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평화로운 일상 (49/210)


49화 평화로운 일상
2022.11.21.


“하압! 에이! 야아앗!”

앳된 기합 소리가 안뜰에 울려 퍼진다.

“좋습니다, 도련님. 그 기세입니다. 마물을 상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겁먹지 않는 것입니다. 결코 잊지 마십시오.”

어린아이용으로 맞춤 제작된 목검이 투박한 궤도를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훈련을 지시하는 기사는 시종 엄한 태도이면서도 때때로 흡족한 눈빛을 드러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 바란드 알레프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이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고생 많으셨습니다, 도련님. 오늘도 훌륭하셨습니다.”

“감사…… 하아, 후우, 감사합니다! 테이로이 경도 고생하셨습니다!”

목검을 거둔 바란드가 정자세를 취하며 깍듯하게 인사했다. 기사는 조금 전까지의 엄한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받았다.

바란드 역시 수줍어하면서도 솔직하게 웃었다.

부모 자식처럼 친밀한 모습이지만, 사실 둘 사이에서만 보이는 특별한 관계는 아니었다. 바란드는 알레프 가의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아이였다.

마치 10여 년 전 어느 누군가가 그랬던 것처럼.

‘바란드는 잘하고 있어. 언제나 내 예상을 뛰어넘는 아이야.’

조금 떨어진 곳의 나무 그늘 아래, 눈에 띄지 않게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미오네는 침착하게 가라앉은 표정이었다.

바란드는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었다. 신체적인 면, 정신적인 면 모두 그랬다. 하나를 가르치면 둘, 셋을 배웠다. 항상 겸손하고, 아랫사람을 대할 때도 예의와 절도를 잃지 않았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총명한 아이였다.

그렇기 때문일까, 때때로 미오네는 바란드의 모습 위에 이제는 죽어 없어진 누군가가 겹쳐지는 환상을 보고는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아쉬움을 느끼는 자신에게 흠칫 놀랐다.

‘이게 맞아. 지나친 천재성은 독이 될 가능성이 커. 자신은 물론 주변에게도.’

천재는 대개 선망보다는 질투를 받는다. 그러나 천재성이 도를 넘어 이해 불가능한 영역에 이르면, 범인들은 두려움에 이어 경외감을 느낀다.

주변의 모두가 천재인 한 개인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이윽고 모든 시스템이 천재를 중심으로 재구축된다. 그가 없으면 기능하지 않겠지만, 그가 존재하는 동안은 무엇보다도 효율적인 시스템이다.

미오네는 이를 천재가 가지는 천성의 악성(惡性)이라 보았다. 천재 개인이 선한지 악한지의 구분은 이 경우 크게 의미가 없다. 악한 천재도 위험하지만, 선한 천재 역시 만만찮게 위험하다.

만약 선한 천재가 어떤 계기로 변심한다면? 불의의 사고나 전염병 따위로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면? 그렇게 아무런 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시스템의 핵심을 잃고 만다면?

그를 중심으로 뭉쳐 있던 주변은 졸지에 키를 잃어버린 채 망망대해에 버려진 배가 되고 만다.

그 한 번의 사건으로 사회 전체가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쉽게 추스르기 힘든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은 분명했다.

극단적인 생각임은 미오네 본인도 잘 알고 있다. 애초에 그런 악마적이기까지 한 천재가 현실에 존재할 리가 없다. 10년도 더 된 옛날, 나이아와 자이안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미오네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내내 알레프 영지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던 나이아가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날이었다.

왕성에 오른 나이아는 그 자리에서 알레프 왕성이 가지는 건축학적, 예술적 가치와 장단점에 대해 유창하게 토론하며, 전략적 관점에서의 취약점을 단숨에 꿰뚫어보고 보완책을 제시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흠잡을 데가 없다는 것이 추후 아카데미 소속 건축학자들이 토론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정작 나이아가 왕성을 직접 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녀가 보인 천재성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제국의 5황자 클라비수스를 비롯해 연회에 참여한 많은 이들과 교류하며 그녀는 가늠할 수 없이 깊은 지식을 여러 번 드러냈다.

