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각성자들
(50/210)
50화 각성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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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각성자들
2022.11.22.
수도를 떠나며 다시 시작한 여행도 어느덧 10일 차에 접어들었다. 자이안과 유리아는 스스로를 갈고닦고, 소아레스는 둘을 받쳐주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반복되는 일상에 마침표를 찍은 이는 지구 측 각성자들이었다. 얼마 전 말한 아틀라스와 세인트가 마침내 시간을 내 프레이의 집에 찾아온 것이다.
「우와. 전에 아르스 누나한테 연락받았을 때는 이게 무슨 재미없는 농담인가 했는데…… 진짜 프레이 형이네요? 실물 맞아요? 도플갱어 같은 거 아니고?」
「아틀라스. 오랜만에 만나는 분들께 그게 무슨 실례되는 말투예요?」
「세인…… 이 아니라 유민 씨. 여기선 맘 편하게 본명 불러도 된대요. 프레이 형이 알아서 커버해 준다더라고요.」
「……진짜? 격식 안 차려도 돼요?」
머릿속에 투영되는 지구 쪽 광경에 자이안은 조금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실제로는 유리아를 거쳐 소아레스까지 이제 겨우 두 명의 동료가 생겼을 뿐인데 주변이 굉장히 북적거리게 된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떠들어대는 사람이 졸지에 두 배로 늘어났으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럼 일단 통신기를 동기화하고…… 오, 보인다. 세 분이네요?」
「둘은 자이안, 그러니까 나이아 녀석 아들이 여행하면서 만난 동료다.」
「그렇구나. 하하, 어쩐지 신기한 기분이네요. 분명 처음 만난 친구인데 묘하게 반가운 게, 확실히 나이아 누나를 좀 닮은 것도 같고. 반가워요. 저는, 음…… 보통은 아틀라스라고 불리고 있어요. 본명은 크룩스 프리드릭스예요. 크룩스 형…… 아저씨? 하하, 자이안이 편할 대로 부르면 돼요. 전 이것저것 선 긋고 격식 차리고 그러는 건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먼저 소개한 이는 2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프레이나 아르스의 예를 생각하면 그도 실제 나이는 최소 서른에서 마흔이 넘은 중년이겠지만.
특징적인 것은 그의 인상이었다. 개미 한 마리 죽이는 것도 주저할 것만 같은 선량하고 유순한 인상의 이목구비 아래에, 바위 같은 근육으로 똘똘 뭉친 단련된 거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자이안은 흡사 견고한 요새라도 마주한 듯한 기분이었다.
자이안이 저도 모르게 단련된 육체에 시선을 향하자, 통신기 너머임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느낀 그가 극히 자연스럽게 사이드 체스트 자세를 잡았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질색하며 보고 있던 여성, 세인트가 참지 못하고 등짝을 후려쳤다.
「너어는 진짜……! 처음 보는 애한테 무슨 징그러운 짓이에요?!」
「네에? 징그럽다뇨? 근육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자세일 뿐이잖아요.」
「변태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소개 끝났으면 얼른 비켜요! ……아, 아! 바, 반가워요. 아하, 에헤헤헤……. 흠, 크흠! 저는 세인트라고 해요. 본명은 최유민이고요. 아, 저는 다른 셋하고는 다르게 최가 성이고 유민이 이름이에요. 최, 유민. 잘 부탁드려요.」
‘하하, 잘 부탁드려요. 음……. 유민 누나.’
다른 세 각성자도 그랬지만, 유민의 외모는 그들 사이에서도 특히 더 어려 보았다. 아무리 높게 쳐줘도 20대 초반. 좀 과장을 보태면 자이안과 동년배라고 봐도 통할 정도였다.
「유민…… 누나……?!」
물론 자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꺼낸 호칭에 가슴을 누르며 감격하는 모습을 보면 그녀 역시 실제 나이와 외모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있음은 분명했다.
「앞으로는 이 둘도 널 훈련시켜 줄 거다. 흐음, 시간을 배분할 필요가 있겠군. 느긋하게 의견을 나눠보자고.」
‘그 전에 유리아와 소아레스에게 두 분을 소개하고 싶어요.’
「아, 그렇지. 말도 없이 갑자기 두 명이 늘어나면 걔들도 놀랄 테고.」
바쁜 나날이 시작되었다.
세인트, 성자라고까지 불리는 유민은 회복과 보조마법 등을 포괄하는 마법 계통, ‘백마법’의 달인이었다.
반면 아틀라스는 마법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었고 대신 현존하는 모든 종류의 무술을 섭렵한 근접전의 달인이었다.
