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작은 희망을 남기고
(48/210)
48화 작은 희망을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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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작은 희망을 남기고
2022.11.20.
40년 넘게 제국을 독재한 나쟈가 남긴 흔적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나쟈―정확히는 음욕―을 쓰러뜨린 위업은 제국의 역사에 새겨져 앞으로도 길이 전해질 테지만, 그녀를 쓰러뜨리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가장 큰 문제는 황궁에서 일하며 정무를 집행하던 고위 귀족, 공직자들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는 점이다.
마인화 초기 단계에 머물렀던 클라비수스 황자는 음욕이 죽은 순간 깨끗하게 나았지만, 완전히 마인으로 변한 이들은 구할 여지가 없었다.
음욕을 쓰러뜨린 뒤에도 황자 일행은 꼬박 하루에 걸쳐 황궁 부지 전역을 샅샅이 뒤지며 남은 마인들을 쓰러뜨려야 했다.
그렇게 황궁 내의 물리적 위협을 모두 몰아낸 뒤에야 간신히 시작 지점이다. 밭농사로 치면 이제 겨우 정지작업을 마친 셈이다.
할 일은 눈앞이 깜깜해질 만큼 많았고 가용인력은 치명적으로 모자랐다.
소아레스는 부하 첩보원들을 보내 각지의 반란군 세력을 급히 불러 모았지만 언제 도착할지는 미지수였다. 그동안은 황자 혼자서 정무를 전담해야 했다.
가능할 리가 없었다. 사실상의 국정 마비 상태였다.
그런 상황이었지만 자이안과 유리아는 마치 동떨어진 것처럼 느긋하게 쉴 수 있었다. 이번 마족 토벌은 자이안 일행이 없었으면 꿈도 못 꿨을 일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제국민도 아니고, 하다못해 제국이 정상화되면 뭔가 이득을 보는 것도 아니다. 오직 선의로 제국을 구한 것이다.
황자가 그들을 극진하게 대우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는 둘에게 황궁에서 가장 호화로운 침실 두 개를 따로따로 제공했다. 어차피 당장 남아도는 것이 방이었으니까.
“우우우우…….”
그리고 때아닌 호사를 누리게 된 둘은 세상 모든 것을 불신하며 각자의 방에 틀어박혔다.
“내일쯤 세상 멸망하지 않으려나…….”
「푸하하하하하하하!」
프레이가 박장대소했다.
“삼촌은 또 그렇게 구경하면서 웃기만 하고…… 삼촌이 제일 나빠요! 그렇게 되면 제가 어떻게 행동할지 다 알고 있었잖아요?! 말렸어야죠!”
「너 그 상태에선 내 말 귓등으로도 안 듣잖아.」
“젠장! 그러고 보니 그랬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자이안이 어찌할 줄을 모르고 몸부림치더니, 기어이 죄 없는 이불을 뻥뻥 걷어차기 시작했다. 그림처럼 완벽한 이불킥이었다.
「프, 프레이, 푸흐흡, 너 너무 애를 괴롭히는, 크흡, 괴롭히는 거 아냐?」
「웃을지 애 위로할지 하나만 해라.」
「아하하하하하하! 그냥 웃을래! 이걸 어떻게 참아!」
믿었던 아르스마저 침대 위에서 뒹굴며 웃기 시작했다. 자이안은 이대로 물벼룩이 되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좋아. 그럼 저 녀석도 충분히 괴롭혔으니…… 슬슬 그걸 하자.」
「응? 그거라니?」
「음.」
팔짱을 낀 프레이가 엄숙하게 선고했다.
「지금부터 제1회 ‘자이안 님 최고 명언 선발대회’를 시작한다.」
“하지 마요 그딴 거!”
자이안이 멘탈을 추스르고 방을 나온 것은 그로부터 꼬박 이틀이 더 지난 뒤였다.
“아, 자이안. 좋은 아침!”
