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마족 토벌 작전 - 전면전 (1)
(44/210)
44화 마족 토벌 작전 - 전면전 (1)
(44/210)
44화 마족 토벌 작전 - 전면전 (1)
2022.11.16.
단검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그 순간 유리아도 일이 틀어졌음을 느꼈다. 생물을 찌르는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목이 잘린 여성의 몸이 분홍색 액체로 변해 무너지듯 쏟아졌다. 주변에서 광란의 연회를 펼치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흥건하게 젖은 홀 바닥에서 희뿌연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
숨을 들이켠 순간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흐려졌다.
유리아는 다급하게 코와 입을 막으며 주위를 살폈다. 그녀를 따라 천장에서 내려온 소아레스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아르스 언니가 만들어준 알약!’
다급히 소아레스에게 다가간 유리아가 품속에서 알약을 꺼내 강제로 소아레스의 입에 넣고, 자신도 한 알 먹었다. 일정 시간 동안 정신간섭에 면역성을 얻게 해주는 복용형 아티팩트였다.
‘역시 자이안이야.’
만든 이는 아르스였지만 아이디어는 자이안에게서 나왔다.
적이 강력한 정신간섭 능력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착안,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형태의 정신간섭이든 대응할 수 있도록 겹겹이 준비를 쌓은 것이다.
“저는…… 윽, 머리가…….”
“암살은 실패했어.”
비틀거리며 일어선 소아레스가 유리아의 말에 표정을 굳혔다. 암살에 실패하면 즉시 이탈하는 것이 철칙이지만, 유리아도 소아레스도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암살은 결국 수단에 불과하다.
“도시에 갑자기 묘한 결계가 펼쳐져서 혹시나 했는데…….”
암살에 실패했다면, 정면에서 쓰러뜨릴 뿐.
“클라비수스가 아니라 웬 듣도 보도 못한 쥐새끼가 기어들어 왔을 줄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피가 얼어붙는 것 같은 싸늘한 감각.
유리아는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눈앞에 나타난 여자가 나쟈―과거 자이안이 싸운 강대한 적인 ‘마족’임을 직감했다.
“너는…… 누구냐?”
그러나 소아레스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이 사람 저런 말투도 쓸 수 있구나, 하고 실없는 사실에 유리아가 놀라는 가운데 소아레스가 당혹스러워하며 재차 말했다.
“나쟈는 어디로 갔지? 너는 누구냐? 그 마녀…… 마족의 동료냐?”
연이은 질문에 여자는 대답 대신 부드럽게 웃었다. 고작 그것뿐인데 지켜보고 있던 유리아는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이었다.
스스로는 깨닫지 못했지만 실제로 수 초간 숨을 멈추고 있었다.
‘자이안은, ‘이런 것’과 싸웠구나.’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터무니없이 아름다운 나머지 오로지 무서웠다. 방금 전 복용한 아티팩트가 그녀의 정신을 지키고 있을 텐데도 그랬다.
“나쟈라…… 이 아이 말이니?”
여자의 발치에 고여 있던 분홍색 액체가 부글부글 거품을 일으키더니 물보라와 함께 치솟았다. 그 안에서 마치 점토 인형을 빚듯 새로운 육체가 만들어졌다.
얼굴을 확인한 소아레스가 눈을 부릅떴다.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나쟈의 모습이었다.
“으응…… 아아, 그래. 너는 본 기억이 있는걸? 클라비수스와 함께 도망쳤던 아이였지? 많이 무서웠을 텐데 결국 돌아왔구나. 나쟈를 죽이기 위해서? 우후후후. 멋져. 훌륭해.”
여자가 만든 나쟈의 몸이 다시 액화하며 쏟아졌다. 유리아는 사방을 바쁘게 살피며 상황을 추리했다.
‘분명해. 칠죄종이야. 그중에서도, 아마…….’
“……음욕?”
무심결에 입에 담은 말에 여자의 표정이 변했다. 진심으로 놀란 듯, 허를 찔린 기색이었다.
‘여자라면 음욕일 가능성이 높다고 프레이 오빠가 그랬어. 억측이니까 틀려도 어쩔 수 없다고도 했지만.’
“나를 알고 있어? ……흐으응?”