일견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각성자였으나, 프레이는 장기적으로 그들의 가르침이 자이안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확신했다.
‘그게 바로 올마이티, 나이아가 강한 이유였으니까.’
단 하나의 예외를 제외하면, 모든 각성자는 배울 수 있는 기술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 이는 최초로 각성할 때 얻게 되는 강력한 초능력, 일명 ‘특성’ 때문이다.
가령 파괴마법, 즉 흑마법에 관한 특성을 타고나면 흑마법이 아닌 다른 기술을 배우는 것은 매우 어렵고 비효율적이었다.
개중에는 아예 배울 수 없는 기술들도 있었다.
특성은 자유롭게 고를 수도, 마음에 안 든다고 바꿀 수도 없다. 한 번 얻은 특성은 좋으나 싫으나 평생 안고 가야 한다. 각성자로서의 미래가 처음 각성하는 순간 정해지는 것이다.
얼핏 보면 단점뿐인 불합리한 시스템이었으나, 사실 그렇지만도 않았다. 평시 상황이면 모를까, 인류의 존망이 걸린 게이트 재해 앞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쓸 수 있는 실전 병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각성자들은 자기 특성과 맞는 계통의 기술은 쉽게 배우고 빠르게 능숙해질 수 있었다.
또, 시간이 흐른 뒤에는 기술 습득을 제한하는 각성자의 특성이 지나친 MP 중독을 막아 각성자가 마인이 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는 연구 결과가 밝혀지기도 했다.
모든 일에 예외가 있듯, 특성도 마찬가지였다. 단 하나의 예외, 바로 나이아 알코스였다.
그녀의 특성이 처음부터 남들에 비해 뛰어났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나이아의 특성은 모든 기술을 제한 없이 익힐 수 있지만, 습득한 기술의 종류가 늘어날수록 성장이 더뎌진다는 미묘한 것이었다.
이를 갈고닦아 세계 최강이라 불릴 정도로 강해진 것은 어디까지나 나이아 본인의 노력이었다.
전성기의 나이아는 문자 그대로 일기당천의 전력이었다. 천 마리의 마물을 상대한다는 게 아니라, 천 명의 각성자를 상대한다는 뜻이다.
흑마법은 프레이에, 백마법은 유민에, 무술은 아틀라스에, 아티팩트 공학은 아르스에 미치지 못하는 2인자 수준이었으나, 그 모든 기술을 상황에 맞춰 자유자재로 조합하는 전투 방식은 나이아이기에 가능한 고유한 영역이었다.
‘그리고 자이안, 너도 그 피를 이어받았다.’
지금 자이안의 성장 속도는 전성기 나이아의 그것보다도 더 대단했다. 마물과의 싸움을 시작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여러 번 헤일로를 발현하고, 아티팩트 제작 중에 트랜스 상태에 접어들기도 했다.
이를 단순히 재능 덕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이안이 어릴 때부터 쌓아 올린 노력을 폄하하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그가 2대 올마이티라 불릴 만한 자격을 가졌음은 분명했다.
‘어디까지 강해질지, 과연 그 녀석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 솔직히 기대되는군.’
프레이는 새 각성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이안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 * *
제도를 떠나 약 한 달 차에 접어든 어느 날 아침.
“오늘도 소아레스가 해주는 밥은 맛있네요!”
“언니가 없었으면 우린 지금쯤 말라붙은 햄 쪼가리나 물어뜯고 있었겠지.”
“으아아…… 상상만 해도 메스꺼움이!”
“소아레스 언니가 없는 여행은 이제 상상할 수도 없어.”
간소하게 차린 아침 식사를 앞두고 자이안과 유리아는 감격에 겨워 찬양을 하고 있었다. 말만 들어선 농담 같은데 둘의 표정은 아무리 봐도 진심이다. 소아레스는 곤혹을 감추기 위해 쓴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한 달가량 함께 여행하며 소아레스가 알게 된 점은, 둘이 은근히 생활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요리를 못 하는 거야 그렇다 쳐도, 똑같은 옷을 세탁도 안 하고 계속 입으려 하거나 하는 건 솔직히 조금 심하다 싶었다.
덕분에 소아레스는 하나부터 열까지 둘을 뒷바라지해 주느라 보모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것도 마냥 나쁘지는 않네요.’
클라비수스는 그렇게 손이 많이 가는 주인이 아니었다. 전우로서 지낸 기간이 길다 보니, 사실 모셔야 하는 주인이라는 의식 자체가 옅었다.
그에 비하면 둘은 가끔 좀 한심하게 느껴지기는 해도 확실히 보필할 보람이 있었다.