궁에 머무른 지 나흘째, 이른 아침. 간신히 이불 속에서 벗어나 방 밖으로 나온 자이안의 맞은편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바로 맞은편 방에서 머물던 유리아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유리아. 유리아는 의외로 멀쩡해 보…… 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녀의 태도에 생각 없이 말을 꺼낸 자이안은 급히 뒷말을 주워 삼켰다. 얼핏 봐선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유리아의 귀밑이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새빨갰다.
똑같이 부끄러운 흑역사를 새기고 말았음에도 자이안을 배려해 태연한 척 노력하는 것이다.
“아, 하하하하. 오, 오늘 좀 덥네! 그렇지?”
“그, 그러네요! 여름이라 그런지 아침부터 좀 덥네요! 하하, 하…….”
대화가 제대로 이어질 리가 없었다. 서로 어설프게 상대의 눈치를 살피며, 둘은 거의 동시에 마음속으로 한 가지를 굳게 결심했다.
‘지난 일은 없었던 걸로 치고 앞으로 말도 꺼내지 말아야지.’
‘그날 밤 일은 없었던 거야. 서로를 위해서라도 영영 가슴 속에 묻어두자.’
두 사람의 유대감이 더욱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그, 그럼 난 나가서 잠깐 바람이라도 쐬고 올게!”
결국 부끄러움을 버티지 못한 유리아가 한 발 먼저 도망쳤다. 미처 붙잡을 새도 없이 빠르게 멀어지는 등을 멍하니 바라보던 자이안은 가슴 깊이 감동했다.
앞으로도 유리아와 함께라면 그 어떤 흑역사라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이안 님. 몸은 좀 괜찮아지셨는지요?”
이어서 찾아온 이는 소아레스였다. 황실에 봉사하는 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고급스러운 시녀복에, 조금의 흐트러짐도 찾아볼 수 없는 곧은 발걸음이었다.
자이안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나눴다.
지난 나흘간 자이안과 유리아는 격렬한 전투의 피로로 지쳐 쓰러진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리 그래도 부끄러운 기억 때문에 진정될 때까지 방에 틀어박힐 거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유리아 님은 안에 계십니까?”
“유리아도 많이 괜찮아진 것 같아요. 조금 전에 바람 좀 쐬겠다면서 산책하러 나갔어요.”
“두 분 모두 큰 탈 없이 회복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안도하듯 가슴을 누르며 소아레스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꾸밈없는 순수한 표정. 자이안은 조금 놀라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소아레스는, 지금까지 자이안이 알고 있던 것보다 더 순수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지난날의 가혹한 환경이 그녀에게 차갑고 딱딱한 태도와 경계심을 요구했을 뿐.
“전하께서 두 분을 찾으십니다.”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나요?”
자연스럽게 나온 그 물음에 소아레스는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황자가 그들의 손을 빌릴 리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 둘은 귀빈이며 영웅이다.
“오랜만에 아침이라도 같이 먹자고 하시더군요.”
동시에 짧은 시간이지만 등을 맞대고 함께 싸운 친우이기도 했다.
* * *
“키야아아아아! 아침부터 마시는 증류주의 역시 맛은 각별하다니까.”
황자와의 조찬은 자이안과 유리아가 상상하던 것과는 한참 동떨어진 것이었다.
집무용 책상을 가득 메운 걸로도 모자라 바닥까지 점거한, 사람 키보다도 높이 쌓인 서류 더미들. 그 한 가운데에 간신히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테이블에는 증류주 한 병과 데운 마유(馬乳) 두 잔, 야채와 고기를 섞은 간단한 구이 요리에 큼직한 미트파이가 놓여 있었다.
바위섬이나 제국 여행 도중 먹던 것보다야 낫지만, 어쨌든 황궁에서 내놓을 만한 음식은 아니다.
“또 증류주에요? 좋은 술 좀 드시지.”
물론 자이안과 유리아는 그런 사소한 일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흥. 술에 좋고 말고가 어디 있냐. 그냥 자기가 맛있으면 되지. 난 증류주가 제일 잘 맞아.”
한 번에 절반을 넘게 비운 황자가 탁, 소리 나게 증류주 병을 내려놓았다. 말끔한 정복에 칠색조의 깃털이 장식된 모자. 자이안의 오래된 기억 속에 남아 있던, ‘황자’로서의 클라비수스의 모습이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인상에 낯설게 느껴질 법도 하지만, 그 차림은 놀라울 정도로 그와 잘 어울렸다.
