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마족 토벌 작전 - 전면전 (3) (46/210)


46화 마족 토벌 작전 - 전면전 (3)
2022.11.18.


황궁 바깥. 아직 혼란스러워하며 거리에 나와 있는 주민들을 상대로 황자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제국의 백성들이여, 들어다오. 나는 클라비수스 데인 가이가우스 융 하덴-프리엔, 이 나라의 5황자다. 또한 그대들과 마찬가지로 제국을 지배하는 마녀 나쟈의 손에 놀아나고 있던 꼭두각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프레이의 음성 증폭 마법이 걸린 목소리는 제도 구석구석까지 빠짐없이 전해졌다. 권위를 갖췄으나 강압은 느껴지지 않는 편안한 목소리에 주민들이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제도에서 살아온 이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나쟈’라는 이름을 모를 수가 없었다. 세뇌가 풀린 지금도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동시에, 세뇌가 풀린 지금 나쟈라는 이름과 그 이름하에 행해지던 온갖 만행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나와 나의 용맹한 동료들은 오래전부터 힘을 모았다. 저 극악무도한 마녀를 쓰러뜨리고 제국에 영광을 되찾기 위해. 다시 한번 대륙 전역에 프리엔의 위명을 드높이기 위해. 그리고 지금, 우리들의 승리가 목전에 이르렀다!”

군중들 사이에서 오오, 하는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소리를 낸 대부분이 황궁에서 근무했거나 지금도 근무하는 이들이었다.

클라비수스의 모습과 목소리, 그의 성격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바로 그 기억이 황자의 말에 신빙성을 더했다.

“터무니없는 선동가 납셨구만. 몸도 성치 않으면서.”

팔짱을 낀 프레이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으나 황자는 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주민들의 혼란을 가라앉히고 사기를 북돋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

지척까지 닥친 마물의 군세를 상대하기 위해 주민들의 협조는 필수적이었다. 마물을 쓰러뜨리는 데 힘을 보태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공황에 빠져 소동을 일으키는 일은 없어야 했다.

“마물의 군세가 지금 제도를 노리고 다가오고 있다. 저 마녀가 최후의 발악으로 불러 모은 것이다. 허나 신민들이여, 걱정하지 마라! 나는 이미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대비를 끝마쳤다. 일기당천의 힘을 가지고 홀로 마물의 군세를 상대하는 위대한 마법사, 프레이 알코스 경이 지금 성벽 바깥에서 적을 요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

듣고 있던 프레이는 잘도 말하는구만, 하는 마음이었다. 사람을 속이려면 99%의 거짓에 1%의 진실을 섞어야 한다고들 흔히 말하지만, 이 정도 언변이면 굳이 진실 따위 섞지 않아도 누구라도 속아 넘어가겠다 싶었다.

실제로 프레이는 성벽 밖에 있지도 않았다. 마안의 힘이 닿는 거리가 곧 그의 마법이 닿는 거리다.

적이 넓은 도시를 목표로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다면, 굳이 밖으로 나가 시야를 제한할 게 아니라 도시 중심에서 사방을 내다보며 요격하는 게 훨씬 편했다.

“이봐, 황자. 슬슬 놈들이 온다. 빠른 놈들은 앞으로 10분 정도면 성벽에 닿을 거다.”

잠시 말을 멈춘 황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마저 주민들을 안심시키고 방위전에 참전할 지원자들을 구했다.

실제로 참전자들이 마물과 마주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들이 제 손으로 제도를 지켰다는 성취감을 주고 이를 통해 손쉽게 민심을 다스릴 수 있으리란 것이 황자의 설명이었다.

프레이는 생각해본 적 없는 관점이었으나 얼핏 맞는 말인 것도 같았다.

“그 부분은 네게 맡기지. 그쪽에 신경이 쏠려서 지휘를 건성으로 하지는 마라.”

“걱정…… 큭. 걱정할 것 없다. 그 정도도 대처하지 못할 만큼 못나지는 않았으니.”

“……괜찮냐?”

이를 악문 황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이는 쯧, 하고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판단력이 흐려지고 두통과 현기증이 찾아오며 몸 일부에 마물의 신체 조직이 돋아나는, 마인화 초기 단계. 현재 황자가 처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프레이가 지금껏 보고들은 마인화에 비해 진행 속도가 너무 빨랐다. 코르니카의 벤야 알즈레드와 비슷한 증상인 것으로 보아, 마족에 의한 특수한 마인화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황자가 냉정히 이성을 유지하고 겉모습도 멀쩡한 이유는, 물론 제도 곳곳에 설치한 아티팩트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가 오로지 정신력으로 마인화를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인화 자체가 드문 현상인지라 그게 보편적인 건지, 아니면 황자가 무슨 특별한 자질을 가진 건지는 잘 모르겠다.

‘딱히 알고 싶지도 않고 말이야.’