여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똑바로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두려움으로 전신이 경련했으나 유리아는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눈에 힘을 주며 여자를 마주 노려보았다. 마안이 열리고 여자의 주변을 감싼 방대한 MP에 압도될 것 같았지만, 투지는 그에 비례해 높아졌다.
“아아! 네가 교만을 죽인 그 아이구나!”
여자가 손뼉을 치며 천진난만한 미소로 말했다. 동료일 게 분명한 교만이 죽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거리낌 없는 태도였다.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아핫, 후후후……! 이런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행운을 만날 줄이야! 나는 항상 이렇다니까?”
“……교만을 죽인 건 내가 아냐, 아줌마.”
“어머나?”
“아니지만…… 괜찮아. 당신은 내가 죽일 거야.”
자이안과 함께 걷는 동등한 동료로서 있기 위해, 그것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었다.
‘그렇긴 한데, 정면으로 붙으면 도저히 승산이 없을 거야.’
음욕과 동격의 적인 ‘교만’도 프레이와 자이안이 힘을 합쳐 겨우 쓰러뜨릴 수 있었다. 유리아와 소아레스, 고작 둘이서 정면으로 부딪치는 건 자살행위에 불과했다.
‘머리를 쓰자. 괜찮아. 난 할 수 있어.’
“아아…… 멋져. 정말 좋아. 그 눈. 이래서 인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니까.”
요염하게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음욕을 무시하고, 유리아는 소아레스와 잠시 눈빛을 교환했다. 대화는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으나, 곧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아와 자이안은 물론, 소아레스와 황자도 모두 통신용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상대하면서 발목을 잡을게. 소아레스는 뭐든 좋으니까 저 여자의 약점이 될만한 걸 찾아줘.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소아레스가 조금씩 거리를 벌렸다. 유리아는 그런 그녀를 음욕에게 들키지 않도록 은밀하게 몸으로 가렸다.
“정말 훌륭해. 더없이 황홀한 무대야.”
그 순간 음욕이 웃었다.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처럼, 첫사랑이 맺어진 소녀처럼, 결혼식장에 선 신부처럼, 자식을 처음으로 품에 안는 어머니처럼, 오랜 여정을 모두 마치고 편안히 눈을 감는 노인처럼.
“영웅님들. 내가 만족할 만큼 멋진 분전, 부탁할게?”
다음 순간, 그 모든 것이 쾌락과 정욕과 황홀감으로 처참하게 뒤섞여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바닥을 흥건하게 뒤덮은 분홍색 액체가 한꺼번에 솟구치며 홀 전체를 반구형으로 뒤덮은 것과 동시였다.
* * *
“오호라.”
자이안은 고개를 들고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황궁 방향으로부터 불길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부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암살은 실패했나?’
기대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강적을 쉽게 쓰러뜨릴 수 있으면 그게 가장 좋으니까.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아직 수단은 남아있었다. 오히려 문제는 황궁이 아니라 다른 쪽이었다.
‘마물 냄새가…… 꽤 많은걸.’
엄청난 수의 마물이 제도를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제국 곳곳에 숨어있던 마물들을 전부 끌어모은 게 아닌가 싶었다.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 길어야 30분가량. 자이안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프레이 씨, 힘 좀 써주셔야겠어요. 마물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자이안이 상황을 간결하게 설명했다. 프레이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으나, 이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나 혼자서? 넌 어쩌게?」
‘전 황궁으로 가야죠. 암살이 실패한 이상, 유리아와 소아레스 씨만으로는 마족을 정면에서 상대하기 힘에 부칠 겁니다. 아르스 씨도 당장은 손을 보태기 어려울 테고.’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프레이의 안색은 썩 좋지 않았다.
「내가 이런 말 하기는 진짜 싫은데…… 저 정도 되는 마물을, 그것도 사방에서 몰려오는 걸 나 혼자 막긴 좀 힘들다.」
‘예에에?’
자이안이 노골적으로 실망했다는 표정을 했다. 프레이는 다급하게 덧붙였다.
