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마족 토벌 작전 - 암습 (2)
(42/210)
42화 마족 토벌 작전 - 암습 (2)
(42/210)
42화 마족 토벌 작전 - 암습 (2)
2022.11.14.
「세상 만물을 평등하게 사랑한다는 건, 바꿔 말하면 자신과 세상을 1:1로 대등하게 생각한다는 뜻이기도 하지.」
깊은 밤. 세 개의 그림자가 어둠을 뚫고 제도를 향해 달린다.
「‘자이안 님’은 자신은 별 볼 일 없다는 둥의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건 사실 빈말이다. 겸손…… 아니, 겸손보다는 오만이고 기만에 가깝지.」
일반적으로 자만은 독이다. 그러나 충분한 능력이 뒷받침된다면, 상황에 따라서는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자이안 님’의 가장 큰 강점은, 일절 망설이지 않는다는 거다.」
세 그림자가 길게 뻗은 성벽 앞에 잠시 멈춰 섰다. 이윽고 두 그림자― 소아레스와 유리아가 성벽을 따라 왼쪽으로 이탈했다.
그 자리에 남은 자이안은 등에 업힌 황자의 지시에 따라 성벽 위 순찰병의 모습을 세세하게 살폈다.
“……순찰병이 없어?”
황자가 쉬이 믿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어째서 제국의 심장이라 불리는 대도시가 이리도 무방비한 것인지, 자이안은 그 이유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자이안은 즉시 뛰어올랐다. 높이 20m에 달하는 성벽 위에 소리도 없이 고양이처럼 착지한 그가 끝없이 펼쳐진 시가지를 눈에 담았다.
“총 여덟 군데에 정신간섭 차단용 아티팩트를 설치할 겁니다. 클라비수스 씨, 아티팩트를 설치할만한 장소를 정해주세요.”
“염병. 지금은 이유를 생각하는 것보다 행동이 먼저라 이거냐?”
“정답입니다. 역시 총명하시네요.”
“쯧. 내 살다 이렇게까지 불편한 칭찬은 처음 듣는군. 알았다, 알았어. 우선 지금 위치에서…… 저쪽으로.”
성벽에서 뛰어내린 자이안이 거침없이 시가지를 가로질렀다. 상주인구 30만에 달하는 대륙 최대의 대도시는 밤이 깊었다고 하여도 불길하리만치 고요했다.
눈에 들어오는 건물 중 불이 켜져 있거나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이 단 하나도 없었다. 마치 오래전에 모두가 죽고 폐허가 되어버린 장소처럼 느껴졌다.
“괜찮습니다. 사람들은 아직 살아있어요.”
애써 불안을 삼키는 황자에게 자이안이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나쟈라면 30만 제도민을 헛되이 죽일 게 아니라 저희를 몰아넣기 위한 인질로 쓸 겁니다. 사람을 꼭두각시처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나쟈에게 그 숫자를 줄이는 건 전혀 이득이 아닙니다.”
“하나도 안심 안 되는 위로 고맙다.”
“하하, 기분이 좀 나아지셨다니 다행입니다. 다음 위치를 말씀해 주세요.”
제도를 종횡무진으로 가로지르며 여덟 개의 아티팩트를 모두 설치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총 5분. 그 사이 눈에 띄는 방해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나치게 순조로운 나머지 황자는 반대로 점점 더 기분이 나빠졌다.
“왜 그렇게 불안해하세요?”
자이안의 물음에 황자는 숨을 삼키며 놀랐다. 불안해하고 있다고? 모든 게 계획대로 술술 풀리고 있는데? 황자는 눈을 끔뻑거리며 망연히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식은땀을 흘리고 계시네요. 안색도 창백해요. 뭐가 그렇게 두렵죠?”
“그건…… 내가, 나만이, 그 마녀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황자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자이안, 너는…… 아무것도 몰라. 그 마녀가 얼마나 끔찍한 존재인지. 잠시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공포가 심장을 씹어먹고, 차라리 그대로 미쳐버리길 바란다는 게 어떤 감각인지. 전혀 모르고 있단 말이다.”
“당연하죠. 전 나쟈를 만난 적이 없으니까요. 제가 알고 있는 건, 마족이건 뭐건 목을 베면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인간과 별다를 것 없는 생명체라는 뜻이죠.”
자이안의 대답은 초연했다.
“코르니카에서 저와 싸웠던 마족은 자신을 ‘교만’이라고 칭했습니다. 클라비수스 씨, 칠죄종이라는 개념을 알고 계세요?”
“오래전 쇠퇴한 법왕국에서 주장했던 개념 말이냐? 인간의 모든 악행은 7개의 원죄에서 비롯된다는.”