프레이가 황자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그가 할 일은 몰려오는 멍청한 불나방들을 쓸어버리고, 황자가 더 버티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숨통을 끊는 것뿐이었다.

“거의 다 왔구만.”

발밑에 반투명한 발판을 만든 프레이가 황자와 함께 상공으로 높이 날아올랐다. 프레이는 아바타 상태에서는 힘의 효율을 생각해 파괴마법이 아닌 마법을 되도록 사용하지 않지만, 일시적으로나마 제한이 해제된 지금은 거리낄 필요가 없었다.

황자에게 아낌없이 시력 강화의 마법을 걸고, 내친김에 자신에게 부유까지 걸어 한층 더 높이 떠올랐다.

“황자, 지휘를 내려 봐라. 어디부터 쓸어볼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황자가 한 차례 사방을 살폈다. 이윽고 그가 남쪽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남쪽, 좌측 중앙, 1000.”

“남쪽 왼쪽 가운데 대열 1천 마리란 말이지. 좋아.”

방향과 거리를 가늠한 프레이가 장갑을 낀 손을 뻗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손끝에서 스파크가 번뜩이고, 다음 순간 하늘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눈을 멀게 할 것만 같은 섬광에 황자는 급히 눈을 감았다.

뒤이어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거센 폭풍이 온몸을 사정없이 때렸다. 투명한 발판 위에 엎드린 채 필사적으로 버티던 황자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겨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오, 이런.”

프레이의 맥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황자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성벽 너머 남쪽 일면이 문자 그대로 깨끗했다.

녹아내린 지면이 부글거리며 아지랑이를 피워 올릴 뿐, 풀과 나무도, 수천에 달하는 마물의 무리도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단 한 번의 마법에 잔해조차 남기지 못하고 모조리 사라진 것이다.

“그냥 살짝 힘 좀 담을 생각이었는데…… 오랜만이라 화력 조절이 어렵네. 이거 어쩌냐?”

그 무시무시한 광경을 만들어낸 프레이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엉뚱한 소리나 하고 있었다. 멍청히 그를 바라보던 황자는 터무니없이 놀란 나머지 오히려 냉정함을 되찾았다.

이성이 제 할 일을 하자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적의 규모를 다시 가늠하고, 아군의 화력을 재차 계산하고, 텅 비어있던 남쪽에서 다시 마물들이 몰려드는 것을 확인하며 황자는 바닥부터 전략을 새로 짜 올렸다.

“지금과 같은 마법을 앞으로 얼마나 더 쓸 수 있지?”

“글쎄다. 세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그러면…… 서쪽, 북쪽, 동쪽 순서로, 지금과 비슷한 공격을 각각 30초 간격으로. 그 뒤는 지시를 내릴 때까지 대기. 그리고 내게 목소리를 멀리 퍼뜨리는 마법을 다시 걸어다오. 놀란 신민들을 설득해야겠어.”

“좋아, 좋아. 분부대로 합죠.”

황자에게 마법을 건 프레이가 서쪽을 향해 재차 공격 마법을 펼쳤다. 어둑한 서쪽 하늘을 반으로 가르듯 빛이 짓쳐들더니 이윽고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곧 마법진이 완성되었고, 프레이가 가볍게 검지를 내밀었다가 아래로 훅 꺾었다. 마법진이 한 차례 환하게 빛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지옥불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적을 재로 만들기 전까지 결코 꺼지지 않는 겁화가 남쪽 일면을 뒤덮었다. 곳곳에서 급격한 상승기류로 거센 돌풍이 불어닥치고, 불꽃의 회오리에 휘말린 마물들이 먼지처럼 사방으로 흩날렸다.

세계의 멸망이 눈 앞에 펼쳐진 듯했다. 한 차례 냉정을 되찾았음에도 황자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쯧. 다른 마법을 쓸 걸 그랬나. 다 태우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는데 이거.”

프레이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린 황자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성벽 너머에서 벌어지는 미증유의 재앙에 공포에 떠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편으론 황자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은 심정이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확신에 안도했다. 자이안과 유리아, 프레이와 아르스, 그들 모두가 자신의 아군이었다.

“신민들은 들어라!”

황자는 힘이 깃든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 * *

분홍빛 안개로 이루어진 거인이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둘렀다. 일격 일격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고, 인간의 몸 따위는 흔적도 없이 분쇄해 버릴 만큼 강력했다.

무엇보다도 성가신 것은 거인의 몸 자체가 자이안의 정신력으로도 방어할 수 없는 강한 정신간섭 능력을 발산한다는 사실이었다.

종이 한 장 차이의 간격을 오인하는 것만으로도 승패가 갈리는 치열한 사투에서, 끊임없이 적을 매료시키는 그 힘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뭐야?! 대체 뭐냐고!”

그러니까, 그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다면 그리됐을 거라는 말이다.

