“국경도시가 활기차다는 건 좋은 일이지요. 좋은 일입니다만…….”
눈앞에 선 3층짜리 대형 여관을 보며 유리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아레스도 심정은 그녀와 비슷했다.
아직 들어가지도 않았지만, 초인의 영역에 이른 그녀의 날카로운 청각은 이미 건물 내의 상황을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빈방은 없었고 로비와 식당, 주점 등의 역할을 겸하는 1층도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일단 들어가지요.”
“그러자. 혹시 모르니까.”
조심스럽게 들어간 여관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1층을 바쁘게 돌아다니던 점원이 안으로 들어오는 둘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급히 달려왔다. 그러고는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연거푸 고개를 숙인다.
“손님이신가요? 죄송해서 어쩌죠? 지금 저희 여관에 빈방이 하나도 없어요. 황제님 즉위식을 보겠다고 북쪽에서 몰려온 분들 때문에 여관들이 꽉 차서 난리도 아니에요.”
“오늘 중에 빌 예정인 방도 없습니까? 다소 좁아도 괜찮습니다만.”
“글쎄요? 그런 걸 제가 당장 알 수는 없는 일이라……. 솔직히 주변을 한 번 보세요, 손님들. 당장 방이 빌 것 같지는 않잖아요?”
곤혹스러워하며 1층을 돌아보는 점원을 따라 유리아와 소아레스도 한 차례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때 불안한 표정으로 묘하게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한 중년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소아레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우연이 아니다. 저쪽이 처음부터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자, 잠시 기다리시게! 혹시 방을 찾으러 온 여행자들이신가?”
고민하던 남자가 무언가 결심했는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걸었다. 소아레스는 당장 대답하지 않고 남자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를 경계했으나, 유리아는 무방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눈썰미가 되게 좋으시다.”
“그, 그런가? 내가 사람 눈이 좀 있는 편이지. 아니, 그보다 혹시 방을 구할 수 없어서 곤란해하고 있지 않나? 그렇다면 내 좋은 제안을 하나 할까 하네만!”
“좋은…… 제안이요? 흐음. 다른 여관에 빈방이 생겼나 확인해봐야 해서 조금 바쁜데…….”
“그, 그러지 말고 한번 들어보게. 자네들에게도 결코 손해는 아닐 테니!”
유리아는 아주 짧은 순간 살짝 시선을 돌려 소아레스에게 향했다. 이를 알아차린 소아레스가 수신호로 괜찮다는 뜻을 전했다.
무슨 제안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남자는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불안하고 다급해 하고 있었다.
처음 이 여관에 들렀을 때도 이 남자는 같은 자리에서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때 말을 걸지 않았던 것은 자신들이 제안을 받아들일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여관에 또다시 찾아온 것을 보고, 그들이 숙소를 구하지 못해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 뒤에야 말을 건 것이다.
남자의 ‘제안’이란 것도 얼추 짐작이 됐다. 아마 남자는 자기가 묵고 있던 방을 양보하는 대신, 같은 여관을 두 번이나 찾을 정도로 절박하게 숙소를 찾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귀찮은 일을 부탁할 것이다.
“내가 실은, 원래 오늘 정오가 되기 전에 도시를 떠나 남쪽으로 향할 예정이었는데…….”
남자의 제안은 소아레스의 추측 그대로였다. 간추리자면, 동행 중인 딸이 아침 일찍 도시를 구경하겠다고 나간 뒤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호위를 맡은 용병들도 딸을 찾아보고는 있네만 아직 이렇다 할 소식이 없는 상황이네. 부탁일세. 혹시 우리 이제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사정이 딱했으나 솔직히 말하면 막막한 부탁이었다. 유동 인구를 포함해 적어도 만 명 이상이 머무르고 있을 도시에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을 찾는 건, 볏짚 속에서 동전 하나를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우리라.