“맞습니다. 교만. 음욕. 시기. 나태. 폭식. 분노. 탐욕. 저와 프레이 씨, 아르스 양은 마족의 최상위 지배계층이 이 칠죄종에 대응하는 총 7명의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아, 교만은 제가 죽였으니 이제는 6명이겠네요. 하하핫.”
하나도 웃기지 않은 농담이었다. 황자는 머리가 아파졌다.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뭔데?”
“자기 이름을 ‘나쟈’라고 밝힌 마족은 칠죄종의 일원이 아닙니다. 즉, 교만보다 약합니다.”
“그건…….”
뭐라 반론하려던 황제는 곤혹스러워하며 입을 다물었다. 조악한 논리였으나 아예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니었다.
마물의 대군을 홀로 막아낼 힘을 가졌으며 실제로 마족을 쓰러뜨린 경험이 있는 만큼, 자이안의 말에는 신빙성이 있었다.
“……그래. 그랬으면 좋겠군.”
도저히 사라지지 않는 불안을 억지로 밀어내며 황자는 힘없이 웃었다. 자이안은 자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 한 말은 억지로 끼워 맞춘 추측일 뿐이라 틀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설사 추측이 맞다고 해도, 마족의 지배계층이 칠죄종 하나뿐이라는 보장도 없고요.”
“야 이……. 너 지금 나 놀리냐?”
“하하핫. 알지도 못하는 채 지레 겁먹어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지금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소아레스 양과 유리아 양의 성공을 기다리는 것뿐이니까요.”
자이안이 짙은 어둠으로 둘러싸여, 마치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괴물처럼 보이는 황궁을 바라보았다.
절반은 성공했다. 나머지 절반은 황궁에 침입한 소아레스와 유리아에게 달렸다.
* * *
소아레스의 인도를 따라 황궁으로 통하는 비밀통로를 가로지르며, 유리아는 그 어느 때보다도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반드시 자이안의 기대에 보답할 거야!’
얼핏 강박증 같기도 한 그 생각은 보통이라면 사고를 터뜨리기 딱 좋지만, 적어도 지금 유리아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문제였다.
과포화 상태에 빠진 유리아의 가장 큰 특징은 자이안에 대한 존경심,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이를 일절 숨기지 않는 당당함과 솔직함이었다.
자이안의 사소한 말 한마디, 그가 유리아에게 거는 기대가 온전히 그녀의 힘이 되었다.
“소아레스! 마인! 둘!”
앞서 뛰던 소아레스가 발을 멈추고 그 곁을 유리아가 전광석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두 갈래로 꺾인 전방의 갈림길 왼쪽에서 인간을 닮은 무언가가 둘, 네발로 기어 나왔다.
피부가 끔찍하게 뒤틀리고 팔다리가 기형적으로 꺾인 그것들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소아레즈가 숨을 삼켰다.
유리아가 물 흐르는 듯한 움직임으로 하나의 목을 베고 남은 하나의 미간에는 단검을 꽂아넣었다.
“아는 사람?”
“……전하의 유모와 젖형제였던 분들입니다.”
“흐응. 죽였으니 어쩔 수 없지. 얼른 가자.”
복잡한 감정을 삼키며 소아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소아레스는 두 마인이 아는 얼굴이라 잠시 놀랐을 뿐, 그렇게까지 친밀한 사이였던 건 아니다.
‘만약 전하께서 이쪽으로 오셨더라면…….’
황궁 침투조에 황자를 포함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비밀통로 전체가 나쟈, 정확히는 음욕이 꾸민 함정이며 시련이었다. 잔정이 많은 황자의 성격상, 친밀하던 이가 마인으로 전락해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은 견디기 힘든 비극이리라.
자이안과 유리아라는 변수 탓에 함정 자체가 의미를 잃고 말았지만.
“곧 비밀통로가 끝납니다.”
“그러면 어디로 나가는데?”
“과거 전하께서 머무셨던 황자궁의 지하 창고입니다.”
비밀통로를 지나는 동안 마주친 마인이 총 19명. 그 모두가 황자와 친밀했으며 소아레스도 몇 번 정도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 이들이었다.
유리아도 소아레스의 반응을 통해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그녀의 손속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지금 유리아에게 중요한 건 자이안의 신뢰에 완벽하게 부응하는 것뿐이었다. 하물며 마인은 원래대로 되돌리지 못하는, 구할 방도가 없는 존재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자이안. 곧 비밀통로가 끝나고 황궁에 들어간대.
품에서 소형 아티팩트를 꺼낸 유리아가 자이안에게 통신을 걸었다. 곧 대답이 돌아왔다.
-생각보다 빨랐네요. 도중에 별일 없었나요?
-마인을 죽였어. 19명.