고리타분한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편협하고 늙은 일부 귀족들조차 종국에는 그녀 앞에서 꼬리를 말고 달아났을 정도였다.

다만 미오네는 나이아 본인보다는 그녀와 동행한 여섯 살 소년에게 더 신경이 쏠렸다. 백번 양보해서 나이아는 이해할 수 있다. 어쨌거나 그녀는 풍부한 경험을 겪었음이 분명한 성인이니까.

그러나 그녀의 곁에 딱 붙어서, 그녀의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며 때때로 섬뜩하리만치 정확한 의견을 보태는 소년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 아이가 가진 두렵기까지 한 천재성은, 정녕 인간이 가져도 되는 것인가?

미오네는 그날 진정한 두려움이 무엇인지 알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것이 그녀의 가슴 속에 깊이 잠들어있던 냉혹하고 합리적인 정치적 재능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전까지 그녀는 국왕 시모스가 은연중에 추진하는 알레프가 복속 계획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무모한 계획이라는 게 뻔히 보였으니까.

그러나 그날 이후 미오네는 적극적으로 세력을 넓히며 거침없이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차근차근 쌓아온 공든 탑이 하나둘 결실을 맺어 마침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어머니! 보고 계셨습니까?!”

뻣뻣하게 굳은 몸을 풀며 저택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바란드가 미오네를 발견하고는 쪼르르 달려왔다. 미오네는 상념에서 벗어나 부드러운 미소로 아들을 맞이했다.

“물론 보고 있었지요. 우리 바란드가 이렇게나 열심히 하는데 지켜보지 않을 수가 없었답니다.”

“부, 부끄럽습니다. 아직 실력이 많이 부족해요. 더 정진하겠습니다!”

“매사에 열심히 임하는 것도 좋지만, 제때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것도 중요해요. 무리를 하다가 지쳐 쓰러지면, 바란드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까지 힘들어짐을 잊지 마세요.”

“우우…… 알겠습니다, 어머니. 하지만 자이안 형님은 분명 저보다 훨씬 대단했을 텐데…….”

기습처럼 튀어나온 그 이름에 미오네는 급히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자칫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나올까 우려해서였다. 다행히 동요는 생각보다 빨리 잦아들었다.

미오네는 시무룩해진 바란드를 온화한 표정으로 격려했다.

“사람은 누구나 잘하는 것이 있는 만큼 못하는 것이 있는 법이에요. 바란드가 알지 못했을 뿐 자이안도 못하는 게 있었어요. 그러니 바란드,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바란드는 분명 자이안만큼, 아니, 그보다 더 훌륭한 남자로 자라날 거예요.”

“……정말 그럴까요?”

“물론이죠. 아니면 바란드는 제 말은 믿지 못하겠나요?”

“그럴 리가요! 어머니께서 말씀하신다면 분명 그럴 겁니다! 바란드는 반드시 어머니의 기대에 어울리는 남자가 되겠습니다!”

“후후,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오네는 문득 먼 곳을 바라보았다. 바란드에게 진실을 알릴 생각은 없었다. 어린 지금은 물론이고 그가 충분히 성장한 뒤에도 마찬가지다.

죄를 범하는 것은 자신만으로 충분했다. 더럽고 고된 일은 모두 자신에게 맡기고 바란드는 오직 깨끗하게 정비된 길만 걸었으면 했다.

개인에 불과한 천재의 악성에 매료되어 모든 시스템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계기였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도 그 사명감으로 행동하고 있냐고 미오네에게 묻는다면, 그녀는 쉬이 대답하지 못하리라.

아이를 가지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와 교감하며 어머니가 되었다는 실감을 가진 순간 미오네는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변화를 겪었다.

사명감은 물론 잊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란드, 모든 것이 바란드를 위해 준비되어 있어요. 바로 제가 준비한 거랍니다. 그러니 아무 것도 우려하지 말아요.’