“다음 목적지가 보석탑이라고 했던가?”
둘이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을 기준으로 북쪽에 위치한 마법사들의 나라, 보석탑. 그리고 그보다도 더 북쪽에 존재하며 대륙 면적의 1/10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세계수의 숲.
현재로서는 이 두 곳이 최종적인 목적지였다.
“아무 연고도 없는 보통 사람이 보석탑에 들어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마법이란 독점해야만 하는 비술이니까요.”
보석탑은 대륙 전체로 봐도 이질적인 나라였다. 엄밀히 말하면 그곳을 나라라고 불러야 할지도 애매하다.
진정한 의미의 보석탑은 우뚝 솟은 거대한 탑 하나뿐이다. 보석탑 주변의 마을들은 탑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다.
탑의 주인인 마법사들이 그들을 어느 정도 통제하고 관리하고는 있었으나, 그것은 지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연구를 방해하지 않기 위한 예방선에 가까웠다.
근처의 마을에 들어가는 것 정도는 특별한 허가가 필요 없다. 그러나 그 중심, 진짜 탑은 예외다. 인정받은 마법사, 혹은 다른 수단으로 허가를 받은 이들만이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뭐…… 일단은 도착한 다음에 생각해봐야겠죠. 이래봬도 밀입국은 나름 특기거든요.”
“……넌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냐?”
실없는 농담에 피식 웃은 황자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책상 근처 서류의 산을 조심스럽게 뒤적이더니, 몇 장인가를 살살 빼내고는 다시 돌아와 둘에게 내밀었다.
“소개장이다. 내가 직접 쓰고 옥새도 찍었지.”
“예?”
“제아무리 고집 센 탑골방 늙은이들이라도 제국의 황자…… 아니, 이제는 황제로군. 황제가 쓴 소개장을 무시하지는 못할 거다. 나쟈가 제국을 지배하던 시기에도 보석탑만은 우리와 꾸준히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그 말씀은…….”
자이안은 망연히 황자가 내민 소개장을 받아들었다. 가장 처음 든 생각은 이런 커다란 호의를 받을 수는 없다는 거절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뒤따랐다. 애초에 그의 눈을 보면 거절한다고 그렇구나 하며 물러날 것 같지도 않았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자이안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는 히죽 웃었다.
“그래. 지금 궁이 비록 이런 꼴이지만, 최대한 빨리 인력을 추슬러서 대관식을 올릴 생각이다. 사람도 뭣도 말라붙을 것 같은 힘든 상황이지만, 바로 그런 상황에 제대로 된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문제니까.”
그를 제외한 다른 황족은 모두 목숨을 잃은 상태. 반면 지방 귀족들은 나름 온전히 힘을 유지하고 있다. 나쟈가 먼 지방까지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탓이다.
누군가 하루라도 빨리 고삐를 잡지 않으면, 세뇌에서 벗어나 지난날의 제국의 실태를 냉정하게 볼 수 있게 된 귀족들이 무슨 짓을 터뜨릴지 몰랐다.
“그것 말고도 해결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지만…… 뭐, 너희들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 언제쯤 떠날 생각이냐?”
“채비를 끝내는 대로 바로 출발할까 합니다. 이르면 내일 정도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사실 지금 당장 떠나도 상관이 없었다. 애초에 짐이랄 게 별로 없으니. 그래도 최소 하루 정도는 서로 이별을 받아들이고 언젠가 다시 만날 약속을 나눌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런가. 그럼…… 소아레스.”
“예, 전하.”
문이 열리고 소아레스가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자이안과 유리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너희만 괜찮다면 소아레스를 동행시키고 싶은데, 어떠냐?”
“예?”
자이안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무 갑작스러운 얘기였다. 물론 동료가 늘어난다는 건 환영할 일이다. 다만…….
“전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괜찮다. 소아레스와는 이미 말을 마쳤다. 물론 너희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참고로 이건 소아레스가 먼저 꺼낸 얘기다.”
