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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각성자들의 방위전 (2) (40/210)


40화 각성자들의 방위전 (2)
2022.11.12.


먼 곳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땅이 희미하게 진동하고, 적색 불기둥이 치솟는 광경이 수 킬로미터는 족히 떨어진 위치에서도 보였다.

방향은 동쪽. 마법에 의한 공격이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그렇게 광범위한 마법을 황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서쪽에서는 동쪽보다는 작은 폭발음이 연달아 울렸다. 상대적으로 작을 뿐, 수 킬로미터 떨어진 마을에까지 소리가 들리고 있는 이상 강력한 공격을 퍼붓고 있음은 분명했다.

“높은 곳에서 보고 싶구나.”

마을 중앙에 10미터가 넘는 높은 종탑이 세워져 있었다. 본래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세운 파수대가, 시간이 지나 마을의 규모가 커지면서 역할이 바뀌어 증축된 건물이었다.

황자는 소아레스와 첩보원들을 이끌고 종탑을 올랐다.

“잘 안 보이는군. 소아레스, 망원경을 다오.”

종탑 외에 높은 건물이 없어 시야가 트여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맨눈으로 보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망원경을 건네받은 황자는 태엽을 돌리며 시야를 조정했다.

먼저 망원경을 향한 곳은 동쪽, 프레이가 방위를 담당한 방향이었다.

“하하! 오냐, 그렇게나 죽고 싶단 말이지! 얼마든지 와라! 이래 봬도 평등주의자다! 한 놈도 빠짐없이, 평등하게, 뼛조각 하나 안 남기고 태워 없애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동안 알게 모르게 쌓인 스트레스를 발산하듯, 프레이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쉴 새 없이 양손을 휘둘렀다.

장갑을 낀 손끝의 움직임에 따라 불길의 파도가 마물의 무리를 휩쓸고 벼락의 채찍이 전장을 후려친다.

불과 번개는 그 무엇보다도 파괴에 특화된 자연현상이다. 프레이가 다룰 수 있는 온갖 속성 중에서도 가장 특기로 삼는 속성이 그 둘이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한 쌍의 장갑 역시 두 속성의 위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강력한 아티팩트였다.

‘마치 신화의 한 장면 같군.’

서쪽을 맡은 아르스는 프레이와는 대조적이었다. 백팩에서부터 날개를 펼쳐 하늘을 날아다니며 일방적인 폭격을 퍼부으면서도, 그녀의 표정은 기계적으로 담담했다.

백팩 내부에서 자신의 능력으로 끊임없이 1회용 아티팩트를 제조해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 적들을 섬멸할 뿐.

그녀에게 마물 토벌은 소재 수집을 위한 수단이며 일종의 작업에 가까운 행위였다.

남쪽에서 벌어지는 육탄전은 두 각성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격렬했다. 신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강대한 마법도, 일방적인 섬멸전도 없었다.

굳게 자리를 지킨 채 구현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무기로 일격에 여러 마리를 휩쓰는 자이안.

오직 단검 두 자루에 의지해, 둘러싸이지 않도록 끊임없이 움직이며 일격 이탈의 전술로 착실하게 마물을 쓰러뜨리는 유리아.

프레이나 아르스와는 달리 그 모습은 이해할 수 있는 강함이었고, 그래서 더욱 둘의 전투가 생생하게 와 닿았다.

황자는 빨려 들어갈 듯 그 모습을 응시했다. 마물이 쓰러지고 피가 솟구칠 때마다 심장이 폭발적으로 뛰었다. 시야가 좁아지고, 동시에 선명해졌다.

깨닫지 못한 사이 황자는 망원경을 내리고 맨눈으로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급기야는 자신이 전장 한복판에 있는 듯한 기묘한 일체감마저 느꼈다. 길게 뻗은 날카로운 손톱으로 자이안의 사지를 찢어발기고, 고기를 씹어 삼키고 피를 마시면 분명 황홀한 기분이리라.

나약하고 열등한 존재인 인간을 죽이고 잡아먹는 행위는 당연한 권리이며,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이고 동시에 영혼에 낙인된 사명――

“……하? 전하! 괜찮으십니까?”

“……!”

소아레스의 다급한 목소리에 황자는 꿈에서 깬 것처럼 정신을 차렸다.

“무슨……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냐니요. 자각하지 못하고 계셨던 겁니까?”

