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제도로
(38/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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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제도로
2022.11.10.
논의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반란군은 제도에서 소외된 남부 귀족가의 힘을 빌려 일을 도모했다.
배를 준비하고 해적질로 자금을 확보한 뒤, 이를 통해 반란에 필요한 물자를 구하고 조심스럽게 세력을 확대하며 인력을 충당한 것이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노력했지만, 제국을 뒤엎을 정도의 전력을 확보하기까지는 아직도 까마득했다.
황자의 주장은 이랬다. 세뇌를 해제하는 능력을 가진 자이안을 중심으로, 소수 정예의 집단을 꾸려 중앙에 침입하는 것이다.
계획대로 풀리기만 한다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되리라.
“제도의 거주민은 병사를 포함해 30만에 달합니다. 그들 모두가, 이곳 남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세뇌에 걸려 있을 겁니다. 만일 침투조의 정체가 발각되어 제도에 고립되기라도 한다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문제는 위험부담이었다. 신중한 누군가가 꺼낸 의견에 대다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황자는 답답한 심정이었고, 자이안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언젠가 프레이가 말한 대로, 마족을 상대로 일반인은 그다지 전력이 되지 않는다. 위험부담은 분명하지만, 애초에 방법이 그것뿐이다.
‘이걸 어떻게 설득하죠?’
「네가 강하다는 걸 보여주면 그만 아니냐?」
‘하지만 이 근처에 마물 같은 건 전혀 없는데요.’
「굳이 마물이 튀어나올 필요도 없지. 그냥 대련이라도 좀 해주면 되잖아?」
‘어……?’
그러고 보니 그랬다. 그런 단순한 것도 떠올리지 못하고 있던 스스로의 고정관념에 자이안은 아연해졌다.
일리움을 벗어난 뒤 하도 거리낌 없이 마물을 죽이다보니 사고회로가 조금 이상해졌던 모양이다.
“모두 제 얘기 좀 들어주세요.”
목소리를 높인 자이안이 모두에게 마족의 위험성, 자신의 강함에 대해 설명했다. 바로 믿은 이들은 황자를 포함한 소수에 불과했다.
반란군 대다수가 제도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출신이라는 게 발목을 잡았다. 나쟈의 영향을 적게 받은 만큼 그녀의 위험성을 명확히 체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믿기 어려우시면 가볍게 대련이라도 어때요? 그러면 적어도 제가 강하다는 사실은 증명될 텐데.”
“대련이라, 그렇다면 누가 상대를…….”
“시간이 많지 않잖아요? 전부 한 번에 상대할게요.”
“…….”
짧은 침묵 뒤, 스물이 넘는 남자들이 험악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말투만 점잖을 뿐 자이안의 말은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누군가는 황자에게 항의하기까지 했다.
“전하! 아무리 손님이라도 그렇지 이건 너무 건방진 거 아닙니까! 그냥 보고만 계실 겁니까? 뭐라고 한 말씀 하셔야죠!”
“싫은데. 보고만 있으련다.”
자이안의 말을 믿은 이들은 일전에 해적선단에 타고 있던 이들이기도 했다. 바다 위에서, 100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맨몸으로 뛰어넘어 메인 마스트를 박살 낸 자이안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마족의 위험성을 실감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이안이 빈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알코스 경. 무기를 드십시오.”
“아, 전 괜찮아요. 맨손으로 싸울게요.”
“…….”
태연한 말에 맞은 편에 선 스물 세 명의 표정이 걷잡을 수 없이 일그러졌다. 팝콘을 집어 들고 구경 준비를 마친 프레이와 아르스가 박장대소했다.
자이안은 자신이 무슨 이상한 말을 한 게 아닌가 싶어 순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쳐도 책임 못 집니다. 후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일방적인 대련이 시작되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시에 자이안을 덮치려 한 순간, 눈앞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단 두 명. 소아레스가 소리를 통해, 그리고 유리아가 한계까지 눈에 힘을 집중해 간신히 그 모습을 쫓을 수 있었다.
북을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가 연속적으로 났다. 무리의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열 명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그들이 고통보다도 먼저 느낀 것은 당혹이었다.
그대로 사람 머리 위를 넘어 수 미터를 날아가 땅에 나뒹군 다음에야 저마다 옆구리며 가슴께 등에 지끈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붙잡아! 움직임을 막으라고!”
악에 받친 외침과 함께 마법이 발동했다. 메마른 땅이 불쑥 솟아오르더니 자이안의 팔다리를 묶기 위해 덩굴처럼 뻗어 나왔다. 자이안은 회피를 택하지 않았다.
