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마족 토벌 작전 - 전면전 (2) (45/210)


45화 마족 토벌 작전 - 전면전 (2)
2022.11.17.


음욕은 아슬아슬한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하고 거리를 벌리는 유리아를 보며 짜증스럽게 인상을 썼다.

‘왜 죽지 않는 거지?’

공방이 이어진 지 10분이 넘게 지났다. 기대감에 찼던 것도 잠시, 음욕은 빠르게 질렸다. 그녀가 보고 싶은 것은 어디까지나 도전자가 절망에 차 쓰러지는 모습이지, 벌레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아 시간을 끄는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승산 따위는 없는데.’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눈이었다. 자신의 힘에 압도당하는 것도 아니고, 하물며 투지를 불태우는 것조차 아닌, 그저 담담한 눈.

길을 막는 장애물을 발견하고 어떻게 이를 넘을 수 있을지 냉정하게 계산하는 것 같은 눈.

‘우리를 본떠 빚어졌을 뿐인 열등한 종족이…!’

치밀어오는 짜증을 떨쳐내듯 음욕이 아무렇게나 손을 휘둘렀다. 오감을 완벽하게 속이는 정교한 환상이 유리아를 사방에서 둘러싸며 그녀를 현혹했다.

모든 게 환상이지만, 동시에 모든 게 인간의 나약한 육신 따위는 가볍게 찢어버릴 수 있는 공격이었다.

‘좌측 후방…… 지금.’

유리아의 두 눈이 보랏빛으로 거세게 일렁였다. 유리아는 몸을 틀며 재빠르게 단검을 휘둘렀다. 충격파가 허공을 때리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이 흐트러지며 미세한 틈이 생겼다.

유리아는 바늘구멍 같은 틈새를 파고들며 자리를 벗어났다.

유리아도, 음욕도 자각하지 못했지만,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음욕은 제국 전역에 지배력을 뻗치며 동시에 마물들까지 조종하는 터라 힘이 분산되어 있었고, 만들어내는 환상에도 한계가 있었다. 아직 부족한 유리아의 마안으로도 아슬아슬하게 간파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유리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치명상만을 피하고 있을 뿐 이미 전신이 생채기로 너덜너덜했다. 눈앞의 공격을 피하는 것이 한계이고, 분홍빛 안개 속 어디에 음욕이 숨어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차피 당장은 쓰러뜨릴 방법도 없어. 소아레스가 약점을 찾을 때까지 버티자.’

처음 음욕과 마주했을 때 유리아는 아무런 약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마안의 힘이 부족한 게 아닐까 생각했으나, 곧 프레이와 아르스의 설명을 떠올렸다.

그녀의 마안은 입력에 따라 정해진 결과를 출력하는 지극히 기계적인 구조다. 설령 그녀가 절대 쓰러뜨릴 수 없는 강적과 마주쳐도 마안은 적의 약점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그걸 찌를 수 있느냐 없느냐는 부차적인 문제다.

그렇다면 약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불멸의 존재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음욕과 동격의 마족인 교만을 자이안이 쓰러뜨린 이상, 음욕 역시 죽일 수 있다.

약점이 보이지 않는 건, 말 그대로 약점이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고 애초에 알 필요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약점이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 존재하고, 소아레스가 약점을 찾아 이곳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소아레스의 행동이 늦어 발목이 잡혔더라면 일이 복잡해졌겠지만, 혼자 남으니 마음만은 홀가분했다.

“아까 네가 한 말이 사실이긴 한 모양이구나?”

갑자기 음욕의 목소리가 들렸다. 까마득하게 먼 곳에서 외치는 것도 같고, 동시에 바로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도 같았다. 방향도 거리감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보이지 않는 공격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유리아는 냉정하게 빈틈을 만들어 다시 한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칼끝처럼 날카로워진 청각이 쯧, 하고 작게 혀를 차는 소리를 포착했다.

“아무렴, 교만이 아무리 방심했기로서니 너처럼 나약한 존재한테 죽었을 리가 없겠지.”

“…….”

“후후, 불쌍한 아이. 동료에게는 버림받고, 남은 건 내가 만든 무대 위에서 죽을 때까지 춤추다가 쓰러지는 것뿐이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유리아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귀담아들을 필요도 없는 말이었다. 이간질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인데, 어느 것 하나 사실인 말이 없었다.

그러나 유리아는 음욕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정신을 집중했다.

“원망스럽지 않니? 원망스러울 거야. 스스로를 속이려 하지 말렴. 나는 누구보다도, 너 자신보다도 네 마음을 잘 알고 있단다. 후후후, 그래. 이건 어떠니? 네게 기회를 줄게. 너를 버리고 도망친 동료를…….”