“오늘 중에 국경도시에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속도로 간다면 정오를 지날 즈음에는 도착하게 되겠네요.”
마부석에 앉은 소아레스가 지도를 꺼내 펼치며 말했다. 지붕 위에 서서 균형을 잡으며 훈련하던 유리아, 객석에서 아티팩트 공학 교재를 복습하던 자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점심은 도시에 도착해서 먹을까요?”
“오, 그거 좋다. 하는 김에 갈아입을 옷도 몇 벌 살까?”
“좋네요. 헤져서 못 입게 된 옷이 몇 벌 있었으니까요.”
어느덧 제국의 끝자락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보석탑과의 교역을 책임지는 대규모 국경도시, 파르곤이 바로 제국 북방의 마지막 도시였다.
“사람이 제법 많네요.”
아직 정비되지 않은 넓은 중앙대로에 벌써부터 사람의 그림자가 드문드문 보였다.
두세 명씩 무리를 지은 헤진 옷차림의 여행자, 용병인 듯 보이는 완전 무장한 무리, 순례자를 연상케 하는 노인, 자이안 일행이 타고 있는 마차에 버금가는 크고 호화로운 마차까지.
많은 이들이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제국이 정상화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모두 제도로 향하는 걸까요?”
“대부분 그렇겠지요. 지금 제도는 혼란스러운 만큼 기회를 잡기도 쉬운 도시일 테니 말입니다.”
남하하는 사람들의 흐름을 거슬러오르며, 마차가 마침내 파르곤에 도달했다. 소아레스의 추측대로 정오를 살짝 지난 시각이었다.
너무 눈에 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붕에서 내려와 얌전히 객석에 앉아있던 유리아가 밖을 내다보며 눈을 빛냈다.
“오, 사람 엄청 많다. 축제라도 하는 것 같네.”
“……조금 이상하군요. 인구가 많은 도시이기는 하나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의문은 오래지 않아 밝혀졌다. 도시 곳곳에 제도로부터 전해진 포고문이 붙어 있던 것이다. 제국은 클라비수스와 동료들의 활약으로 구원받았으며, 곧 정식으로 클라비수스의 즉위식이 있으리라는 내용이었다.
“한때는 제국이 이대로 망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래도 신이 이 나라를 아주 버리지는 않은 모양이야.”
“그러게 말일세. 언제든지 북쪽으로 달아날 수 있도록 짐을 싸 놨었는데, 이제는 필요 없게 됐구먼.”
“이게 다 클라비수스 전하의 덕…… 아니지, 이제는 폐하라고 불러야 하나? 아무튼 다 그분 덕분이지! 그분께서 다스리시는 한 제국은 앞으로 천 년은 끄떡없을 거라고!”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표정에 근심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화 내용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제국의 밝은 미래를 꿈꾸며 클라비수스의 위업을 찬양하고 있었다.
「이런 세상에. 이제 고작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이 정도로 민심을 다잡았다고? 게다가 여긴 제도에서 꽤 떨어진 최북단인데?」
놀란 프레이가 황망히 중얼거렸다. 곰곰이 생각하던 아틀라스, 크룩스가 의견을 보탰다.
「제가 직접 본 건 아니라 정확한 사정은 잘 모르겠는데, 아마 최북단이라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국경도시의 분위기는 이웃 나라에도 그대로 전해질 테니, 불안 요소를 없애고 우선적으로 민심을 수습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요. 어쩌면 내륙 쪽이 오히려 여기보다 더 어수선할지도 모릅니다.」
아르스가 손뼉을 짝 치며 감탄했다.
「오, 크룩스. 여전히 날카로운 의견.」
「으흠. 단련된 근육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죠.」
자연스럽게 팔을 들어 근육을 과시하는 크룩스를 유민은 기분 나쁜 벌레라도 발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생각한 프레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리가 있구만. 하, 그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녀석을 회유했어야 했는데! 이 정도로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이라면 분명 자이안에게 큰 도움이 됐을 텐데 말이다.」
「그럼 제국이 망하는데?」
「제국 따위 망하든 말든 알 게…… 아, 알았다, 자이안. 농담이니까 그렇게 한심한 눈으로 보지 좀 마라. 삼촌한테 그게 무슨 버릇이야?」
흡사 축제 분위기에 가까운 도시였으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마차를 몰고 도시 곳곳을 뒤진 끝에 자이안과 유리아, 소아레스는 끝내 외면하려 했던 불편한 진실을 마주 봐야 했다.
“남아있는 여관이…….”
“하나도 없군요.”
자이안과 소아레스가 힘없이 말했다. 유리아의 뒤이은 한 마디가 가라앉은 분위기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그럼 우리 또 노숙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