그 말은 의외였다. 소아레스를 바라보니, 정작 그녀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황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 쓸데없는 말씀은 하지 않기로 하셨지 않습니까?”
“이게 왜 쓸데없는 말이냐?”
티격태격하는 둘을 바라보던 자이안은 거절하고자 입을 열려 했다. 둘의 관계는, 함께 온갖 사선을 넘으며 이어진 그 유대는 자신처럼 무관한 이가 끼어들어 마음대로 끊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자이안 님, 유리아 님.”
그 순간 소아레스가 말했다.
“두 분의 여정에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안 되겠습니까?”
마치 자이안의 마음속을 읽기라도 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거절의 말이 턱 끝까지 올라와 있던 자이안은 어색하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황자는 뭐가 재밌는지 그런 둘을 싱글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안 되는 건…… 아닙니다.”
결국 자이안의 입에서 거절의 말이 나오는 일은 끝까지 없었다.
* * *
다음 날, 황궁 정문 앞. 마차 한 대가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잘 해줬다, 소아레스.”
직접 마중을 나온 황자가 자이안 일행과 함께 채비하는 소아레스에게 작게 말했다. 잠시 행동을 멈춘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저도 전하와 같은 심정이었으니까요.”
“그랬나. 자이안을 잘 부탁한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도 자이안의 여정에 동참하고 싶었다. 한 단어로 딱 집어 말할 수는 없는 복잡한 감정의 발로였다. 그러나 황자는 자신의 역할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제국의 그 누구보다도 낮은 위치에서 죽을 때까지 제국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전하, 이렇게 마차까지 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별거 아니다. 어차피 궁에 남아돌던 싸구려 마차일 뿐인데 뭘.”
황자는 짐짓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돌아온 자이안의 대답은 환한 미소였다. 그 순진무구한 모습에 결국 황자도 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선의로 가득 찬 이 순수한 소년이, 아무 상관도 없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싸움에 뛰어든 이 착해빠진 아이가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여행했으면 했다.
부디 어디 다치는 데 없이 여정을 이어가 목적을 이뤘으면 했다.
사실은 더 많은 걸 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이안의 성격을 생각하면 한사코 거절할 것이 뻔했다. 추리고 추려 선택한 것이 튼튼한 마차, 1년 정도는 거뜬히 버틸 수 있는 여행용 물자와 여비였다.
“다치지 말고, 조금 강하다고 아무 일에나 무모하게 뛰어들지 마라. 먹을 것도 제대로 좀 챙겨 먹고. 각성자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신체에서 나오고, 건강한 신체는 건강한 식사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그리고…….”
문득, 황자의 얘기를 듣고 있던 자이안은 꼭 아버지의 훈계를 듣는 기분을 느꼈다. 정작 알레프 가를 떠나던 날에는 백작 역시 바빠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지만.
아마 그날 백작이 바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었더라면 분명 황자와 비슷한 말을 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미소가 새었다.
“그리고 언젠가 네 모든 목적을 모두 이루고, 그 긴 여정을 끝마치는 날. 그날이 오면 마음 편히 제국에 놀러 와다오. 나는 언제가 됐건 너를 환대하겠다.”
자이안은 말없이, 그러나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이미 마차는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마부석에는 소아레스가 앉아 있었고 유리아는 어쩐지 감격에 겨운 얼굴로 자이안과 황자의 대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 보겠습니다, 전하. ……언젠가 전하를 폐하라고 부르게 될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자이안이 마차에 올라탔다. 소아레스은 그와 황자를 한 차례 바라보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시간을 들일 필요는 없었다.
둘은 모든 인사를 마쳤다. 다음에 대화를 나누는 건 다시 만나는 날이 될 것이다.
황자는 모자를 벗어 가슴 앞에 가져다 대고 모든 경의를 담아 경례했다. 황자, 그리고 곧 황제가 될 이의 입장에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마차가 북쪽을 향해 멀어졌다.
* * *
………….
…….
….
먼지 쌓인 낡은 석실.
불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시기’는 간신히 손에 넣은 아주 여리고 미약한 힘을 빤히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드디어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