죄 없는 한 소년을 악의적으로 고립시키고 종국에는 사고로 위장해 죽여 버리는 참혹한 죄를 저지르는, 더없이 광적이며 그만큼 순수한 모성애였다.

미오네 알레프. 냉혹한 정치인이고 끔찍한 살인자이며, 아들을 위해 무엇이든 희생할 준비가 된 어머니였다.

* * *

“흡! ……핫!”

이른 새벽. 서늘한 안개를 머금은 공기가 힘찬 기합에 맞춰 강하게 떨린다. 나뭇잎에 맺힌 이슬이 비산하며 공터에 선 자이안의 모습을 비췄다.

“후우……! 합!”

잠시 자리에 멈춰 있던 자이안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칼날이 새벽녘을 비추며 눈부시게 번뜩였다. 세로로 강렬한 일격. 칼끝이 땅에 닿기 직전 몸을 비틀며 방어.

쉴 새 없는 움직임에 맞춰 발밑의 흙이 거칠게 흐트러진다. 아침 훈련. 이젠 생활의 일부라고 말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진 일과였다.

“하아……!”

어느 순간 자이안의 움직임이 격변했다. 더 크고 거칠게. 움직임에 맞춰 스펙트럼도 모습을 바꿨다. 키보다도 큰 할버드를 능수능란하게 휘두르며, 자이안은 전날 싸운 안개의 거인의 모습을 눈앞에 그렸다.

‘그땐 어이없게 놓쳤지만, 만약 또다시 같은 상황이 된다면…….’

자이안의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존재하지 않는 눈앞의 적을 노려보며 그는 아주 천천히, 마치 화폭에 마지막 한 점을 찍는 예술가처럼 심혈을 기울여 자세를 잡았다.

최단거리, 최고속도의 찌르기. 눈으로 봐도 피할 수 없는 절대명중의 일격.

‘다음엔 놓치지 않는다.’

어깨 위에 아지랑이 같은 기류가 일렁거리더니 각성자 특유의 MP 발산 현상, 헤일로가 나타났다. 그 순간 자이안이 땅을 박찼다. 찰나 그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가, 거의 동시에 10여 미터를 가로지르며 다시 나타났다.

흙바닥이 난폭하게 흐트러지며 짙은 흙먼지를 피워 올렸다. 파아앙! 한 걸음 늦게 그의 속도를 뒤쫓아 온 소리가 충격파를 일으키며 새벽안개를 날려버렸다.

「……처음 만났을 때하고는 완전 딴사람이 됐구만.」

프레이가 저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렸다. 칼끝을 내지른 자세로 멈춰 있던 자이안은 그 목소리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다지 만족스러운 표정은 아니었다.

“좀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소리보다도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놈이 욕심도 참 많다. 왜, 다음엔 빛보다도 빠르게 움직여보지 그러냐?」

“그거 좋네요. 아무리 도망치는 발이 빨라도 설마 빛보다 빠르지는 않을 테니까요.”

「아니, 미친놈아, 좀. 농담이라고.」

“저도 알아요. 하하하.”

「하! 이 자식 이거 능구렁이 다 됐네. 누구 닮아서 저러나 몰라.」

「으으으응? 지금 그 말이 프레이 입에서 나와? 이 누나가 평생 들은 농담 중에 가장 안 웃기는 농담인거얼.」

「뭐? 너 닮아서 그런 거라고? 이런 제기랄,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네 얘기거든?!」

“두 분 그만 좀 싸우세요. 시간 아깝잖아요.”

가벼운 아침 훈련을 끝낸 뒤는 마법 강의 시간이었다. 매일 한 시간가량. 무려 지구 최강의 마법사 프레이가 직접 가르치는, 짧지만 굵은 시간이었다.

이론과 학문 위주로 발달한 이 세계의 마법에 비해, 지구의 마법은 철저하게 실전을 위한 전술로서 발달했다.

때문에 프레이의 가르침은 자이안이 알고 있는 이론과 다르거나 아예 정면으로 상충할 때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가르침이 도움이 되지 않느냐 하면 전혀 아니었다.