“한번 찾아볼게요. 따님 인상착의가 어떻게 되나요?”
그렇다고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다른 여관에 빈방이 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밑져야 본전이었고, 소아레스와 유리아, 자이안 모두 평범한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으니. 여차하면 ‘자이안의 가족들’이 어떻게든 해줄 거라는 안심감도 있었다.
“일단 자이안한테 얘기하는 게 좋겠지?”
“말도 없이 너무 늦으면 자이안 님 성격에 분명히 걱정하실 테니, 그게 좋겠지요.”
“사정 설명하면 분명히 자기도 돕겠다고 오지랖 부릴걸? 이번엔 말릴 자신 없는데.”
“……어쩔 수 없지요. 본디 그런 분이지 않습니까.”
“아하하. 그건 그렇지. 그런 성격이라서 이렇게 같이 여행하고 있는 거니까.”
자이안에 대해 칭찬인지 흉인지 모를 얘기들을 나누며 광장으로 돌아간 둘은, 그러나 자이안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무언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마치 마물을 눈앞에 뒀을 때와 같은 험악한 표정으로, 그가 급하게 둘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 * *
솔직히 소아레스는 남자의 딸의 안위에 대해서는 그다지 걱정하고 있지 않았다. 비록 만반의 상태는 아니지만 파르곤의 치안은 이미 상당 부분 복구되어 있었다.
즉위 소식을 선포했을 때 많은 사람이 몰릴 것을 예상한 클라비수스가 파르곤의 치안에 충분히 힘을 쏟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해가 훤하게 뜬 오전에 여성이 납치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도시에 마물이 침입했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여성의 실종이 마물의 소행일 가능성도 있고, 설령 그렇지 않아도 마물의 존재는 도시에 폭탄이 심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현재 파르곤의 상비 전력으로는 고블린 한 무리를 상대하는 것도 버거울 지경이었으니.
문제는 마물이 대체 무슨 수로 은밀히 도시에 숨어들었느냐 하는 점이었다. 자이안의 후각을 못 믿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했다.
마물에게 이성이나 고등한 지능 따위는 없고, 가진 건 오직 원시적인 본능과 인간에 대한 끝없는 적의뿐. 그런 존재가 대체 어떻게 아무 소란도 없이 대도시에 침입할 수 있었을까?
“또다시 마족이…….”
“혹시 누가 금지된 마법을…….”
비슷하게 추론을 이어간 소아레스와 유리아가 거의 동시에 중얼거렸다. 놀라며 서로를 바라본 뒤, 어느 쪽의 가설도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선두에서 지붕 위를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넘는 자이안은 굳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문 채였다.
그가 느끼고 있는 것은 지독한 위화감이었다. ‘마물의 냄새’라고 표현하기는 했으나, 지금 느껴지는 냄새는 지금껏 맡은 일반적인 마물의 냄새와 판이하게 달랐다. 마족, 마인의 것과도 달랐다.
애초에 마물, 마인, 마족 간의 냄새는 농도가 다를 뿐 종류 자체는 다 같다. 그러나 지금 자이안이 맡고 있는 냄새는 종류 자체가 다르게 느껴졌다.
마물 그 자체의 냄새라기보다는, 마물의 냄새가 섞인 미지의 생물의 냄새라고 말하는 게 더 어울렸다.
“……거의 다 왔어요.”
낮게 중얼거린 뒤 자이안은 도시 외곽, 미처 정비되지 않은 폐허 구역의 어느 허름한 집 앞에 멈춰 섰다. 한 박자 늦게 착지한 유리아와 소아레스가 주변을 경계하며 전투태세를 취했다.
아까 전까지 도심에서 느껴지던 활기가 마치 덧없는 아지랑이였던 것 같았다. 을씨년스러운 폐허는 언제 마물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후우…… 그럼 들어갈게요.”
마지막으로 일행의 의사를 확인한 자이안이 결연한 표정으로 문을 열어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