그 순간, 유리아가 움직였다. 망설임 없이 땅을 박차고 번개처럼 안개 속을 가로질렀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칼날이 무언가를 가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안개가 일순간 흐트러지고 경악스러운 표정의 음욕이 모습을 드러냈다.

“찾았다.”

“너, 이……!”

간신히 상황을 파악한 음욕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녀가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유리아가 재차 단검을 휘둘렀다. 칼날과 충격파가 적을 가차 없이 난도질했다.

산산조각 난 음욕의 몸이 피보라를 흩뿌리며 사방으로 날아갔다.

‘베도 벤 것 같지가 않네.’

손을 내려다보며 유리아는 희미하게 인상을 썼다. 생물이 아니라 점토라도 벤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사방에 흩어진 음욕의 몸이 녹아내리듯 사라지더니 안개 속에서 그녀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감히……! 감히 이 몸에 손을 대?! 벌레 같은 게 주제도 모르고!”

음욕이 격노하며 외쳤다. 유리아의 대답은 공격이었다. 설마 말 한마디 없이 또 공격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음욕은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피하지도 못했다. 다시 한번 음욕의 팔이 하늘을 날았다.

“이 망할 년이!”

음욕이 남은 팔을 거칠게 휘둘렀다. 그 순간 유리아의 눈앞에 갑작스럽게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나타났다.

아니, 정면만이 아니었다. 전후좌우, 거기에 머리 위까지. 급하게 사방을 살핀 유리아가 낭패한 기색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큰일 났다. 피할 틈이…….’

쿠웅!

온몸을 뒤흔드는 강렬한 충격에 유리아의 의식이 멀어졌다.

* * *

“쯧.”

음욕은 참지 못하고 크게 혀를 찼다.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었다. 인간을 상대로 몇 번이나 공격을 허용하고, 감정에 휘말려 자기가 정한 규칙을 자기 손으로 깨버리다니.

‘그래. 인정하지.’

가볍게 손을 흔들자, 흐트러져 있던 분홍빛 안개가 몰려와 힘없이 쓰러진 유리아의 몸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눈앞까지 끌어당겨 그 얼굴을 노려보며 음욕은 생각했다.

‘이 인간은 위험해. 놔두면 언젠가는 화를 몰고 온다. 지금 싹을 잘라버려야 해.’

음욕의 손톱이 길고 날카롭게 자라났다. 강철을 종잇장처럼 잘라내는 손톱 끝을 가슴께에 가져다 대고, 그대로 살짝 찌르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다. 그 단순한 행동이 음욕에게는 무엇보다도 굴욕적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구역질나는 기분에 음욕은 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 기분의 이름은 패배감이었다.

“잘했어, 유리아.”

머리 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덕분에 분석이 끝났어. 이야아, 아슬아슬했네에.”

홀을 채운 안개가 갑자기 사방으로 흩어졌다. 태풍 앞에 놓인 지푸라기처럼. 음욕의 움직임이 덜컥 굳었다.

지금이라도 눈앞의 여자를 찔러 죽여야 할까? 아니면 머리 위에서 갑자기 나타난 적의 습격에 대비해야 할까? 찰나의 망설임이 치명적인 빈틈을 낳았다.

“유리아에게서 손 떼, 더러운 마족아.”

천장을 박살 내며 떨어져 내린 자이안이 대검으로 음욕의 정수리를 쪼갰다.

* * *

“아아아아아아악!”

소름끼치는 단말마가 홀을 뒤덮었다. 자이안은 둘로 쪼개진 음욕의 몸을 거칠게 걷어차며 인상을 썼다.

스펙트럼은 그 자체로도 강력하지만, 특히 마족과 마물을 상대로는 비할 데 없는 위력을 발휘하는 유일무이한 무기였다.

과거 나이아가 마계를 떠돌며 수많은 적들을 쓰러뜨리는 와중 일종의 자가 진화를 이뤄낸 것이다. 그 힘은 본래 고통을 느끼지 않는 음욕이 강제적으로 고통을 느낄 정도였다.

“아우, 시끄러워.”

처절한 비명소리에 유리아가 정신을 차렸다. 바닥에 쓰러질 뻔한 그녀가 고양이 같은 유연한 움직임으로 균형을 잡으며 멍청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이안? ……꿈인가?”

“하하. 도와주러 왔어요. 몸은 괜찮아요?”

분홍빛 안개가 다시 홀을 자욱하게 뒤덮었다. 유리아는 반사적으로 경계했으나 두 손이 어느새 텅 비어있다는 사실에 한 차례 놀라고, 주변을 뒤덮은 안개가 더 이상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흐흐흥~ 이 누나가 힘 좀 썼지이.”