본인의 성격을 드러내는 듯한 직관적인 설명은 이해하기 쉬웠다. 이론이 엇갈릴 때마다 프레이는 그 자리에서 기존보다 고도화된 이론을 뚝딱뚝딱 정립해내는 신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전투 자체를 즐기는 듯한 호전적인 성격에 가려지기 마련이지만, 실제로 프레이는 마법의 이론적인 부분 역시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지구 최강의 마법사라는 칭호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아르스도 마냥 손가락만 빨며 구경하지는 않았다. 음욕과의 싸움에서 아티팩트의 유용함을 실감한 자이안은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아르스가 택한 방식은 자신이 아는 모든 이론을 기초부터 심화까지 구분해 교재로 만드는 것이었다. 바로 며칠 전 기초 과정 교재가 완성된 참이었고, 자이안은 여정 중 남는 시간마다 교재를 보며 이론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프레이와 아르스는 손수 가르치는 제자가 쑥쑥 성장하는 즐거움에, 자이안은 미지의 지식을 배우는 즐거움에 푹 빠진 선순환이 완성된 것이다.

「수고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벌써 아침 식사 시간이네요. 삼촌도 고생 많으셨어요.”

「이 정도야 별거 아니다.」

자리를 정리하고 야영지로 돌아간 자이안을 맞이한 것은 식욕을 자극하는 버섯 수프의 냄새였다. 제도를 떠난 뒤 그들 일행이 겪은 가장 극적인 변화가 바로 식생활이었다.

한때 황궁 내 시종들을 통솔하는 시종장이기도 했던, 만능 메이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소아레스의 합류가 극적으로 빛을 발한 것이다.

딱딱하게 말라붙은 보존식으로 하루를 시작했던 과거에 비하면 지금은 매일이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훈련은 모두 마치셨습니까? 고생하셨습니다. 적신 수건을 준비했으니 몸을 닦으시지요. 식사도 바로 드실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고마워요, 소아레스.”

“후후, 괘념치 마시지요. 서로 잘하는 일을 맡는 것도 여행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감사 인사와, 장난기가 섞인 가벼운 겸손. 태도는 여전히 정중하지만, 결코 선을 긋는 것은 아니다. 자이안은 이 신선한 거리감이 마음에 들었다.

“아! 자이안, 훈련 끝났어?”

온몸이 땀으로 흥건한 유리아가 마지막으로 야영지로 돌아왔다. 매일 소아레스의 지시대로 훈련에 임하며 그녀 역시 바쁜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그 시간을 증명하듯 유리아의 성장 역시 눈부셨다.

측면 벽을 수평으로 펼칠 수 있도록 개조된 마차 위에서 소박하지만 충실한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특이한 점은 자이안과 유리아, 소아레스 말고도 아바타로 소환된 프레이가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는 사실이리라.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냥 소아레스의 식사를 맛보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런 일로 피 같은 MP를 써야 한다는 사실에 자이안은 어이가 없어 했지만, 이제 와서는 그러려니 했다. 매일 아침 5분 정도 소환하는 건 이제 그리 부담스럽지도 않았고, 프레이도 나름대로 주변을 살피면서 안전하다 싶을 때만 그러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소아레스의 뛰어난 요리 솜씨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에 아르스가 말했듯 프레이의 미각은 꽤나 까다로운 편이었으니까.

그렇게 평화롭고 순조로운 여정이 이어졌지만 자이안은 내심 한 가지 불만이 있었다. 정확히는, 작은 아쉬움이었다. 마법이나 아티팩트 공학의 숙달에 비해 최근 검술의 성장이 더디게 느껴지는 것이다.

어찌 보면 과한 욕심이지만, 그런 향상심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럴 줄 알고 내가 준비한 게 있지.」

시험 삼아 슬쩍 프레이에게 상담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답을 내놓았다.

「조만간 아틀라스와 세인트를 부를 생각이다. 그 둘은 네가 원하는 답을 알고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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