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마족 토벌 작전 - 전면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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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마족 토벌 작전 - 전면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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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마족 토벌 작전 - 전면전 (4)
2022.11.19.
그것은 예상과 전혀 다른, 엉뚱한 곳에 있었다. 지하실 한 구석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장소였고, 주변에 마인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았다.
대신 소아레스와 유리아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견고한 결계가 펼쳐져 있었다.
덕분에 제법 오랜 시간을 헤매야 했다. 그나마도 소아레스가 없었더라면 영영 찾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이 결계? 같은 게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진 덕분에 겨우 파괴했어. 핵은 그 안에 있었고.
아마 자이안과 아르스가 음욕의 본체를 상대하며 꾸준히 힘을 소모시킨 덕분이었으리라. 그 추측을 유리아에게 전하며 자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유리아네요. 지금 막 음욕의 몸이 1/3 정도 소멸했어요. 아무래도 핵이 방금 찾은 것 말고 2개 더 있는 것 같은데…….
-방금 전 음욕의 몸이 소멸하는 현상을 분석해서 대략적인 위치는 잡았어.
아르스가 자연스럽게 통신에 끼어들었다.
-두 번째 핵은 지금 너희의 위치를 기준으로 서쪽 94미터. 세 번째 핵은 두 번째 핵을 기준으로 위쪽 23미터, 남동쪽 28미터야.
함께 통신을 듣고 있던 소아레스는 곧장 남은 핵의 위치를 파악하고는 즉시 몸을 돌렸다. 유리아도 당황하며 그녀를 뒤따랐다.
“위치를 찾는 건 제게 맡기시지요. 유리아 님은 유리아 님이 잘 하는 일을 하시면 됩니다.”
“응, 그러네.”
그 뒤는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위기를 느낀 음욕의 무의식에 조종당해 몰려드는 마인을 쉴 새 없이 베어 넘기며 둘은 황궁 내를 바쁘게 가로질렀다.
남은 두 개의 핵을 모두 파괴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기껏해야 10분 남짓이었다.
“하아, 하아…….”
얼굴에 흥건하게 맺힌 땀을 닦으며 유리아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소아레스는 정갈한 자세로 서 있기는 했으나, 그녀 역시 체력은 이미 바닥이었다.
창고로 쓰이는 좁은 방 안, 문밖 복도에 이르기까지 마인들의 시체가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즐비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두 사람의 옷도 여기저기 찢어지고 더럽혀져 엉망진창이었다. 그래도 둘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자이안. 핵을 세 개 모두 파괴했어.
곧 자이안의 대답이 들렸다.
-잘했어요, 유리아. 역시 제가 기대했던 대로였어요.
이 길고 고된 밤 동안 유리아가 무엇보다도 가장 듣고 싶은 말이었다.
긴장이 탁 풀렸다. 애초에 유리아의 몸은 한참 전에 한계를 넘은 상태였다. 다음 순간 유리아의 시야가 누가 확 잡아당기는 것처럼 쭉 멀어지고, 의식이 까마득한 어둠에 휩싸였다.
* * *
신나게 마법을 퍼부어대던 프레이는 문득 머나먼 동쪽 하늘이 태양의 빛으로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제도에 들어온 게 대충 2시…… 아니, 3시 정도였던가? 짧게 잡아도 두세 시간 정도는 지났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현역 각성자 시절에는 현장에서 일주일 가까이 철야로 뛰는 일도 빈번했으나, 벌써 몇 년 전 얘기다.
피로를 느낄 정도는 아니지만, 어딘가 묘하게 나른한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아무런 제한 없이 전력을 발휘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거의 다 정리됐구만.”
프레이는 흘깃 옆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로 정면을 노려보며, 황자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작은 행동 하나에도 식은땀이 흐를 만큼 온 의식을 집중해야만 했다. 아주 잠깐이라도 방심했다간 내면에서 속삭이는 사나운 목소리가 의식을 지배해버릴 것만 같았다.
‘정말로 끝까지 버텼군.’
황자의 의지를 얕본 것은 아니다. 다만, 이미 마인화 단계에 들어선 사람이 정신력만으로 변이를 억누른다는 것 자체가 처음 보는 현상이었다. 감탄 반, 놀라움 반이 지금 프레이의 심정이었다.
“조금만 더 버텨. 마물은 거의 다 정리됐고, 나쟈인지 뭔지 하는 마족도 슬슬 끝장날 무렵일 거다.”
“난…… 괜찮다고, 하지 않았나. 그보다, 집중해. 소수이지만 마물이 남았다.”