황자가 자각한 것이라곤 방금 잠에서 일어난 것처럼 머리가 둔하고 의식이 뿌옇다는 사실 정도였다. 정신을 다잡기 위해 세차게 고개를 내젓자 그의 뺨에 달라붙어 있던 물방울이 여기저기로 튀었다.

땀을 흘리고 있었던 건가, 싶었으나 아니었다. 새빨간 피였다. 방금 전까지 끔찍하게 충혈되어 있던 두 눈의 혈관이 터지며 피눈물이 흘러내린 것이다.

“내가 혹시…… 뭔가 이상한 말을 했느냐?”

소아레스가 걱정스러워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아무 말씀도 없이, 무서운 표정으로 자이안 님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무서운 표정으로, 자이안을…….”

소아레스의 말을 따라 한 황자가 한 차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나쟈인가. 그 마족이 내게…….’

불온한 추측을 떨쳐내고, 황자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저었다.

“걱정할 것 없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피나 다 닦고 말씀하시지요. 지나가던 지렁이도 안 믿을 겁니다.”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다. 신경 쓰지 말거라.”

소아레스를 안심시키기 위한 말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불만을 눌러 삼키고 입을 꾹 다문 채, 소아레스는 작게 묵례하며 물러났다.

“그것보다, 보거라. 마물의 수가 많이 줄었구나. 자이안의 말대로 됐어.”

마을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펼쳐지던 격전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 천이 넘던 마물의 숫자는 이제 전부 헤아려도 백 마리 남짓이었다.

“보아라. 저들이 아군이 되어 나를 돕고 있지 않느냐? 걱정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완벽한 승리였다.

* * *

「이쪽은 다 끝났다. 숨거나 도망친 놈들도 빠짐없이 처리했고. 신기하구만. 처음엔 기분 탓인 줄 알았는데, 확실히 이쪽 마물이 지구에 비해 더 끈질기고 강한 느낌이다.」

「여기도 끝났어. 마물 소재도 잔뜩 회수했다구우. 잘 됐네, 자이안!」

방위전을 시작하고 체감상 1시간가량 지났을까. 상황 종료를 알리는 보고가 통신 마법을 통해 연달아 들렸다. 자이안은 안도의 한숨을 뱉었지만 방심하지는 않았다.

아직 그의 눈앞에는 50여 마리의 마물이 남아 있었고, 그중 한 마리만 놓쳐도 마을은 쑥대밭이 되리라.

‘그건 그렇고…….’

남은 적을 침착하게 상대하면서 자이안은 틈틈이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번 방위전에서 누구보다도 분전한 이는 프레이도 아르스도 자신도 아닌 바로 유리아였다.

수백 마리의 마물을 상대로 두려워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운다는 것부터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발목을 잡지도 않고, 적을 놓치지도 않고, 자이안과 소아레스로부터 배운 모든 기술을 구사해 그녀의 손으로 직접 쓰러뜨린 마물의 수가 약 1/3.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지친 듯 거칠게 호흡하고 있지만 마물의 급소를 노리는 움직임은 아직도 정확하고 날카롭다.

프레이와 아르스에 미치지는 못해도, 그녀도 이제는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훌륭한 전력이었다.

처음 자이안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한 게 고작 두세 달 전이었음을 생각하면 경이로운 발전이었다.

“헤엑, 헤엑……! 어, 어라? 다 끝났나……?”

반쯤 무아지경에 빠져 있던 유리아가 헉,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지막 남은 한 마리의 머리를 할버드로 쪼개 쓰러뜨린 뒤, 자이안은 유리아를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멍한 표정으로 땀을 닦은 유리아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히, 힘들다아아아아. 으아아아~! 단검 무거워어어~! 못 일어나겠어어어~!”

그대로 대자로 드러누운 유리아가 팔다리를 버둥대며 칭얼거렸다.

정작 자이안이 다가가 손을 내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두 손으로 붙잡고 비틀거리면서도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섰다.

“자이안은 별로 안 지쳐 보이네.”

“아하하. 그렇진 않아요. 안 힘든 척하는 거죠. 부축해줄까요?”

“괜찮아. 못 걸을 정도는 아냐.”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남아있던 마물의 시체가 빠른 속도로 말라붙기 시작했다. MP흡수 현상이었다. 설명만 들었을 뿐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 유리아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도 잠시, 힘이 직접 흘러들어오는 기묘한 감각에 당황스러워했다.

“오, 오오…… 오오오오. 이, 이상한 느낌.”

“……앗.”