-마인이라…… 악취미네요, 나쟈라는 마족.
-맞아. 용서할 수 없어.
-그런 악취미적인 함정이 아니어도 어차피 용서할 생각은 없었지만요. 하핫.
잠시 속도를 줄이고 서로 정보를 공유했다. 그러는 사이 비밀통로의 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통신을 마치고, 아티팩트를 집어넣으며 유리아는 상기된 얼굴로 달뜬 한숨을 뱉었다. 앞서 달리던 소아레스는 통신이 끝났음을 가늠하고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유리아는 의욕이 충만해진 나머지 무서울 정도로 눈을 번들거리며 거친 콧김을 내뿜고 있었다. 소아레스는 밑도 끝도 없이 불안해졌다.
‘제발 유리아 님이 사고 치지 않기를.’
그러나 유리아가 사고를 치는 것보다 먼저, 더 큰 장애물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비밀통로의 끝을 코앞에 두고 수 톤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바위가 통로를 틀어막고 있었던 것이다.
자리에 멈춰선 소아레스는 망연한 표정이었다.
“이게 어떻게…… 5년 전에 탈출할 때 이런 건 없었는데? 이 길고 좁은 통로에 대체 무슨 수로…….”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나쟈가 만든 함정이겠지.”
유리아의 대수롭지 않은 말에 소아레스는 정신을 차렸다. 바위를 무슨 수로 여기까지 옮겼는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길이 막혔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바위를 부수고…… 저 커다란 걸 어떻게? 무모한 시도야. 되돌아갈 수밖에 없나? 하지만 그러면 시간이 너무 지체된다. 시간을 끌수록 전하에게 위험이 미칠 확률이 높아질 거야. 게다가 내가 아는 비밀통로는 여기뿐인데.’
“아, 이거 좀 큰일이네.”
게다가 함정은 끝이 아니었다. 필사적으로 타개책을 찾던 소아레스는 유리아의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마인들이 모여들고 있어. 열…… 스물…… 꽤 많네.”
아침에 양치하는 걸 깜빡했다 수준의 가벼운 말투였으나 내용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소아레스는 입술을 깨물며 스스로의 안일함을 자책했다. 어쩐지 너무 거짓말처럼 일이 수월하게 풀린다 싶었다.
나쟈라는 마녀가 그렇게 허술할 리가 없는데도. ‘수월하게 잘 풀린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상황 자체가 함정이었던 것이다.
“유리아 님. 지금 모여드는 마인들을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응? 그거야 뭐……. 근데 왜?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이걸 부수고 가는 게 훨씬 빠르잖아.”
“유리아 님, 지금 농담을 할 때가 아닙니다. 저희 둘이서 이 커다란 바위를 어떻게 부순다는 말씀이십니까?”
“내가 부술게.”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소아레스는 말문이 막혔다. 그뿐만 아니라 머릿속도 새하얗게 지워졌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3분 정도?”
유리아의 두 눈동자에 보랏빛 불꽃이 일렁였다. 그녀는 소아레스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통로를 가로막은 바위를 바라보며, 가장 효율적으로 바위를 부술 수 있는 약점을 포착하고 있었다.
“소아레스는 그때까지만 마인들을 막아줘. 2분 뒤에 한 명이 여기까지 올 거야. 쓰러뜨리기 힘들면 무리하지 않아도 돼. 바위를 부술 때까지 버틸 수 있으면 충분해.”
일방적으로 말하고 유리아는 아예 등을 돌려버렸다. 소아레스는 한숨을 삼켰다. 방법이 없었다. 그녀가 허언을 하는 게 아니라고 믿는 수밖에.
“후우우우.”
무게가 수 톤은 넘어갈 거대한 바위를 눈앞에 두고 유리아는 한 차례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가장 큰 약점은 파괴력의 부재였다. 지난번 마물의 군대를 상대했을 때 특히 뼈저리게 느꼈다.
급소를 정확하게 찌르는 일격이탈의 전법은 그게 통하는 적을 상대로는 더없이 치명적이지만, 크기가 3~4m에 달하는 대형 마물을 상대로는 단검이라는 무기의 특성이 발목을 잡는다.
그 탓에 유리아는 대형 마물을 쓰러뜨리지 못해 모두 자이안에게 일임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른 무기를 잡을 생각은 없었다. 자이안과 함께 여러 무기를 시험해봤지만 단검이 가장 손에 잘 맞았다.
‘단검이 가지는 한계를 단검으로 극복해야 해.’
약점을 파악했을 때부터 줄곧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상황은 벼랑 끝에 몰린 위기가 아니라,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유리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유리아의 두 눈이 보랏빛으로 거세게 타올랐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자세를 잡은 그녀가, 이어 단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