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각성자들의 방위전 (1)
(39/210)
39화 각성자들의 방위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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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각성자들의 방위전 (1)
2022.11.11.
불온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난 5년간 황자의 행동을 모른 척하더니, 이제 와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어쩌면, 얼마 전 희생당할 뻔한 볼드 주민 150명의 세뇌를 풀어낸 것이 영향을 미친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진 마음껏 발버둥 쳐 보라는 듯 방치하더니, 선을 좀 넘으니까 곧바로 대처한다? 웃기는 마족이구만.」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말이지이. 저쪽 입장에선 언제든지 눌러죽일 수 있다고 생각한 모기한테 손가락을 베인 거나 마찬가지니까.」
「하, 우릴 완전히 얕보고 있다 이거지. 자이안, 좀 서두르는 게 좋겠다. 이렇게 된 이상 저쪽이 우릴 약간이라도 얕보고 있을 때 단숨에 몰아쳐서 쓰러뜨리는 게 낫다.」
자이안도 그 의견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당장 구할 수 있는 눈앞의 마을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전하, 어서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마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곧 전하를 찾기 위한 수색대가 만들어질지도 모릅니다.”
첩보원의 직언에 황자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세게 틀어쥔 주먹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강하게 떨렸다. 자이안은 그의 내심을 짐작했다.
그러나 그가 황자를 배려하기 위해 입을 여는 것보다도 먼저, 황자가 피를 토하는 듯한 목소리로 자이안에게 말했다.
“자이안, 네게…… 백성들을 맡기마.”
스스로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그 한 마디를 꺼내기까지 얼마나 큰 갈등이 있었을까. 이를 헤아리는 것은 분명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다만 자이안은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주세요, 전하.”
* * *
행동방침이 정해졌다. 자이안과 유리아가 마을에 잠입하고, 황자와 소아레스를 비롯한 나머지는 눈에 띄지 않는 장소를 찾아 몸을 숨기기로 했다.
단 둘이서 잠입하게 된 이유는 효율 때문이었다. 자이안이 만든 아티팩트는 네 개의 구조물을 정해진 위치에 설치한 뒤 스위치를 눌러 원격으로 작동시키는 방식이었다.
네 명이서 하나씩 가지고 잠입하자니 황자의 호위가 너무 부실해지고, 세 명은 시간 상 두 명일 때와 별 차이가 없다. 자이안, 그리고 그와 속도를 맞출 수 있는 다른 한 명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소아레스와 유리아가 후보였고, 유리아가 자진했다.
「자책하면서 찌그러져 있을 줄만 알았더니, 그 황자도 머리가 제법 돌아가는구만.」
그리고 이 모든 건 황자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총명하고 결단력도 있는 분이에요. 다만 지금은, 상황이 좀…… 안 좋잖아요.’
상대는 인간을 파리처럼 가볍게 죽일 수 있는 마족. 게다가 인구수 300만에 육박하는 제국 전체를 쥐락펴락하는 무서운 세뇌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상대로 5년간 반란군으로 활동하면서 붙잡히지 않은 게 대단한 일이다.
나쟈가 봐준 것도 있겠지만, 여러 귀족들을 포함해 수백 명의 전력을 휘하에 두고 지금까지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건 오롯이 황자의 힘이다.
「극한 상황에 처할수록 그 사람의 본성과 실력이 드러나는 법이지. 잠깐 자이안, 그대로 가면 발각된다.」
급히 속도를 줄인 자이안이 조심스럽게 방향을 꺾어 위기에서 벗어났다.
은밀 행동이 특기가 아닌 건 자이안이나 두 각성자나 마찬가지였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듯 상황을 살필 수 있는 두 사람의 조언이 자이안을 무사히 이끌고 있었다.
「거기쯤이 괜찮겠다. 우리 유리아가 나머지 두 개를 설치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만 남았네에.」
지붕 위. 두 번째 아티팩트를 설치한 자이안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유리아가 실패하기라도 하면 다 부질없는 일이 되겠지만, 셋 중 이를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난 일주일, 소아레스라는 새로운 스승을 만난 유리아는 지지부진하던 지난날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경이로운 속도로 성장했다.