「물론 내가 제대로 힘을 쓸 수 있으면 저거의 10배도 문제없지! 근데 너도 알다시피 펜던트의 기능에는 이것저것 제한이 많다. 나이아…… 아니, AI가 제어권을 네게 모두 맡기고 사라진 지금도 제한이 모두 풀린 건 아냐.」
‘뭐가 문젭니까?’
「펜던트를 통해 소환된 각성자는 기본적으로 본래 힘의 20% 정도밖에 발휘하지 못해. 네가 펜던트를 함부로 다루다가 자멸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안전장치 중 하나지. 이게 없으면 소환 한 번 했다가 MP를 모조리 빨려 그 자리에서 졸도해버릴 수도 있다.」
‘해제하는 방법은 없습니까?’
「그야 뭐, 최종 제어권자가 직접 펜던트의 중추에 직접 접속해서 풀어버리면 그만이긴 한데…….」
‘그럼 어려울 거 없네요.’
「……뭐?」
나이아의 환영과 만나고 그 뜻을 온전히 이어받은 날 이후로, 펜던트의 최종 제어권자는 바로 자이안 자신이었다. 자이안은 펜던트를 붙잡고 눈을 감으며 의식을 집중했다.
드넓은 바다, 빛 한 점 닿지 않는 심해까지 정신을 깊이 가라앉히는 감각. 곧 자이안의 앞에 수만 갈래로 얽힌, 마치 미로와도 같은 복잡한 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사실 펜던트의 중추에 접속해 기능을 제어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유자를 보호하는 안전장치 등은 특히 더 그렇다.
그러나 심해에 펼쳐진 3차원 미로를 헤쳐나가는 자이안에게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안전장치는 풀었어요. 이제 괜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뭐? 이렇게 빨리? 아니, 중요한 게 그게 아니지. 제정신이냐? 네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입니다.’
자이안이라고 아무 생각도 없이 일을 벌인 것이 아니다. 지금 그는 일주일째 과포화상태가 이어질 만큼 MP가 남아도는 상태였다.
어쨌든 당장 쓰러지지는 않을 거라는 계산이 이미 깔린 것이다.
“클라비수스 씨. 충분히 푹 쉬었죠? 이제 당신 차롑니다. 마물들이 제도로 몰려오고 있어요. 프레이 씨를 부를 테니 당신이 프레이 씨를 지휘해서…… 클라비수스 씨?”
옆에 선 황자에게 상황을 설명하던 자이안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황자의 안색이 심상치 않았다. 새하얗게 질린 채 무언가를 억눌러 참듯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의 두 눈동자에 검붉은 기운이 일렁이는 것을 보며 자이안은 희미하게 인상을 썼다.
“…듣고 있다. 계속 말해봐.”
그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놀라울 정도로 평탄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더 위태롭게 들렸다.
「……이런 미친.」
마안으로 황자의 상태를 확인한 프레이가 낮게 욕설을 뱉었다.
「자이안, 당장 그놈한테서 떨어져. 아직 초기단계에 불과하지만…….」
“클라비수스 씨. 괜찮습니까?”
프레이의 다급한 말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자이안은 황자의 눈을 똑바로 보고 물었다. 황자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다. 말해. 내가 뭘 해야 되냐?”
“제도를, 당신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황자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보다 더 강하고 빠르게.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으나 두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상황이 썩 좋지는 않을 겁니다. 프레이 씨는 수만의 마물을 쓰러뜨릴 수 있는 힘을 가졌지만 혼자일 뿐이에요. 적은 사방에서 제도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군.”
황자가 피식 웃었다. 그 표정을 보고 자이안은 비로소 안심했다. 비록 그가 지금 어떤 상태이건 간에, 그는 자신의 나라를 끝까지 지켜내려 할 것이다.
‘프레이 씨, 뒤는 부탁드립니다. 만약의 경우에는…….’
“걱정 마라. 난 너랑 달라서 정 같은 거에 안 휘둘리거든.”
높이 치솟은 빛의 기둥 속에서 걸어 나오며 프레이가 심드렁한 말투로 이죽거렸다.
“그러니까 넌 가서 네 할 일이나 잘해.”
자이안은 마지막으로 프레이와 황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둘은 이미 그를 바라보고 있지도 않았다.
몰려드는 적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믿음직한 두 등을 눈에 담고, 자이안 역시 몸을 돌려 황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