대신, 마법이 팔다리를 완전히 구속한 것을 깨달은 순간 힘으로 부쉈다.
“어억!”
제어 중인 마법이 강제로 부서지자, 반동을 온몸으로 받은 마법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목숨에 지장은 없겠지만 앞으로 10분 정도는 마법을 쓰지 못할 것이다.
“어때요? 증명은 충분히 된 것 같은데.”
허리를 편 자이안이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23명 중 멀쩡히 서 있는 이가 10명 남짓. 그렇게 되기까지 걸린 시작이 1분이 채 안 됐다. 그들의 눈동자에 공포가 어렸다.
“그만할까요?”
담담한 물음에 10명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윽고 그들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두려움마저 느낄 만큼 놀라운 무위였으나, 그렇다고 이대로 꼬리를 내릴 수는 없었다.
“조금 전에는 무례한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 자이안 경.”
각오를 마친 표정으로 그들은 무기를 들었다.
“뱉은 말에는 책임을 져야죠. 끝까지 상대해드리겠습니다.”
남은 10명이 쓰러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후우. 오랜만에 운동 좀 했네요.”
자이안이 개운한 표정으로 황자와 유리안 등 남은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가차 없이 두드려 패기는. 새끼야, 넌 쟤들이 불쌍하지도 않냐?”
“기껏해야 가벼운 타박상인걸요. 전하의 부하잖아요? 다들 강한 분들이니까, 잠깐 쉬면 금방 나을 거예요.”
악담을 능청스럽게 흘려넘기는 모습에 황자는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황자가 자이안을 대하는 태도를 바꾼 것처럼, 자이안도 어느새 그를 허물없이 대하고 있었다.
정작 그 모습에 깜짝 놀란 건 어젯밤 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유리아였다.
“자, 자이안? 전하랑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네? 아, 이건…… 으음. 어제, 밤에 그냥 좀 있었어요.”
“이상하다……. 계속 같이 있었는데 왜 소외당한 것 같은 기분이……?”
“아하하하.”
논의가 재개되었다. 자이안의 강함은 증명됐지만, 그렇다고 반대 의견이 사라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이안이라는 강력한 전력을 잃을 수도 있음을 우려해 신중론을 펴는 이는 더 많아졌다.
결국 자이안은 다시 한번 논의에 끼어들었다.
“여러분 말씀도 옳지만, 지금 중요한 건 누가 맞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끝까지 반대하신다면, 저는 여러분과 헤어져 혼자서 제도로 향할 겁니다.”
신중론을 펴던 이들이 충격에 빠져 입을 다물었다. 숫제 협박이었다. 그렇다고 자이안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자이안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나쟈를 쓰러뜨리는 것이고, 황자 일행을 돕는 행동은 순수한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자리에 그것도 모를 만큼 생각이 짧은 사람은 없었다.
“핵심인 자이안이 그렇다는데, 더 할 말 있는 놈 있냐?”
모두가 침묵하며 고개를 저었다. 반란군의 방침이 간신히 새로 정해졌다.
「잘했다, 자이안! 암! 협상은 그렇게 해야지!」
「이게 협상? 영국에서는 협상이 내가 모르는 다른 뜻으로 쓰이나봐아?」
「결과적으론 서로 윈윈이잖아? 그럼 협상이지 뭐.」
‘강압적이긴 하지만,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최선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나중 가봐야 알 일이지. 중요한 건 한 번 결정했으면 망설이지 않는 거고. 저 친구들처럼 말이다.」
일단 방침이 정해지자, 논의를 지지부진하게 끌던 것과는 반대로 모두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자이안은 머나먼 북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제도가 그곳에 있다. 까마득하게 멀지만, 도달할 수 없는 거리는 결코 아니었다.
* * *
여행이 다시 시작되었다. 30명이 넘던 당초와 달리 일행의 숫자는 8명에 불과했다. 자이안, 유리아, 클라비수스 황자, 소아레스, 그리고 소아레스의 직속 수하로서 제국 전역을 오가며 정보를 취합하는 첩보원 4명.
불필요한 요소를 최대한 쳐내고 보니 남은 게 이 8명이었다.
“틈을 노려 심장을 찌를 때는, 그보다는 이렇게 움직이는 게 더 좋습니다. 견본을 보여드리지요. 유리아 님이라면 어렵지 않게 익히실 수 있을 겁니다.”
“네? 어…… 어라? 지금 팔이 완전 말도 안 되는 각도로 움직인 것 같은데?”