그 순간 자이안의 뇌리에 잊고 싶었던 과거가 되살아났다. 설마 유리아도…… 불안해하며 지켜봤으나, 다행히 끔찍한 역사가 반복될 조짐은 당장은 없어 보였다.

자이안은 속으로 크게 안심하며 마지막으로 잔당이 없는지 확인하고, 유리아와 함께 마을로 향했다.

「우린 더 있을 필요 없겠지. 이 이상은 MP 낭비니까, 얼른 소환을 해제해라.」

「에엥? 난 좀 더 자이안이랑 같이 있을래!」

「떼쓰는 척 하지 말고 얌전히 좀 들어가.」

‘마물을 상당히 쓰러뜨린 덕분에 MP는 여유가 있으니 괜찮아요. 이참에 전하에게 둘을 소개할까 해요.’

「황자한테 우리를? 괜찮으려나 모르겠군.」

「걱정할 필요 없지 않아?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닌걸.」

「나쁜 일을 항상 나쁜 사람이 일으키는 건 아니잖냐. 뭐, 노파심에 하는 말이니 너무 신경쓰지 마라.」

황자는 마을에서 벗어난 곳에서 자이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뇌를 풀었다고는 해도 아직 수배령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그가 모습을 드러내 혼란을 가중시킬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마물은 모두 쓰러뜨린 거냐?”

“하나도 남김없이 쓰러뜨렸어요. 당분간 위험은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혹시 모르니 한 번 근방을 수색할까 합니다. 저희가 안심하고 떠난 순간 다시 마물이 마을을 습격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으니까요.”

“훌륭한 생각이다. 다만…… 그래선 끝이 없어.”

“무슨 말씀이세요?”

“네 일행이 모두 모이면 이야기하도록 하지. 지금은 좀 쉬는 게 어떠냐. 쓰다 버린 걸레짝 같은 몰골이라고, 너희 둘.”

“옷과 젖은 수건을 준비해 뒀습니다.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으시지요. 편히 갈아입으실 수 있도록 장소를 마련했습니다.”

천막으로 가렸을 뿐인 간소한 공간이었으나 그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자이안과 유리아가 번갈아 몸을 닦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을 즈음 프레이와 아르스가 느긋하게 돌아왔다.

“전부 모였나. 그러면 자이안, 제대로 설명해 주겠지?”

한 번 프레이와 아르스를 바라보고, 눈빛으로 짧게 의사를 주고받은 다음 자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은 제 가족이에요.”

“가족? 알레프 가의 일원이라고?”

“백작가가 아니라 어머니 쪽 가족분들이에요.”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든가, 설명하기도 어렵고 듣는 사람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까지 얘기할 생각은 없었다. 자이안이 전하고 싶은 건 둘이 자신의 가족이고 언제든 힘을 빌릴 수 있는 조력자라는 사실이었다.

얼버무릴 수 있는 부분은 얼버무리고, 프레이가 통신 마법으로 전해준 거짓말을 적절히 섞어 설명하자 황자는 간신히 이해했다는 기색이었다.

“조력자가 어디서 왔는지, 신분이 뭔지는 사실 중요한 게 아니지. 프레이, 아르스, 두 분은…… 앞으로도 자이안과 함께 저를 도와주시는 겁니까?”

“자이안이 원한다면야, 뭐. 그리고 억지로 존대할 거 없다. 그냥 편하게 말해. 난 존댓말을 하는 것도, 남한테 듣는 것도 특기가 아니거든.”

“아하하하. 난 예의바른 사람을 좋아하지만, 황자님도 나름대로 입장이라는 게 있지? 프레이랑 마찬가지도 편하게 말해도 돼.”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가볍게 인사를 마친 뒤 자이안은 둘의 소환을 해제했다. 눈앞에서 두 사람이 빛에 휩싸여 사라지는 모습을 본 황자는 적잖이 놀란 기색이었으나, 곧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겠지만, 자이안. 아무래도 계획을 좀 바꿔야겠다. 여기서 제도까지는 마차로 약 한 달. 하지만 자이안, 유리아, 소아레스, 너희들의 속도라면 일주일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터.”

정말로 갑작스러운 화제였다. 자이안은 우선 잠자코 그의 말을 경청했다.

“지금 같은 방식으로는 오늘처럼 나쟈의 함정에 말려 발목을 잡힐 뿐이야. 다행히 오늘은 한 명도 희생자가 없었지만, 항상 그런 요행이 벌어지기를 바랄 수는 없다.”

황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부터는 최속으로 제도로 향해, 한시라도 빨리 나쟈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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