“저 정도는 그냥 노려보기만 해도 정리된다고. 밤새 고생했으니 좀 쉬어.”
“무책임한 소리 집어치워. 그러다 누구 한 명이라도 사상자가 나오기라도 하면 난 네놈을 평생 용서하지 않을 거다. 다음, 남쪽이다. 놀지 말고 얼른 일해!”
사나운 으름장에 헛웃음을 터뜨리면서도 프레이는 얌전히 그의 지휘에 따랐다. 새벽 동안 보여준 그의 지휘 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프레이 역시 기껏해야 머릿수만 많을 뿐인 마물들을 상대로 실수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마물들 중 단 한 마리도 문자 그대로 성벽에 다가오지조차 못한 것은 전적으로 황자의 지휘 능력 덕분이었다.
덕분에 방위전에 참전한 지원자들은 동이 틀 때까지 성벽 안쪽에 조잡하게 만들어놓은 방책 뒤에서 뜬 눈으로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런 녀석이 자이안 동료로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 전황을 넓게 보고 사령탑 역할을 할 만한 브레인이랄 게 없으니.’
황자에게 제국을 지탱해야 한다는 사정이 없었더라면 프레이는 적극적으로 그를 회유했을 것이다. 그만큼 우수한 인재였다.
아쉬운 마음을 속으로 삭이며, 프레이는 햇살을 역광으로 받아 거대하게 꿈틀거리는 황궁을 바라보았다.
‘여긴 다 정리됐고. 저쪽은 얼마나 남았으려나.’
* * *
“아아…… 으으으…….”
어눌한 신음이 바닥에서 들려왔다. 썩은 진흙처럼 질척거리는 검은 액체가 자이안의 발치까지 고여 있었다. 그는 혹시라도 닿지 않도록 몇 걸음 더 물러났다.
음욕은 그 검은 웅덩이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걸 ‘음욕’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망설여졌다.
황궁 곳곳에 숨긴 세 개의 핵이 모두 파괴된 지금, 음욕은 흉측하게 찌그러진, 이목구비가 붙은 머리통만 한 크기의 살덩어리에 불과했다.
“켈록, 켈록…… 아, 안 돼, 이런 건…… 케헥…….”
한 번 기침할 때마다 시커먼 액체가 줄줄 흘러나왔다. 제대로 감기지도 않는 두 눈에서도 마찬가지로 시커먼 액체가 눈물처럼 쏟아졌다. 자이안은 복잡한 기분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첫 번째 핵을 파괴하고 몸의 1/3이 소멸한 음욕이 힘없이 자리에 쓰러진 순간, 그녀의 온몸에서 시커먼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지금껏 그녀가 양식으로 삼아온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을 모조리 토해내는 것처럼.
바닥에 흘러넘치는 검은 액체를 피하고 접근할 방법이 없었다. 아르스도 액체에는 닿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경고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검은 액체를 쏟아내는 음욕을 눈앞에 두고 기묘한 대치 상태가 벌어졌다.
그러는 사이 유리아와 소아레스가 순조롭게 나머지 두 개의 핵을 파괴했다. 마침내 남은 모습이 이 추악한 살덩어리였다.
아직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굳이 마무리를 할 필요도 없을 만큼 나약하고 처량해 보였다.
“자이안. 방심하지 마. 동정하지도 마.”
“동정하진 않았습니다. 방심은…….”
…했을지도 모른다. 자이안은 눈을 지그시 감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 순간 타앙! 날카로운 발포음이 울렸다. 아르스가 말을 끝내자마자 겨누고 있던 화기 중 하나를 망설임 없이 쏜 것이다.
“이런.”
결과를 확인한 아르스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곤혹스러워했다. 대구경 철갑탄이 살덩어리를 찢어발기기 직전, 바닥에서 솟구친 검은 액체가 탄환을 집어삼키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가라앉았다.
몇 번 더 총격을 시도한 뒤 아르스는 희미하게 인상을 썼다.
“그냥 둬도 알아서 힘이 빠져 죽을 것 같기는 한데…….”
아르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바닥에 고여 있던 검은 액체가 살덩어리만 남은 음욕에게 다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자이안은 직감했다. 음욕이 저 액체를 모두 흡수한 바로 그 짧은 순간이야말로 적의 숨통을 끊을 최적의 기회임을.
“후우…….”
자세를 낮춘 자이안이 칼끝을 똑바로 겨눴다.