“시선을 유도하고 간격을 오인하게 만드는 눈속임입니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완력이 약한 것은 자명한 사실. 때문에 적을 현혹시키고, 인위적으로 빈틈을 유도하는 이런 기교가 더욱 중요하지요. 빈틈을 훤히 드러낸 적의 급소는 강한 완력이 없더라도 간단히 찌를 수 있으니까요.”
뒤쪽에서 유리아와 소아레스의 대화가 들렸다. 유리아의 재능을 눈여겨본 소아레스가 자진해서 그녀를 가르치겠다고 나선 것이다. 자이안으로서는 기꺼운 이야기였다.
안 그래도 유리아에게 더 가르칠 것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으니까.
「타이밍이 좋았구만. 아니지, 이건 자이안 덕분인가?」
‘전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그럴 리가 있겠냐. 소아레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거, 암만 생각해도 어젯밤에 너랑 한 대화 때문인데.」
‘그, 그건……!’
반사적으로 어젯밤 있었던 일을 떠올린 자이안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상황이었다. 깨어나는 게 조금만 늦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소아레스한테 관심 있냐?”
곁에서 걷던 황자가 그 모습을 보며 의아해하다가, 소아레스를 흘깃거리는 자이안의 시선에 뭔가 눈치챈 듯 히죽 웃었다.
“녜헤?! 켈록, 콜록! 콜록!”
상상도 못 한 말에 사레가 들린 자이안이 여러 번 기침했다. 황자는 껄껄 웃으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고 그래? 소아레스가 좋은 여자인 건 나도 알아. 남자라면 당연한 거지.”
“저, 저저저는, 그건! 그런 건! 아무튼 절대 아닙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전하!”
“하하하하! 무슨 동정도 못 뗀 어린애처럼…… 잠깐, 어린애 맞잖아?”
자이안을 놀리던 황자가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유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자이안과 친해진 이가 누구나 한 번씩은 겪는 관문이었다.
홀가분한 여행이었다. 사람이 적어진 만큼 짐이 줄었다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정신적인 의미이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반란군으로서 행동하다 보니 언제나 수십 명의 대인원이었다.
인원이 많으니 오랫동안 본거지를 떠나 움직이는 것도 한계가 있고, 잠시 마을에 들를 때도 고려할 요소가 많았다.
상단, 유목민 등 다양한 방법으로 위장했지만 실제로는 수십 명의 무장 조직이다. 정체를 숨겨야 하는 이상 사소한 마찰도 일어나서는 안 되니, 그만큼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야 했다.
“다음에 들를 마을도 사람들이 세뇌되어 있겠죠?”
“그렇겠지. 너무 티를 내지 않으면 들키지는 않을 거다. 걱정하지 마.”
“그게 아니라, 세뇌 해제용 아티팩트를 좀 만들어두고 싶어서요.”
“볼드 사람들의 세뇌를 풀 때 사용한 그것 말이냐?”
그때 사용한 건 일회성 소모품이었다. 그러나 아티팩트를 만들면서 어느 정도 감을 잡은 지금 그때보다 훨씬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만들 자신이 있었다. 아르스도 보증했다.
“그게 그렇게 쉽게 만들 수 있는 거냐?”
“만들려면 마물 소재가 몇 가지 필요해요. 시간도 좀 걸릴 거고…….”
황자를 설득하기 위해 시작한 설명을 정작 그는 끝까지 다 듣지도 않았다. 세뇌된 백성들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자이안, 네게 맡기마.”
황자가 자이안의 어깨에 툭, 손을 올렸다.
10일 뒤.
일행이 발을 디딘 곳은 인구수 약 1천여 명의, 도시라 부르기엔 작고 촌락이라기엔 큰 애매한 규모의 마을이었다.
소아레스에게 마을의 크기를 전해 듣고, 마을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규모의 아티팩트를 만들다 보니 예정보다 일정이 2~3일가량 지체되었다.
그러나 고작 그 정도로 천 명을 구할 수 있다면 값싼 대가였다. 일행의 표정은 밝았다.
“전하, 몸을 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한발 앞서 마을을 정찰하고 돌아온 첩보원이 가져온 정보를 듣기 전까지 그랬다.
첩보원에게 건네받은 두루마리를 소아레스가 모두에게 보였다. 내용을 확인한 이들은 할 말을 잃었다.
황자의 모습을 놀라우리만치 정확히 묘사한, 그를 반드시 생포해 황궁으로 붙잡아 오라는 수배 전단이었다.