상상 이상의 재능에 내심 흥분한 소아레스가 시험 삼아 가르친 각종 첩보 기술도 그녀는 물을 빨아들이는 스펀지마냥 빠르게 흡수했다.
작정하고 은밀하게 움직이는 유리아는 자이안조차 때때로 기척을 놓칠 정도였다.
「그건 그렇고, 마을 꼴 한 번 가관이구만.」
잠시 쉬고 있는 자이안 대신 주위를 살피던 프레이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직후 말실수했음을 깨달았지만,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이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천 명 정도 규모의 마을치고는 곳곳이 소란스러웠다. 활기찬 분위기는 결코 아니었다. 곳곳에서 노호성과 비명, 울음소리 따위가 난무했다.
거리 한복판에서 몸을 드러내며 교태를 부리는 유부녀, 아무에게나 돌을 던지며 유혈이 튈 때마다 천진하게 웃는 어린아이, 그 아이를 유혹하려 아양을 떠는 소녀, 골목에 숨어 소녀를 겁탈할 기회를 노리는 그녀의 아버지, 그의 주머니를 낚아채 달아나는 노인까지.
단 하나도 정상인 것이 없이 엉망진창으로 미쳐 있었다.
제도에 가까워짐에 따라 나쟈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모종의 수단으로 황자가 근처에 있음을 알아챈 나쟈가 본보기를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죽거나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은 아직 없었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도 시간문제이리라.
‘유리아, 얼른…….’
보고 있기 힘들어진 자이안이 눈을 감으며 속으로 되뇌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사람들을 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 행동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1분 1초가 끔찍하게 길게 느껴졌다.
“자이안.”
“……!”
숨죽인 목소리와 동시에 옅은 기척이 지붕을 뛰어넘으며 가까워졌다. 유리아였다. 고개를 든 자이안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이안은 망설임 없이 아티팩트의 작동 스위치를 눌렀다.
순간, 자이안은 까마득하게 먼 곳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훔쳐보는 듯한 섬뜩한 기분에 휩싸였다.
“하늘이……?”
아직 단련되지 않은 희미한 감각으로 MP의 요동을 느낀 유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4개의 아티팩트가 설치된 장소를 기점으로 반투명한 푸른빛 막이 퍼져나가며 마을 전체를 뒤덮었다.
광기가 소용돌이치던 마을이 조금씩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성공한…… 거야?”
유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이안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정작 그의 표정은 험악했다.
훔쳐보는 듯한 시선은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대신 그의 후각이 새로운 위험을 감지했다.
“마물의 냄새가…….”
“마물? 갑자기 무슨 말, 뺘햐?!”
의아해하며 반문하는 유리아를 급히 등에 업고, 자이안은 얼어붙은 표정으로 빠르게 마을 바깥으로 향했다. 유리아가 귀엽게 비명을 지르는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거의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익숙해져 있던 마물의 냄새가 갑자기 폭발적으로 짙어지고 있었다.
자이안은 코르니카 외곽의 숲에서 소환진을 없애기 위해 수백의 마물과 대치했을 때를 떠올렸다. 냄새가 그때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짙었다.
그리고 어느 방향이랄 것도 없이 사방에서 마을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전하! 소아레스 님!”
전력으로 내달린 자이안이 지면을 거의 부수다시피 하며 합류 지점에 도착했다. 급조한 은신처에 몸을 숨기고 있던 황자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자이안의 표정을 보고, 그의 얼굴도 심각하게 굳었다.
“자이안, 너…… 설마 실패한 거냐?”
자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황자의 눈에 의문이 어렸다.
“마물이 몰려오고 있어요. 얼마나 수가 많은지, 몇 종류나 되는지 짐작조차 안 되는 수의 마물이.”
황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제가 마물을 막겠습니다. 마을로 피하세요.”
* * *
최소 수백, 어쩌면 천을 넘을지도 모르는 숫자의 마물을 막겠다는 그 말이 황자에게는 자살 선언으로 들렸다. 그러나 자이안은 반론도 질문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황자를 반강제로 잡아끌고 마을에 도착한 자이안이 재빠르게 설명했다.
“처음부터 함정이었을 거예요. 마물들을 숨겨놓은 것도, 마을 사람들이 발광하는 모습을 굳이 보여준 것도. 여기가 아니라 다른 마을이었어도, 세뇌를 해제하는 순간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 거예요.”