‘최단거리를 최고속도로 돌파하는 찌르기.’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타이밍을 기다렸다.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자이안의 눈이 일순간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의 몸이 화살처럼 공간을 가로질렀다. 지나친 속도에 소리마저 뒤처졌다. 고요한 찌르기가 음욕의 몸을 꿰뚫었다―고 확신한 그 순간.
카앙!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목표를 잃은 칼날이 돌바닥에 깊숙이 꽂혔다.
“…….”
자이안은 사납게 인상을 쓰며 아무것도 남지 않고 깨끗해진 바닥을 노려보았다. 아마도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 짜낸 것이리라. 마족의 냄새가 황궁을 벗어나 비틀비틀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적이 도망쳤다.
* * *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어. 이래선 안 돼.’
음욕에게는 이미 제대로 된 이성이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 그녀를 움직이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그래서 무엇보다도 강한 생존본능 뿐이었다.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이런 데서 죽을 순 없어. 죽고 싶지 않아……!’
그나마 다행인 점은, 마지막 순간 음욕이 본능적으로 빨아들인 혼연의 힘이 그녀의 잃어버린 육신을 빠른 속도로 대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재생이라기보다는 재탄생에 가까운 현상이었다. 그렇게 되살아난 음욕을 과연 이전과 같은 존재라고 정의해야 할지는 어려운 문제였으나, 본능만이 남은 그녀에게 그런 복잡한 일은 아무래도 좋았다.
“하.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재수 옴 붙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구만.”
그녀의 위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의 그녀와 비교하면 반딧불과 태양의 차이만큼이나 강대한 힘을 가진 존재가 근처에 있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꿈틀거리며 그 자리에서 도망치려 애썼다.
“어딜 도망가려고?”
프레이에게는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속도였다. 그의 손끝에서 뻗어나간 번개의 사슬이 어설프게 재생이 이뤄져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역겨운 형태가 된 살덩어리를 단단히 구속했다.
그대로 음욕을 끌고 지상으로 내려간 프레이가 도착한 곳은 황자의 앞이었다.
“그 역겹게 생긴 생물…… 생물? 그건 대체 뭐냐? 생물이긴 한 거냐?”
“네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녀석이지.”
철퍽. 프레이가 사슬로 묶인 살덩이를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던졌다. 황자는 잠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조금 뒤에야 말뜻을 알아듣고 눈을 부릅떴다.
“이런, 이런 X발. 이게 나쟈…… 그 마녀라고? 부탁이다. 내가 잘못 알아들은 거라고 해줘.”
“역시 총명한 황자님답게 이해력이 좋구만.”
“이런 X발!”
다시 한번 거친 욕설을 터뜨린 황자가 부들부들 떨며 음욕을 노려보았다.
40년 동안 제국을 제멋대로 주무르고, 온갖 잔악한 수단으로 추정 수십만 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만들어낸 그 마족의 정체가 이런 것이었단 말인가? 분노가 삽시간에 임계점을 넘어, 화가 아니라 허탈함이 밀려왔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마족의 정체가 이런 건 아니다. 이건 그러니까, 천적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도마뱀이 고육지책으로 잘라버린 꼬리 같은 거지. 자이안 이 녀석, 마지막 순간에 와서 방심한 모양이구만. 아르스도 그래. 자이안 바로 옆에 붙어있었으면서. 현역에서 은퇴한 지 얼마나 됐다고, 자식이 빠져가지고.”
“그래. 아무튼 이게 나쟈가 맞다 이거지.”
허리에 맨, 실전용이라기보다는 호신용에 가까운 장검을 뽑아 들며 황자가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프레이는 어깨를 으쓱여 대답을 대신하고는 얌전히 몇 걸음 물러났다.
지금까지 고생했을 황자를 위한 나름 소소한 선물이었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음욕을 노려보던 황자가 칼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직.
“다 끝났구만….”
심드렁하게 중얼거린 프레이가 문득 고개를 들고 멀리 떨어진 북쪽 하늘을 빤히 바라보았다. 칼 한 번 휘둘렀을 뿐인데 황자는 온몸의 기운이 쭉 빠져나간 것처럼 기진맥진했다.
시커멓게 변색하기 시작한 살덩어리를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뜬금없이 북쪽을 노려보는 프레이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했다.
“그쪽에 뭐가 있어?”
“……아무것도 아냐. 내가 뭘 좀 착각한 모양이다.”
프레이는 태연하게 대꾸하고는 이번에는 동쪽을 바라보았다. 완연히 밝아오기 시작한 하늘이 제도를 비추고 있었다.
“돌아가자. 제도를 정리해야지. 황자님,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