“왜 매료당하지 않는 거야?! 단순한 인간 주제에!”

거인의 중심부, 짙은 안개로 보호받고 있는 안쪽에서 음욕의 표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자이안은 한 귀로 듣고 흘리며 공방에 집중했다.

-좌측 쇄골. 1.2초 뒤에 약점이 될 거야.

무기질적인 목소리가 통신마법을 통해 들려왔다. 자이안은 바짝 정신을 차리고 아르스의 지시에 맞춰 움직였다. 타이밍을 맞춰 약점을 벤 순간, 지금까지와는 다른, 실체를 가진 무언가를 가르는 감각이 전해졌다.

“아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거인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자이안은 다시 수세로 돌아섰다. 어차피 특정한 타이밍, 특정한 위치가 아니면 거인을 공격해도 아무 의미가 없다.

‘아르스 씨가 없었더라면…….’

음욕의 주 무기라 할 수 있는 정신간섭 능력이 봉인된 것도, 실체가 없는 거인의 약점을 정확히 공격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아르스가 즉석에서 만든 아티팩트 덕분이었다.

만일 자이안 혼자서 음욕을 상대했더라면 이미 한참 전에 매료에 농락당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좋아, 다 만들었다. 자이안, 공격 준비해.

자이안이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인 순간 공중에서 선회하던 아르스가 거인의 정수리 위쪽에 멈췄다. 백팩이 열리고 눈부시게 빛나는 쇠사슬 형태의 아티팩트가 거미줄처럼 펼쳐지더니 거인의 전신을 옭아맸다.

거인의 몸이 흐릿해지고, 그 안에 숨어있던 음욕의 모습이 보였다. 전투 중 끊임없이 데이터를 수집, 분석한 아르스가 마침내 카운터 아티팩트를 만들어낸 것이다.

“하앗!”

자이안이 음욕을 향해 뛰어올랐다. 오로라를 휘감은 스펙트럼의 모습이 장검으로 변했다. 아티팩트의 힘으로 구속돼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게 된 음욕이 곤혹과 공포, 증오로 얼룩진 얼굴을 자이안에게 향했다.

그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자이안은 가차 없이 음욕을 사선으로 양단했다.

“꺄아아악! 아파, 아프다고오오……!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 거야?! 너희들이 대체 뭔데! 무슨 권리로!”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음욕이 원망스럽게 말했다. 어린아이의 칭얼거림을 듣는 듯한 기분에 자이안은 기가 찼다.

“하,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넌 그동안 무슨 권리로 이 나라를 지배하고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린 거냐?”

“권리?! 그런 거 알 게 뭐야! 우리가 인간과 중간계를 가지고 노는 게 뭐가 이상해! 제대로 빚어지지도 못한 덜떨어진 피조물 주제에!”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았다. 자이안은 대화 자체가 무의미했음을 깨닫고 완전히 숨통을 끊기 위해 음욕에게 다가갔다.

“자이안! 다가가지 마!”

그 순간 아르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자이안은 급히 뒤로 뛰어 거리를 벌렸다. 갑작스럽게 음욕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시커먼 기류가 그녀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으흑, 아하하, 으흐흐흐…… 흐히하하하하!”

비틀비틀 일어난 음욕이 검은 기류에 휘감긴 채 실성한 듯 웃었다. 예리해진 감각이 쉴 새 없이 경종을 울렸다. 마력도 아니고 MP도 아닌, 지금껏 겪은 적 없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힘이었다.

마치 바닥없는 늪처럼 질척이는, 뭐라 형용할 수 없이 불길한 힘.

“이건…… 응? 으응? 이런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이게 무슨 에너지지?”

검은 기류를 분석하고자 시도한 아르스가 연거푸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소용돌이가 잦아들었다. 음욕이 그 불길한 힘을 모조리 빨아들인 것이다.

“하아…….”

낮게 탄식을 터뜨린 음욕이 눈을 떴다. 눈이 마주친 순간 자이안은 섬뜩함에 숨을 삼켰다. 보석처럼 영롱하던, 그래서 보는 이를 순식간에 매료시키던 두 눈이 흰자위까지 전부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두 손을 들어 올리자, 손톱 밑 틈새로부터 썩은 진흙 같은 새까만 무언가가 후두둑 쏟아졌다.

“찬탈자시여.”

음욕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도 조금 전과는 전혀 달랐다. 수백 마리의 벌레가 웅성거리는 것처럼 소름이 끼쳤다.

“내 존재를 당신께 헌상하오니, 저 미천하고 처량한 이들에게……!”

퍼엉! 음욕의 몸 일부분이 파열음을 내며 터졌다. 말을 멈춘 음욕이 경악에 찬 눈으로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자이안!

유리아의 통신이 들려왔다.

-음욕의…… 핵? 비슷한 걸 하나 찾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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