그 한 마디에 황자는 많은 것을 이해했다. 심지어는 자이안이 짐작하지 못한, 감춰진 사실마저도. 어쩌면 지난 5년은, 나쟈가 그를 가장 끔찍하고 처절한 절망에 빠뜨리기 위해 만든 각본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마…… 모든 것은 그가 가까스로 황궁을 탈출한 그 날부터 준비되었으리라.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전부터, 그가 태어난 순간부터 그랬을지도.
“괜찮습니다, 전하. 마을은 지킬 수 있어요.”
자이안의 말에는 조금의 현실감도 없었다. 자이안과 동행하며 그의 힘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유리아조차 불안해했다.
천 명이 넘는 규모의 마을을 마찬가지로 천이 넘는 마물의 습격으로부터 무사히 지키는 게 가능한가? 수만, 수십만에 달하는 대규모 군대라면 모를까, 고작 한 명의 인간이?
“아포칼립스. 데우스 마키나!”
자이안이 의문에 대답했다.
빛의 기둥이 두 개, 하늘을 찌를 기세로 솟구쳤다가 흩어져 사라지고 프레이와 아르스가 나타났다.
프레이는 귀찮은 일이라도 떠맡은 양 심드렁한 표정이었고, 처음으로 무력적인 면에서 자이안을 도울 수 있게 된 아르스는 의욕이 넘쳤다.
“보자. 총 1,148마리. 사방으로 퍼져서 마을을 포위하듯 몰려오고 있구만. 지능이라곤 없는 놈들이 꼴에 머리를 쓴 건가? 잘 됐다. 간만에 스트레스나 좀 마음껏 풀어야지.”
“자이안, 이거 보여? 실시간으로 마물의 위치와 움직임, 강함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아티팩트야. 흐흥, 내가 직접 만든 거라구우? 누나 대단하지? 그렇지?”
위기감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둘의 태도에 자이안은 내심 마음을 놓았다. 둘이 이렇게 태연하게 행동한다는 건, 이번 일이 정말로 별일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자이안도 불안해할 필요가 없었다.
“주의할 건 총 열한 놈이다. 중위 3급……. 아니, 이 정도면 상위 1급은 되겠는데. 자이안, 이제 와서 네가 상위급 마물에 당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방심하진 마라.”
“MP 패턴 대조 결과 나왔어. 상위급 열한 마리 중 사이클롭스가 넷, 그렘린 다섯, 나머지 둘은 지배자 오크네에.”
“지배자 오크? 역겨운 것들이 섞여버렸구만.”
“아하하하, 오크는 특히 싫어하는 사람이 많은 마물이지이.”
“알겠습니다. 그러면 삼촌이 동쪽과 북쪽 절반, 아르스 님이 서쪽과 북쪽 절반을 맡아주세요. 제가 남쪽을 맡겠습니다.”
재빨리 정보를 공유하고 포지션을 정했다. 할 일은 간단했다. 최대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 마물을 요격하며, 단 한 마리도 살려 보내지 않는 것.
“자, 잠깐 자이안! 나도! 이번에는 나도 같이 싸울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유리아가 급히 끼어들었다. 자이안은 잠시 고민했으나 지금은 그럴 시간도 아까웠다. 전력은 무조건 많은 편이 좋다.
유리아라면 쉽게 위험에 처하지도 않을 테고, 만의 하나의 상황에 전장을 빠져나가 도망치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알았어요. 그러면 유리아는 저와 함께 남쪽을 맡죠.”
“진짜?! 됐다!”
유리아가 뛸 듯이 기뻐했다. 황자와 소아레스를 비롯한 남은 일행이 정신을 차린 것이 그즈음이었다.
상황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황자가 직감한 것은, 지금은 자이안을 믿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정확한 계획이 무엇인지, 승률이 어느 정도인지, 갑자기 나타난 미지의 조력자 두 명은 누구인지, 그런 의문은 나중에 해결해도 되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전하. 얼마 안 걸릴 거예요. 소아레스, 그리고 다른 분들도 그때까지 전하를 부탁드려요.”
잠깐 산책이라도 나가는 듯한 가벼운 말을 마지막으로, 네 명의 각성자가 사방으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