공중에서 내려온 아르스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브이 사인을 내밀었다.

“아르스 씨. 더 빨리 만들 수 있었잖아요?”

“어어? 이 누나가 고생고생해서 아티팩트를 만들었는데 우리 자이안은 할 말이 그게 다야?”

“자칫 유리아가 다칠 뻔했어요.”

“그, 그거언…… 아무래도 아바타 상태로는 힘이 제한되어 있다 보니…… 제, 제게 조금만 더 시간과 예산을 주시면…….”

“안전장치는 조금 전에 해제했어요. 시간과 예산이 부족할 일은 없을 겁니다.”

“어? 오오? 진짜다!”

아르스가 맨 백팩 윗부분에 안테나를 닮은 모습의 아티팩트가 부착되어 있었다. 유리아와 소아레스와는 거리를 두고 황궁으로 향한 아르스가 황궁 전체에 뻗친 음욕의 힘을 샅샅이 분석해 그 자리에서 새로 만든 아티팩트였다.

음욕의 힘을 완봉하지는 못하더라도, 아티팩트의 유효범위 내에서는 그녀가 다루는 정신지배나 환상 등의 능력을 무효화할 수 있다.

아르스의 전용무장 백팩은, 말 그대로 등짐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달리 백그라운드 팩토리(Background Factory)라는 이름을 줄인 말장난이기도 했다.

그 자체가 각종 화기를 탑재한 고도의 아티팩트이면서, 동시에 내부에서 아티팩트를 제조하는 자동화 공장이다.

다양한 효과를 가진 아티팩트를 즉석에서 만들어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이야말로 ‘데우스 마키나’의 진면목이었다.

“MP는 괜찮겠어?”

“아직 여유가 있습니다. 길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유리아의 앞에 서며 자이안은 정면을 응시했다. 그 등을 바라보던 유리아가 슬쩍 그의 곁에 나란히 섰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옆을 본 자이안이 작게 웃었다.

“유리아는 좀 쉬어도 돼요.”

“괜찮아. 그렇게 지치지도 않았고. 자이안한테 알려줄 것도 있어.”

통신으로 전해 들은 음욕의 약점에 대한 추측에 자이안은 납득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몸이 세로로 양단됐는데도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뿐 아직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일전에 싸운 교만은, 비록 프레이의 힘을 빌려 약화시키기는 했지만 목을 베자 확실히 죽었으니까.

‘소아레스 씨 혼자서는 조금 불안한데.’

황궁 여기저기에 아직도 마인의 냄새가 만연했다. 함께 싸워주고자 하는 유리아의 마음은 기뻤지만, 그녀에게 맞는 전장은 이곳이 아니었다.

“……알았어.”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으나, 그래도 유리아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자신의 역할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갔다 올게!”

밝게 외치며 유리아가 떠나고, 홀에 남은 것은 자이안과 아르스,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음욕뿐이었다. 초췌한 얼굴로 자이안을 노려보며 음욕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윽, 흑…… 뭐야 그 검은…… 아파…… 왜 이렇게 아픈 거야……?”

“아픈 게 당연하지. 죽일 생각으로 휘둘렀으니까.”

“죽어? 내가……?”

“그래. 코르니카에서 죽은 ‘교만’처럼.”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자이안이 칼끝을 음욕에게 향했다. 음욕은 망연한 표정이었다. 자신이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듯,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불합리를 맞닥뜨린 듯했다.

“아하, 하하하하. 후후후후후후……!”

별안간 음욕이 웃음을 터뜨렸다. 종잡을 수 없는 감정 변화였다. 애초에 이해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40년이 넘도록 제국을 지배하고 무수한 인명을 가지고 놀았으면서 일말의 죄책감조차 없는 그녀는, 겉모습만 인간을 닮았을 뿐인 전혀 다른 생물에 불과하다.

동정도 공감도 이해도 필요 없었다. 냉정하게 죗값을 계산해 단죄할 뿐.

“그래, 네가 교만을 죽였구나. 이름이 뭐니?”

“나이아 알코스의 아들, 자이안 알코스.”

자이안이 언제든지 돌진할 수 있도록 자세를 취했다. 아르스가 백팩의 무장을 전개하고 모든 총구를 음욕에게 향했다. 음욕은 두 팔을 벌렸다. 홀을 메운 분홍빛 안개가 그녀의 몸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무대가 엉망이 돼버렸네. 이런 날도 있는 거겠지.”

자이안이 달렸다.

“나도 한번,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쳐볼까.”

안개를 두른 음욕의 힘이 폭발적으로 부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